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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에 맞서 니카라과 운하가 뜬다
파나마 운하에 맞서 니카라과 운하가 뜬다
  • 이병효 저널리스트
  • 승인 2014.07.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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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니카라과 운하 건설 적극 추진…2014년 12월 착공, 2019년 완공 목표

중국이 니카라과 운하를 맡아서 건설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에 따라 올해 8월 개통 100주년을 맞는 파나마 운하에 맞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제2의 대운하가 과연 성사될 것인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몬로 독트린 이후 파나마 운하는 말할 나위 없이 중남미 전역을 ‘미국의 뒷마당(America’s Backyard)’으로 치부해왔다. 따라서 중국이 미국의 세력권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보란 듯 땅을 파헤친다는 것에 대해 내심 불편하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니카라과 운하가 완공돼 파나마 운하의 경쟁상대로 떠오르고 중국의 통제 하에 들어갈 것이 확실해진다면 미국이 팔짱을 낀 채 마냥 방관하리라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미국이 어떤 대응책을 들고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2년 9월26일 니카라과 정부 산하 대양간대운하위원회와 케이먼아일랜드에서 설립된 중국계 민간법인 ‘HKND(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회사)그룹’은 니카라과운하·발전프로젝트를 위한 재원 조달 및 건설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듬해인 2013년 6월13일 니카라과 의회는 HKND에 운하 건설관리 및 부대사업 운영권을 50년 동안 부여하고 다시 50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결했다. 이틀 뒤 6월15일에는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과 왕징(王靖) HKND그룹 회장이 니카라과운하 건설운영 합의서에 서명했다.

다니엘 오르테가 현 대통령은 지난 1970년대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FSLN) 혁명군 지도자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독재정권에 항거해 싸웠던 바로 그 오르테가다. 그는 1979년부터 85년까지 국가재건위원회(Junta) 간사로서 니카라과를 이끌었고 85년부터 90년까지는 대통령을 지냈다. 1979년 체크공화국의 ‘벨벳혁명’이 공산주의 정권이 비폭력적 수단으로 물러난 역사상 첫 사례였다면 1990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했던 오르테가 정권이 퇴진한 것은 선거에 의한 공산정권 교체의 선례가 됐다. 오르테가는 이후 혁명으로 집권했다가 선거에 의해 쫓겨나고 다시 선거로 복귀한 최초의 정치가가 됐다.

1945년생인 오르테가는 이후 1996년, 2001년 대통령선거에 연속 출마했으나 떨어졌고, 3수 끝에 2006년 대 선에서 당선했다. 이 과정에서 오르테가는 공산주의자에서 민주사회주의자로 탈바꿈하면서 FSLN의 온건화를 주도했고 낙태 전면금지 등 친 가톨릭 정책노선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그는 2006년에 이어 2011년 재선출 됐고, 2014년 1월 FSLN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니카라과의회가 헌법의 대통령 연임제한 조항을 폐기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2016년 대선에 출마하는 길이 열렸다.

왕징은 1972년 베이징 출생의 중국기업가로 현재 베이징 신웨이(信威)통신산업집단의 회장이다. 신웨이그룹은 중국 3G 모바일서비스의 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11억 달러의 시가총액을 갖고 있는데 왕 회장이 37%를 소유한 대주주라고 한다. 신웨이는 2013년 니카라과에 3억 달러 규모의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왕징은 베이징에서 전통 한의학을 공부했고, 캄보디아와 태국 등 동남아에서 금광·철광·보석광산을 개발하면서 자본을 축적했고 현재는 신웨이를 비롯한 20여 개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무명에 가까운 기업인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신웨이의 홈페이지에는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등 중국 지도부가 회사를 방문했다고 과시하고 있지만 왕징 회장은 2012년 6월24일 베이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보통 사람이라면서 “중국 정부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카라과운하는 건설기간 6년, 건설비용 4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면서 “이미 글로벌 투자가들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고 말했다. 건설비 400억 달러는 니카라과 국내총생산(2011년 기준)의 네곱절에 이르는 액수다. 니카라과운하가 완공되면 현재 52억5,000만 달러 규모의 확장공사 중인 파나마운하와 물동량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다. 또 니카라과의 이웃국가인 온두라스는 이와 별도로 중국계 자본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건설기간 6년, 건설비용 400억 달러 소요 예상

