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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가상현실과 정신치료의 만남
[IT] 가상현실과 정신치료의 만남
  • 이용인
  • 승인 200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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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연구진, 대인공포증 치료법 개발…치료비 줄이고 부작용 적어
사람이 모여 있는 곳만 가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면서 심장박동도 속도를 높인다.
밤새 원고를 준비했지만 막상 연단에 서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천둥처럼 울리고, 쳐다보는 시선이 점점 따갑게 느껴지면서 무릎의 힘이 쭉 빠진다.
심하면 사람을 피하게 되고, 이성 친구와 만나는 것도 주저한다.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해 상대방이 당황하거나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인공포증’이라 부르는 이런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대개는 약물에 의존하는 게 일반적이다.
공포상황이 닥치기 전에 약을 복용해 미리 불안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치료는 약효가 지속되기 어렵고, 게다가 습관성이 될 염려가 있다.
인지·행동 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환자가 공포를 상상하게 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치료방법이다.
환자들은 공포에 자주 접하면서 점점 공포에 무뎌진다.
그러나 이 방법도 환자에게 억지로 공포상황을 상상하도록 유도하기가 만만치 않다.
또한 치료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선 환자들이 실제 상황에 접하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아바타 반응 다양하게 구현 대인공포증 환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덜 느끼게 하면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환자들이 처음에 ‘가짜’라는 사실은 알지만 몰입한 뒤 실제와 똑같은 상황을 접할 수 있다면 해결책이 나온다.
해답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에 있다.
한양대 의과대학 가상현실정신치료팀(팀장 김선일 교수)이 최근 선보인,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대인공포증 치료법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가상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속이는 기술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오감에 자극을 주어 현실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정신질환 환자들은 가상현실 속에서 ‘실시간으로’ 실제와 똑같은 공포와 맞서 싸우며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대인공포증 환자들은 특히 ‘대중연설’(public speaking)에 겁을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양대 의대의 치료 프로그램도 대중연설에 공포를 느끼는 환자들 치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환자가 헬멧 모양의 헤드마운티드디스플레이(HMD)를 머리에 쓰고 가상현실에 들어가면 캐비넷, 칠판, 연단 등 교실과 비슷한 환경이 눈에 들어온다.
교실엔 8명의 가상청중(아바타)들이 의자에 앉아 환자의 발표를 기다린다.
가상현실 치료기술의 핵심은 아바타의 반응이다.
환자에겐 공포의 대상인 아바타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치료효과가 달라진다.
환자가 처음 연설을 시작할 때 아바타는 조용히 앉아 연설을 듣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설이 진행되면서 아바타는 공포스런 상황을 만들어낸다.
잡담이나 하품, 비웃기, 뚫어지게 쳐다보기 등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나가는 아바타도 있다.
3차원 사운드를 설치해 웅성거림 등으로 공포의 사실감을 높인다.
정신과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이런 아바타의 행동을 뒤에서 조정한다.
의사 앞에 놓인 PC의 키보드엔 다양한 행동이 입력돼 있다.
의사는 환자가 흘리는 땀의 양이나 심장박동수 따위를 재면서 자극을 높이거나 줄인다.
물론 환자가 공포를 극복하고 발표를 잘했을 때는 아바타가 박수를 치게 할 수도 있다.
아바타를 통해 의사와 환자가 상호작용을 하는 셈이다.
임상실험 단계 남아 있어 물론 한양대 의대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은 아직 임상실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시험판’이다.
때문에 아바타를 몇명으로 하는 게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지는 수많은 실험을 통해 검증돼야 한다.
예컨대 아바타 숫자를 200여명으로 하는 것은 대인공포증 환자들에겐 별 의미가 없다.
정상적인 사람도 이 정도 숫자의 청중 앞에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때문이다.
거꾸로 아바타 숫자를 2~3명 정도로 적게 잡는다면 증세가 심하지 않은 환자들에겐 아무런 공포심도 심어주지 못한다.
연구팀이 아바타를 8명으로 잡은 것도 가장 일반적으로 부딪히는 상황을 재연하기 위한 것이다.
아바타의 반응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가상공간을 어디로 정하느냐 따위도 치료에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
가상현실 기술뿐 아니라, 정신과의사들과의 의사소통이 프로그램 효과를 좌우하는 셈이다.
연구팀은 현재 미국의 한 심리학 전문 대학에 임상실험을 위탁해놓고 있다.
연구팀 김인영 교수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정신치료의 역사가 짧아 아직 정답은 없다”고 말한다.
정신치료와 가상현실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세계적으로도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연구는 고소공포증이나 운전공포증 치료 등 비교적 단순한 정신질환에 치우쳐 있었다.
공포의 대상이 명확하기 때문에 가상현실 기술로 공포를 재현하기가 쉬웠던 탓이다.
예컨대 고소공포증은 환자가 공포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높이’만 잘 구현하면 된다.
하지만 대인공포증이나 강박장애로 넘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공포의 대상이 워낙 넓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인공포증 환자는 사람들의 한두가지 반응에만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환자들은 상대방의 불쾌한 표정, 찡그린 인상, 비웃는 말투, 지겨워하는 몸짓 등 수십, 수백가지 자극에 반응을 보인다.
가상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그만큼 변수가 많아지는 것이다.
필요한 하드웨어의 용량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소프트웨어도 복잡해진다.
때문에 외국에서도 대인공포증이나 강박장애를 가상현실로 치료하려는 연구가 한창이지만 성과를 낸 곳은 두곳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런던대학 연구진이 최근 열린 세계의료가상현실학회(MMVR)에서 한양대 의대 연구팀이 개발한 것과 비슷한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가상현실 정신치료 시스템을 만드는 미국 회사 버추얼리베터(Virtually Better)도 최근 대인공포증 치료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두군데서 개발한 프로그램들은 워크스테이션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돼 값이 비싼 데 비해, 한양대 연구진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그래픽은 다소 떨어지지만 PC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신분열증 등 치료영역 넓어질 것 대중연설 치료 프로그램은 환자치료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좀더 정교하게 현실을 구현할 수 있다면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이용이 가능하다.
예컨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들의 성격을 고치거나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데 적용할 수 있다.
게다가 정신질환 수준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은 ‘웅변학원’에 가지 않아도 담력을 키울 수 있다.
가상현실과 정신치료의 만남은 전망이 밝다.
환자 입장에선 약물치료로 생기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병원입장에선 인건비를, 환자입장에선 치료비 부담이 줄어들 수도 있다.
예컨대 의사가 대인공포증 환자의 치료성과를 점검하기 위해선 정상인들을 모아놓고 매번 환자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가상현실 치료는 거의 제한없이 반복적으로 공포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만큼 시간도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가상현실 치료의 장점은 의사가 환자의 반응에 따라 공포의 강도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갑작스레 공포에 부딪힌 환자가 기절을 하는 등의 예기치 못한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김인영 교수는 “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등 정신치료 영역도 점점 넓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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