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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국 정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Ⅰ
[커버스토리] 한국 정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Ⅰ
  • 이윤찬 기자
  • 승인 2006.10.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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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기 똑같은 ‘주기’] 북미 세 차례 ‘갈등→협상→화해 반복 … 이번엔 갈등만 반복하다 2차 위기 북핵 위기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다.
갈등과 북미협상 그리고 북한의 후퇴 및 미국의 대북지원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제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내지 못하는 것도 똑같다.
영변 위기 ‘제네바 기본합의’로 해소 90년~2000년, 북미 사이엔 총 세 차례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을 묶어 통상 ‘1차 북핵 위기’라고 한다.
지난 91년 12월. 남북한은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협의와 함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결한다.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튼 역사적 선언이었다.
하지만 화해무드는 불과 6개월 만에 산산조각 났다.
92년 5월 국제원자력위원회에 북한의 원자력시설과 물질을 밝히는 ‘보고서’가 제출되면서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었던 것. 국제원자력위원회 이사회는 북한의 의혹지역에 대해 특별사찰을 공인했고,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은 북측에 의심스런 장소를 사찰할 수 있도록 ‘영변여행’을 제안한다.
북한의 화답은 냉랭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했다.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던 것. 이것이 바로 ‘영변 핵 위기’다.
영변 핵 위기는 이듬해 최고조에 오른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시작될 조짐을 보이자 북한은 “제재는 곧 전쟁을 의미하며 전쟁에는 관용이 없다”고 맞선다.
미국도 북한 선제공격을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D-데이’만을 기다린다.
전쟁 일보 직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북미는 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를 체결, 극적으로 화해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영변활동의 동결을 이끌어내고, 북한은 경수로형 원자로가 가동하기 전까지 매년 20만톤의 중유 공급 등 경제지원을 약속받는다.
또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또는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공식 입장도 전달받는다.
94년 제네바 기본합의 이후 약 5년간 화해무드가 이어진다.
그러나 98년 8월 <뉴욕타임tm>가 “미국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동결된 핵무기 프로그램을 되살리기 위한 집중적 노력으로 믿어지는 북한의 대규모 비밀 지하시설을 발견했다”고 보도하면서 분위기는 또 다시 급랭한다.
북한의 대규모 비밀 지하시설이 구축된 것으로 지목된 곳은 금창리. 미국은 발 빠르게 금창리 사찰을 요구하는 한편 추가 재정지원 삭감 카드를 꺼내들었다.
강수였다.
북한도 물러서지 않았다.
금창리는 민간용 기지이므로 절대 접근을 허용할 수 없다고 버텼던 것. 북미는 총 5차례에 걸쳐 회담을 갖고 99년 3월16일 합의를 이끌어낸다.
‘뉴욕합의’가 바로 이것이다.
북한은 ‘뉴욕합의’를 통해 금창리 기지의 복수사찰을 허용해주는 대가로 대량의 식량지원 약속을 받는다.
하지만 뉴욕합의는 제네바합의보다 불안전했다.
‘대포동 미사일 위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80년대에 스커드A·B·C를 차례로 실험했다.
같은 기간 사정거리 1천300km, 탑재량 1천200kg인 로동 미사일을 개발, 10여개 기지에 배치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눈에 띌 만큼 미사일 생산능력이 향상된 북한은 98년 8월 3단계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발사한다.
그것도 태평양 한 가운데에 떨어뜨리는데 성공한다.
미국 역시 발 빠르게 대응방안을 모색한다.
미 의회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지명, 대포동 미사일을 포함한 <미사일 보고서> 제출을 요구한다.
이른바 <럼스펠드 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공개적 또는 잠재적 적대국가들의 생화학·핵무기·미사일 생산 및 획득 의지는 미국과 동맹국들에게 위협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에 미사일을 보유하게 된 국가들의 능력들은 미흡하지만 5년 이내에 미국을 위협할 만할 것이다.
미국의 정책은 재검토돼야 한다.
” <럼스펠드 보고서> 이후 북미는 총 5차례에 걸쳐 대포동 미사일 관련 협상을 벌이고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른바 ‘워싱턴 합의’로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실험발사 계획의 일시적 동결에 동의하고, 경제제재의 완화를 약속받는다.
앞서 언급했듯 총 세 차례에 걸친 ‘1차 북핵 위기’ 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북미 모두 ‘양자회담’만을 고집했다.
공교롭게도 양국은 번번이 협상에 성공했다.
한국 정부로선 ‘발’을 디딜 틈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북강경책을 구사하는 부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미관계는 서서히 균열하기 시작한다.
지난 2002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개발했다는 의혹을 미국 측이 제기하자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터진다.
미국은 제네바 기본합의의 파기라면서 중유 공급 중단 등을 선언했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맞선다.
통상적인 주기대로라면 양자 대화에 들어가야 할 시기. 그런데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와 달리 양자 대화를 피한다.
시종일관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핵 위기’를 조율하려 했던 것. 북한 역시 6자 회담 틀을 벗어나 양자 대화를 줄기차게 요구한다.
양국 간 입장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은 까닭이다.
급기야 금융제재 문제까지 발생, 북미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북한은 지난해 핵보유국을 선언한데 이어 지난 9일 핵실험에 성공한다.
2차 북핵 위기로 안보 불안과 경제 위축에 시달리던 북한이 ‘벼랑 끝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두고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이유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북한은 북미대화를 요구하면서 끊임없이 벼랑을 타고 있다.
미국도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대화’에 응하겠다는 시그널을 서서히 보낸다.
북미 대화가 극적으로 성사된다면 한국 정부는 또 다시 ‘제3자 위치’에서 먼 산만 바라볼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과연 이번에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인가. 한국 정부가 ‘2차 북핵 위기’를 푸는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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