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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우리 근대 예술가에 바쳐진 휴머니즘적 헌사
[책과삶]우리 근대 예술가에 바쳐진 휴머니즘적 헌사
  • 박복영/ 자유기고가
  • 승인 2005.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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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 예술가에 바쳐진 휴머니즘적 헌사 얼마 전까지 동국대 강정구 교수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법무장관이 검찰지휘권을 행사한 일이 적절했느냐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다.
이런 논란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정말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어느 세대나 자신들이 겪은 뼈저린 경험은 그들의 내면세계와 사고를 형성하는 모양이다.
해방 후 좌우 대립을 겪고 6·25를 겪은 50대와 60대 역시 여전히 자신들의 당시 경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그 시절에 대해 듣고 책에서 배우고 소설로 읽고 영화로 보았으니 웬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다.
20대에 읽은 수많은 우리 소설이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대립을 다루고 있었고, 박완서 같은 이는 50년대 보통사람의 굴곡진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가슴 아리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시대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단지 듣고 읽어서 알고 있던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깊이 패인 시대의 흉터와 생채기를 안고 있음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흔적이 평소에는 타인에게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의 내면 깊숙이에는 또렷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땅에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역사의 굴곡을 겪으면서 서로 너무나도 다른 체험과 상처를 가진 세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절대적 빈곤을 경험한 세대와 절대적 풍요를 경험한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한 끼 식사를 배불리 먹기 위해 죽자 살자 뛰었던 세대와, 살을 덜어내기 위해 죽자 살자 뛰는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억압을 억압인 줄 모르고 지낸 세대와, 억압을 자유로 바꾸기 위해 힘겨웠던 세대와, 자유가 자유인 줄 모르는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빨갱이를 때려잡기 위해 총을 들었던 세대와, 빨갱이를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쯤으로만 생각하는 세대와, 빨갱이라는 말도 모르는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크로스오버 예술 해방과 전쟁, 분단과 냉전, 고속 성장이 없이, 평탄한 세월을 보내며 그저 그런 정도의 성장을 경험한 나라에서는 이런 차이와 갈등의 씨앗들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와 물질의 질주가 만들어낸 엄청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태우고 한쪽에서는 인공기를 태우는 시청 앞 시위는, 어쩌면 이런 스트레스의 극히 일부일지 모른다.
매일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TV 시청과 신문 읽기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거대한 스트레스를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하나의 방법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을 피하는 것일 게다.
TV도 드라마만 보고, 신문도 연예면만 보고, 얘기도 술자리 후일담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나의 <화첩기행> 읽기도 결국 이런 것인지 모른다.
김병종의 <화첩기행>을 읽는 동안, 엉클어졌던 마음은 어느새 가지런해지고 제자리로 가라앉는다.
그는 20세기를 살았던 이 땅의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그들의 삶터를 따라가며 들려준다.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색과 노래와 시와 조형도, 다 그 사람의 삶터와 체험과 거기서 생겨난 정서를 담고 있기에 기행문 형식의 예술(가) 평론은 푸근하고 풍성하다.
우리네 글이 날선 시시비비를 담고 있다면, 그의 글은 예술가의 삶과 체험과 그리고 그런 것들이 녹아 있는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는 휴머니즘적인 글이다.
지은이 김병종은 미대 교수이고 동양화가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은 빼어난 글 재주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재능을 가진 데 대해 응당 시샘하는 마음이 솟지만, 그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그림과 글이 찬란하게 어우러져 있는 크로스오버의 예술을 우리가 만끽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시샘하는 맘은 절로 사라진다.
그의 글은 따뜻함이 배어 있는 동시에 또 유려하다.
그리고 책의 삽화로만 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그의 현대적 동양화들은 상상력을 한층 자극하여 읽는 이를 예술가의 고향이나 삶터로 이끌고 들어간다.
이 책을 읽으면 메밀꽃 핀 이효석의 봉평으로도 가고 뱃사공이 아리랑을 부르며 노를 젓는 아우라지 정선으로도 간다.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와 같은 시구 - 닿소리 비읍이 연달아 나오고 양성모음이 이어져 시를 읽으면 정말 말이 달리는 듯한 경쾌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어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경이롭다 - 로 우리말 조탁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정지용의 고향 옥천 들녘으로도 갈 수 있다.
스탠드만 고요히 불 밝히고 있는 깊은 밤에 그의 글과 수묵화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노라면, 책장 너머 바로 뒤편에서 ‘졸음에 겨워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고 있는 늙으신 아버지’를 만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면 과장일까? 오직 삶의 공간과 작품에만 돋보기를 <화첩기행>은 시대를 앞질러 살았던 나혜석의 수원과, 선한 이웃을 따뜻하게 그린 박수근의 양구와, 논리적인 경제학도로 살다 느닷없는 독재정권의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소풍처럼 살다간 천상병의 인사동을 우리에게 구경시켜 준다.
이 책의 주인공들 중에는 일제 시대에 친일한 사람도 있고 항일한 사람도 있으며, 해방 후에 월남한 사람도 있고 월북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독재 시절에 친정부한 사람도 있고 반정부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들은 모두 예술가일 뿐이며, 저자는 그들의 정치적 처세에는 펜대를 갖다대지 않는다.
다만 그 흔적이 묻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공간이나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만 말한다.
내가 <화첩기행>을 다 읽은 후 새로 읽고 싶은 책은 그가 소개한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이라는 책이다.
저자인 김용준이 1950년에 월북한 화가라는 사실과 내가 이 책을 고른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빨갱이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인민의 벗의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가 우리 시대의 빼어난 화가이고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책을 읽어보겠다는 것이다.
월북했느냐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젊은 날의 체험이 나에게 들여놓은 무늬이다.
내 생각과 행동에 들여진 이 무늬가 세월에 따라 변색은 되겠지만 그렇게 빨리, 그렇게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는 자만하지 않는다.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나의 앞선 세대가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았겠는가. 박복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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