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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책과삶]근대화가 만들어낸 단병, 연쇄살인
[라이프/책과삶]근대화가 만들어낸 단병, 연쇄살인
  • 허준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05.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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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연쇄살인
표창원지음
랜덤하우스중앙펴냄
1만2천원

손꼽히는흥행작<살인의추억>을재미있게보았을즈음이다.
지인과의술자리에서한국에서의연쇄살인이도마에올랐다.
서로의기억력을총동원해토종연쇄살인의흔적을찾으려고애써보았지만,그리많은이름이떠오르지는않았다.
결국연쇄살인이란서구식혹선진국형범죄가아니겠느냐며하릴없이소주잔이나부딪치고말았다.
흔히한국에는교과서적인의미의연쇄살인범은없다고한다.
작가에릭라슨은<화이트시티>를통해자본주의의전개와이에따른급속한도시화가창출해내는이성과광기의이중주를연쇄살인이라는풍경화속에세밀히담아낸바있다.
그의입장이타당한것이라면,자본주의화,도시화그리고무시무시한속도라는삼박자를갖춘대한민국이야말로연쇄살인의흔적을뚜렷하게지니고있지않을까?

대중과호흡하면서연쇄살인문제에접근

표창원교수의<한국의연쇄살인>은우리나라의맥락에서(그것도대중과호흡하면서)연쇄살인문제에접근하려는야심적인시도이다.
도입부에소개된최인구의유괴/살인사건을제외하면,이책은연쇄살인에대한이론과제반개념을정리하고이를기반으로한국에서벌어진연쇄살인을역사적으로풀어나가는방식으로구성되어있다.
아마도한국의연쇄살인‘사(史)’라고이름붙여도나쁘지않을듯싶다.

저자가일러주는연쇄살인(serialmurder)과연속살인(continuousmurder)간의개념정리가꽤인상적이다.
두용어는살인이라는뒷말의강렬함때문에꽤비슷한것으로보이지만,사실상당히다른유형에속하는행위를지칭한다.
저자에따르면,연속살인은단속(斷續)없이감정의흥분상태가지속되면서이루어지는살인행위(이른바“spreemurder”)에가깝다.
1980년대초의령에서벌어진순경에의한주민학살이나미국의콜럼바인고교총기난사사건처럼극도의흥분상태에서마구잡이로벌이는살인이이에속한다.
그에반해,연쇄살인은하나하나의살인사건이독자적인계획과실행의단위를지니면서중간중간의냉각기를거치는형태를띤다.
즉유영철의범죄에서보듯이계획적으로준비하고행위후에는증거인멸등뒤처리까지하는독립적이고완결적인행동들이지속되는경우가여기에해당한다.

한편,연쇄살인에대한널리알려진기준과조건들을나열하면서대중문화를통해과장되고왜곡된통념-증거를남기지않는치밀한살인,특이한살인자만의흔적등-에대한비판적인교정을시도하는부분역시흥미롭다.
저자는연쇄살인에서읽을수있는범인의독특한자취나특징은의도적으로남겨진것이라기보다는심리적인성격적문제,혹은직업적특성등에의해무의식적으로남겨진경우가대부분이라고밝히고있다.
영화나소설에서쉽게접할수있는그런연쇄살인범들이오히려현실에서는드문경우라고할까?
이렇게잘정리된이론을지나고나면70년대의김대두사건에서부터최근의유영철사건까지연쇄살인범죄의궤적들이빼곡하게기록된역사로접어들게된다.
80년대이후의사건들부터는더놀라게되고더두렵게되며아울러책장도더빨리넘어간다.
저자의말처럼,이렇듯생각보다많은연쇄살인사건들앞에서<살인의추억>으로현재까지도화젯거리가되고있는‘화성사건’은너무과장된면이없지않은듯도싶다.
저자에따르면,연쇄살인이라는용어가가하는대중의공포감이클수록수사당국은되도록‘연쇄살인’이라는용어조차꺼리게된다고한다.
아마도한국에는연쇄살인이드물다는통념은이러한언어작용때문일지도모르겠다.

의외로풍부했던토종연쇄살인자들중에는사회적균열의틈새에압착된유형이많았다는사실이인상적이다.
그압박과증오가실제부자들에대한무자비하고악랄한공격이라는형태로실현되었건,아니면엉뚱하게도사회적약자에대한폭력으로우회되었건간에,사회에서느낀모종의소외감이그범죄에주요한동기이자뒤틀린정당화였다는점은당연한듯보이면서도새로웠다.
역시근대화의속도는이땅에연쇄살인의상흔을여지없이남기고있었다.


연쇄살인의동기는사회로부터소외감

범죄학자의길을걷기전경찰에직접몸담았던저자가들려주는수사과정의이모저모는<살인의추억>과겹쳐지는부분이많아서인지,황당함과안타까움을동시에전해준다.
관할구역간의보이지않는텃세와경찰내부의정치적인고려사항때문에,엄혹했던시절시국관리에쓸데없이치안력을낭비하느라수사가제대로진행되지못했다.
한번잡았던진범들을어이없이놓아주거나눈앞에두고도잡지못하는대목에서는자연스레눈살을찌푸리게된다.
물론이모든악조건들속에서도<살인의추억>의시골형사마냥발로뛰어범인을잡아내고만대한민국형사들의근성앞에서는박수라도쳐주고싶었다.
모든사건이범죄드라마나영화에서처럼깔끔하게처리되면좋으련만,현실은언제나조금더지저분한법이다.
현장에서발견된체모하나에기대어인근지역모든남자들의체모를채취해마침내범인을검거하고‘털경장’이라는별명까지갖게되었다는수사관의이야기에서는감히“무식하다”라고말하기힘들었다.

한편,책의서술이당시의수사자료를분석하고알려지지않았던내부의후일담을소개하는점에치우친점은다소아쉽다.
저명한FBI수사관인레슬러가저술한<살인자들과의인터뷰>에서보듯,연쇄살인범을연구하는프로파일링기법의핵심은범인과의면밀한접촉을통한이론화에있다.
물론,이는전적으로저자의잘못이라고볼수는없다.
레슬러는연쇄살인자를헛되이형장의이슬로보내기보다-레슬러는악질연쇄살인범테드번디를처형하기까지소모된막대한비용을예로들고있다-이들을거름삼아연쇄살인을예방할수있는방법을강구해야한다고말한바있다.
하물며한국이라면저자의연구대상이제한될수밖에없는것은당연하다.

어쨌든표창원교수의<한국의연쇄살인>은유쾌하지는않을지라도무척흥미롭게읽히는책이다.
책장을덮으면서문득미셸푸코가낱낱이파헤친근대해부학의소재가(정신)병원이었다는점이떠올랐다.
그는과거의병원이야말로정상과비정상을가르는이성재판소와같은역할이었고,바로그안에건조한이성과함께작용한권력이있었다고보았다.
아마도,한국의연쇄살인범들을통해현기증나는자본주의화·근대화가만들어낸집단적인병적징후들에대한‘고고학적인’발견혹은‘현재적인’교훈을얻을수있지않을까?
허준석/자유기고가juhuh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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