2014년 1월12일 영국 <텔레그래프>지에 따르면 왕징 회장과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운하가 예정대로 “2014년 12월 착공할 것”이라고 밝혔고 왕 회장은 “2019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니카라과운하는 총 286㎞ 길이에 깊이 27.6m, 너비 520m로 40만t급 선박이 통과할 수 있도록 건설될 예정이다. 아울러 공항 2곳과 철도, 송유관, 항구시설이 함께 건설된다. 참고로, 파나마운하는 길이 77.1㎞에 갑문 수심 12.5m, 너비 33.5m이다. 2015년 확장공사가 끝나면 현재 파나맥스(Panamax) 5만2,500t급, 컨테이너선 5,000TEU급에서 뉴파나맥스(New Panamax) 12만t급, 컨테이너선 12,000TEU급이 항행할 수 있게 된다.

니카라과운하의 전통적 노선은 대서양의 한 부분인 카리브해 연안의 산후안 데 니카라과(San Juan de Nicaragua)에서 산후안 강(San juan River)을 따라 니카라과 호(Lake Nicaragua) 기슭의 산 카를로스(San Carlos)에 다다른 뒤 드넓은 니카라과 호를 지나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경로였다. 드넓은 니카라과호를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산후안 강의 자연수로를 이용할 수 있고, 환경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이른바 ‘에코 루트(Ecoroute)’다, 실제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부근 강가에서 금이 발견돼 골드러시가 일어났을 때 미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길이 여기였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와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기 전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은 니카라과 루트가 주종이었다.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1846~1848)에서 이기고 캘리포니아를 편입한 것이 1847년1월이었다. 이듬해 금이 발견됐고 1849년부터 골드러시가 벌어졌다. 골드러시로 외부에서 캘리포니아에 몰려든 포티나인어스(forty-niners)는 대략 3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부가 왔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1851년 코널리어스 밴더빌트가 잽싸게 개척한 니카라과 경유 뉴욕-샌프랜시스코 루트를 택했다. 니카라과 루트는 뉴욕에서 증기선을 타고 뉴올리언즈를 거쳐 산후안 데 니카라과(그레이타운)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산후안 강을 거슬러 오른 뒤 니카라과 호를 거쳐 역마차와 말, 당나귀로 여행한 뒤 태평양 연안의 산후안 델 수르에서 다시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정이다.

한 몫을 잡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굳이 육로를 피하고 비싼 배삯을 치르며 해로를 택한 까닭은 1849~54년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 트레일이 지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나 백인 정착민들의 습격 가능성이 없지 않는 데다 식량과 말먹이를 조달하기 어려웠고 콜레라 등 질병의 위험, 알칼리성 물과 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험난한 육로에 비하면 철도가 발명되기 전에 뱃길을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 고속도로를 타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극소수는 미 동부에서 남미 대륙의 남단 마젤란해협까지 내려갔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올라오는 우회로를 택하기도 했다. 그 긴 길도 육로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HKND가 택한 코스는 산후안 강을 이용한 에코 루트를 피하고 카리브해 연안 블루필즈(Bluefields)-니카라과 호 연안 모리토(Morrito)-니카라과 호-태평양 연안 브리토(Brito) 노선이다. 산후안 강을 포함할 경우 이 강이 코스타리카와 경계를 이루는 구간이 길기 때문에 외교분쟁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기존 도시나 마을이 운하의 기종점과 중간점으로 선정될 경우 토지 수용 보상액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보상금액을 최소화하려면 가급적 인구 밀도가 낮고 도시화가 안된 무인지대가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밖에 현대 기술 및 장비의 발전으로 직선 굴착공사가 용이해졌고 비용이 절감된다는 고려도 작용했을 수 있다.

