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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고수를 찾아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게임기술지원팀
[우리시대 고수를 찾아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게임기술지원팀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4.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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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의 디지털 영상 요리사 특수효과는 영화의 맛을 결정하는 소금과 같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영화를 일품 요리로도, 지나치게 짜거나 싱거운 실패작으로도 만들 수 있다.
특수효과는 종종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광활한 우주공간을 단숨에 관객 눈앞에 펼쳐보이기도 하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덮으며 돌진하는 흉칙한 괴물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직접 찍기 어려운 장면이나 효과를 손쉽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전국 영화팬들을 감동시킨 <태극기 휘날리며>도 실은 이 양념 덕을 톡톡히 봤다.
시·공간적 제약 등으로 구현하기 힘든 대규모 군중신이나 전투장면을 이 놀랄 만한 기술이 감쪽같이 재현해 낸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디지털 요리사는 모두 9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디지털콘텐츠연구단의 게임기술지원팀이다.
<태극기…> 전투장면, CG로 ‘뚝딱’ “이거 참, <태극기…> 얘기를 자꾸 하려니 영 쑥스럽습니다.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쪽과의 관계도 있고 해서, 우리가 자꾸 얘기하는 게 좀 거북하거든요. 이해해 주십시오.” 양광호 팀장은 얼굴을 붉히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개봉과 동시에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인지라, 제작사를 제쳐두고 주위에 소개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슬며시 돌아서선, 충혈된 눈으로 일에 매달린 팀원들을 불러모으느라 분주하다.
“그래도 우리 팀이 우리나라에선 최고거든요.” 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ETRI 게임기술지원팀이 창조해 낸 장면은 언덕을 새까맣게 덮으며 몰려들던 ‘중공군’과의 전투장면과 전쟁의 포화를 벗어나려던 피난민 행렬이다.
이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2가지 특수장비가 동원됐다.
모션컨트롤카메라와 모션캡처시스템이다.
모션컨트롤카메라는 컴퓨터그래픽(CG)과 합성할 실사장면을 찍는 특수장비로, 복잡한 움직임을 보이는 서로 다른 두 물체를 반복해서 찍어 합성할 수 있다.
모션캡처시스템은 사람의 움직임을 추출해 디지털 캐릭터에 그대로 입히는 데 쓰이는 장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태극기…>에서 중공군과의 대규모 전투신에 실제 동원된 배우는 300여명. 우선 이들을 이용해 가까운 거리의 전투장면을 3차례에 걸쳐 나눠 찍는다.
그리고 3개의 장면을 이어붙이면 대략 900여명이 싸우는 장면이 완성된다.
그 뒤로 보이는 먼 거리의 전투장면은 100% CG로 만들어낸다.
모션캡처를 이용해 엑스트라의 전투 동작을 추출한 뒤 이를 디지털 캐릭터에 그대로 심고, 이들을 무한대로 복제해 화면 뒷쪽에 이어붙이는 식이다.
싸우는 모습이 멀게 처리돼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완성된 화면만으로는 별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장면을 구현하는 곳은 국내에서 2∼3곳에 불과하다고 양광호 팀장은 말한다.
우선 8억원을 호가하는 모션컨트롤카메라의 경우, 이곳을 포함해 국내에 단 3대밖에 없다고 한다.
모션캡처시스템도 몇몇 사설업체 등이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이를 이용해 완성도 높은 디지털 캐릭터를 완성하는 곳은 드물다.
무엇보다, 두 장비를 모두 보유한 곳은 국내에서 게임기술지원팀이 유일하다.
“더 어려운 건, 이 장비를 제대로 다루는 인력 확보예요. 완성도 높은 영상을 만들어내려면 장비에 대한 지식 못지않게 영상에 대한 감각과 관련 기술에 대한 지식을 두루 갖춰야 합니다.
우리 팀원들은 모두 현장에서 몇 년씩 실무를 거친 베테랑들이죠. 감히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게임기술지원팀은 2001년 12월에 닻을 올렸다.
처음엔 팀 이름대로 게임과 관련된 연구개발과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그때부터 시작한 게 ‘온라인게임 테스트베드 지원사업’이다.
