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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T칼럼] 잃어버린 옛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
[DOT칼럼] 잃어버린 옛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
  • 정형문(한국EMC 사장)
  • 승인 2000.11.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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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일이다.
지방출장을 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평소 잘 찾아뵙지 못하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고향에 들렀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머님이 보자기로 싼 책 몇권을 건네시면서 당부하셨다.
“이건 네가 보관해라. 곰곰 생각해봤는데, 네가 그래도 책을 제일 좋아하잖니?” “이게 뭐예요?” “읽어보면 안다.
내가 한글을 깨우칠 때 습작하면서 베낀 필사본이다.
그땐 책을 그렇게 만들었지. 지금하곤 문법이 다르지만 그땐 잘 썼다고 칭찬받던 필체였다.

다홍치마 시절 희미한 촛불 아래 한자한자 써내려갔을 어머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며칠에 걸쳐 <장화홍련전>, <춘향전>, <별주부전>을 읽어나갔다.
그러다 필체가 전혀 다른 서찰이 몇장 끼여 있는 걸 발견했다.
외할아버지가 아직 어린 손녀를 혼인시킨 탓에 불안한 나머지, 오늘은 뭘 배웠고 내일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꼬박꼬박 적은 것을 친할아버지께 보낸 편지였다.
반백년 전이 마치 어제인 듯한 착각이 들면서 어머님의 어린 시절에 살고 있는 듯한 미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어머님이 육필로 쓰신 책들과 그 낡은 서찰은, 자식을 키우면서 고뇌에 빠질 때마다 떠오른다.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보물들이다.
좋은 기록이란 그래서 보관할 가치가 있고, 조상의 문화유산이란 단순한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후손의 교육에까지 영향을 끼치는구나 생각한다.
‘직지’ 찾기에 관심과 동참을 호소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직지’(直指)가 있다.
국사시간에 ‘직지심경’이라고 배웠던, 우리 민족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이다.
그런데 이 직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동양문헌실에 현재 한권이 보관돼 있을 뿐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선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록수단인 문자 없이는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던 시절, 직지는 유용한 정보를 불특정 다수에게 대량으로 전파하는 길을 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한 직지를 찾기 위한 운동이 지금 펼쳐지고 있다.
컴퓨터 스토리지 전문회사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을 찾는 일에 동참했다는 건 좋은 인연이다.
대량의 정보를 발생시킬 수 있었던 금속활자본과 대량의 정보를 저장하는 회사와의 인연은 어쩌면 운명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근 미국 UC버클리에서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3년 동안 생겨날 정보가 지난 30만년 동안의 정보보다 많을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활자가 아니고선 보관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림이나 사진, 의료영상, 영화도 디지털로 저장한다.
쓸모가 있건 없건, 건전하건 불건전하건, 모든 게 정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직지를 찾겠다고 나선 건 신선한 발상이다.
가문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입신양명하여 효를 다하고, 누구의 몇대 손임에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온 마지막(?) 세대들이 이 시대의 어른으로 지금 살고 있다.
그럼에도 흐트러진 신세대들을 꾸짖는 목소리는 작고, 후세에 길이 빛날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왜 직지를 찾으려 하는가. 보자기 하나에 싸인 몇권의 낡은 책이 내게 자긍심을 준 것처럼, 훌륭한 문화유산이 대물림하면서 민족정서를 바로잡는 도구로 쓰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직지를 찾는 과정 자체가 요즘 세태에 따끔한 침이 되어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를 만들고,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아끼는 참 어른이 되고, 자식들에게 예절과 겸손이 몸에 배도록 가르치는 가정이 늘어나기를, 그런 미덕이 우리 일상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직지 찾기 운동에 사람들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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