바스코 발보아가 1513년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유럽인으로서 처음 태평양을 바라본 이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하는 것은 스페인 식민자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신대륙의 식민지는 크게 뉴스페인(멕시코 및 카리브 제도)와 페루(남미) 총독령 등 둘로 나뉘었다. 남미에서 페루가 중요했던 것은 피사로의 잉카 정복이라는 역사적 이유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했던 것은 어퍼 페루(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 광산에서 남미 생산 은의 대부분이 산출됐고, 리마가 그 송출 항구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리마에 남미 스페인령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부가 설치됐다. 포토시에서 캐낸 은은 리마에서 배에 실려 파나마로 옮겨진 다음 인디오들의 어깨에 지워져 파나마 지협을 지났고, 파나마의 카리브해쪽 항구 포르토 벨로에서 다시 배에 실려 스페인의 세빌리아와 카디즈 등지로 보내졌다.

뉴스페인 총독부가 중미에 운하를 파겠다고 생각한 것은 오래 된 일이다. 당시 후보지는 파나마지협, 니카라과 호수를 이용한 루트,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북쪽의 테후안테펙지협 등 3개였다. 1830년대 새로 태어난 중미연방공화국은 니카라과 루트를 탐사하고 278㎞ 길이의 운하 계획안을 만들었다. 1849년 골드러시로부터 1914년 파나마운하 완공까지 니카라과운하 건설방안은 주로 미국에 의해 되풀이 제기됐다. 그러나 파나마운하 개발권을 갖고 있던 프랑스가 자금 부족과 건설노동자들의 질병, 난공사구간 등으로 고전하면서 4,000만 달러에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미국에 팔았다, 이때부터 니카라과운하는 물 건너간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 니카라과 호수로 알려져 있는 코시볼카(Cocibolca) 호수의 모습. 니카라과 운하가 완공되면 코시볼카 호수엔 큰 배가 오가게 된다. 사진=AP/뉴시스
지난 2012년 필자가 중미지역을 여행했을 때 니카라과 호의 북쪽연안의 항구도시 그라나다에서 배를 타고 호수 중간에 있는 오메테페 섬(Isla de Ometepe)에 간 적이 있다. 여행안내서에는 3시간이 걸린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뿐만 아니라 내가 탄 배가 5백t급 이상의 큰 배임에도 불구하고 니카라과 호수가 얼마나 크고 파도가 거친지 롤링과 피칭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호수는 카스피해와 미국과 캐나다에 결쳐 있는 오대호 정도가 아닌가 싶은데 이들 호수는 파도가 치긴 해도 풍랑이 일어 배가 롤링과 피칭까지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31,500㎢)는 니카라과 호(8,001㎢)의 4배나 넓은데 내가 가봤을 때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니카라과 호는 북단 그라나다에서 남단의 산 카를로스까지 배로 14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큰 호수인지 알 수 있다.

미국인 ‘필리버스터(Filibuster)’의 대표 격인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는 185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57명의 사병(私兵)을 모집해 니카라과로 쳐들어갔다. 워커는 한 해 전 발발한 자유당과 보수당의 내전을 틈타 자유당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한 뒤 니카라과를 정복했다. 그는 1856년부터 1857년까지 니카라과 대통령을 지내고 노예제를 지지함으로써 남북전쟁 전야의 미 남부에서 영웅이 됐다. 필리버스터는 정부와 상관없이 사적으로 외국에 쳐들어가 미국 땅 편입 목적으로 영토를 차지하려 싸우는 모험가를 말한다. 필리버스터는 화란어의 해적이라는 말에서 유래해 스페인어에서 ‘해적질’이란 뜻이 됐고, 미 의회에서 쿠바에 대한 해적질에 반대하는 연설로부터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행하는 장시간 연설을 의미하게 됐다. 워커는 중미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1860년에 온두라스군에 의해 처형됐다.