국내 온라인게임 개발업체들은 상용화에 앞서 마지막으로 완성도를 점검하는 베타테스트를 실시하는데, 이에 필요한 서버와 네트워크를 이곳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게임기술지원센터를 거쳐간 온라인 게임만 해도 86개에 이르고, 이들이 거둔 매출액도 400억원대라고 한다.
이와 함께 우수 대학 게임동아리와 산업계 핵심 인력을 발굴·지원해, 500여명의 ‘게임 역군들’이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디지털 영상 콘텐츠쪽으로 발을 넓힌 건 지난해부터다.
1998년 도입한 모션컨트롤카메라 등 특수장비를 업계에서 두루 이용할 수 있도록 경기도 성남시 분당으로 옮기면서다.
이때부터 게임 동영상은 물론 영화와 광고, 특수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됐다.
지난해 한해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만도 41건이다.
영화 <챔피언>과 <장화 홍련>을 비롯해 <크로노스>, <프리스톤테일> 등의 온라인 게임이 이들의 손때가 묻은 자식들이다.
“조만간 방영될 모토로라의 ‘스타택2’ 광고도 우리 작품”이라고 양광호 팀장은 귀띔한다.
게임기술지원팀이 관련 시장에서 소화하는 물량만 해도 모션캡처시스템이 50%, 모션컨트롤카메라는 70%에 이를 정도다.
밤샘 작업 피로도 관객 호응에 싹~ 하지만 이들의 활약이 정부의 지원과 잘 갖춰진 시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 뒤를 받치는 건 땀과 노력이다.
정해진 퇴근시간은 숫자에 불과하다.
작업에 매달리다 보면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각종 전문지와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새 기술을 발굴해야 한다.
전문가를 초빙해 여는 정기세미나도 적잖은 부담이다.
30대 중반의 평균 연령에도 연구원의 절반이 아직 독신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결혼한 연구원 중에선 “초기엔 전업을 고려할 만큼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털어놓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땀흘려 작업한 게임이나 영화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때는 모든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며 연구원들은 언제 고생했냐는 듯이 씨익 웃는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작업 결과물을 보면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하다는 얘기다.
디지털 영상에 접목되는 CG의 발전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양광호 팀장은 “오늘 개봉된 영화에 적용한 기술을 다음 영화에 또 선보이면, 관객이 당장 식상해한다”고 혀를 내두른다.
이 때문에 영화 속 CG는 첨단 신기술의 각축장이다.
늘 새로운 기술과 효과를 발굴하고 익혀, 이를 관련 산업에 적용하고 전파하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국내 CG 수준을 보면, 광고쪽은 이미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올라섰다고 봐요. 하지만 국내에서 영화쪽에 도입된 건 불과 2년 안팎이거든요. 아직 장비나 기술 면에서 상당히 낙후됐다고 봐야죠.” 그래서 게임기술지원팀은 잘 만들어진 영상을 원함에도 재정이 부족해 이를 포기하는 국내 영세업체들을 우선 배려한다.
작업을 해주는 대가로 받는 금액도 “실비에도 못미치는, 유지보수비 수준”이라고 한다.
값비싸고 다루기 어려운 장비를 함께 쓰자는 게 이곳의 기본 취지다.
원하는 업체에는 기술 이전과 교육도 병행한다.
이 때문에 일부 ‘경쟁사’들이 여우눈을 치켜뜰 때도 있지만, 대다수 영세업체들에 CG의 새로운 세상을 골고루 맛보게 해준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외국에 비해 낙후된 장비들이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말예요. 이 장비만 있으면 좀 더 멋진 영상을 만들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남거든요. 그런데 그게 외국에선 널리 쓰이는데, 우리나라에는 없는 거예요. 그 때문에 외국행 비행기를 타는 업체들을 보면 마음이 참 쓰려요. 좀 더 많은 장비들이 지원된다면, 장기적으로도 기술발전이나 비용절감 면에서 더 이득이 될 것 같거든요. 물론, 예산은 늘 빠듯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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