니카라과는 미국에 의해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1년 동안 간간이 점령당했다. 아우구스토 체자르 산디노(1895~1934)가 미 해병대를 상대로 싸운 것도 이 시기다. 미국이 니카라과를 점령하기 위해 보낸 해병과 해군 병력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2,350명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군사령부 휘하에 용산 주둔 20사단(朝兵團)과 나남 주둔 19사단(虎兵團) 등 2개 사단 규모의 소수 병력으로 조선 전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했던 것에 비견할 만하다. 니카라과 점령은 1898년 미-스페인전쟁 이후 1934년 미국이 대공황에 따른 군사예산 감축으로 이른바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내세워 철군을 단행할 때까지 미국이 벌였던 ‘바나나 전쟁(Banana Wars)’의 일환이었다.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은 원래 미국의 작가 오 헨리(O. Henry)가 온두라스를 가리켜 만든 말이었다. 미국의 바나나 수입회사(Cuyamel Fruit Company)가 1911년 미국 용병을 고용해 정권을 갈아치운 온두라스와 1954년 악명 높은 유나이티드 푸룻회사(United Fruit Company)의 사주로 미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쿠데타가 성공한 과테말라가 대표적 나라들이다. 그러나 바나나 전쟁은 훨씬 더 범위가 넓었다. 1898년 미서전쟁 당시 쿠바 및 푸에르토리코 침공을 시작으로 1903년 파나마 분리독립 개입, 니카라과 및 쿠바 점령, 아이티 점령(1915~1934), 도미니카공화국 점령(1916~1924), 멕시코와의 국경전쟁(1910~1919)과 베라크루스 점령(1914) 등이 주요 사례다.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Buttler) 미 해병 소장은 바나나 전쟁의 현장 지휘관으로서 최고위급 장성이었고, 미군 최고의 영예훈장(Medal of Honor)를 두 차례나 받은 사람이다. 그는 1935년 ‘전쟁은 돈벌이다(War is a Racket)’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33년 4개월 동안 현역 생활에서 나는 대기업과 월스트리트를 위한 청부업자, 공갈배, 자본가의 깡패였을 뿐이다. 1914년 미 석유자본을 위해 멕시코 탐피코를 평정했고, 내셔널 씨티뱅크를 위해 아이티와 쿠바를 안정화했다. 1902~1912년에는 브라운 브라더스 국제금융회사를 위해 니카라과를 싹쓸이했고, 1916년 미 설탕업자들을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정리했다. 1903년 미 과일회사들을 위해 온두라스를 다잡았고 1927년에는 스탠다드 오일(록펠러)의 중국사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웠다. 알 카포네는 시카고의 3개 구역에서 날뛰었지만 나는 3개 대륙에서 활동했다.”

버틀러 소장은 “전쟁은 소수 자본가그룹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이 생명을 바치고 비용을 감당하는 부정한 돈벌이‘라고 단언하고 이를 막기 위해 3가지 구체적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전쟁을 하면 불이익을 받도록 한다. 전쟁이 나면 자본가와 군수산업가들을 가장 먼저 징집해서 일선에 배치한다. 둘째, 전쟁행위는 직접 싸울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한다. 선전포고를 의회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제한적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제안이다. 셋째, 군은 방어용으로만 제한한다. 해군은 200해리 이내의 ’연안 해군(Coastal Navy)’으로 양성하고 육군은 국경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제한함으로써 ‘침략전쟁(War of Aggression)’을 봉쇄한다.

버틀러는 미국의 소소한 전쟁들이 독점기업가와 금융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벌어졌다고 강조했지만 중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미국의 군사행동은 또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 목표는 미국이 중남미를 자국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1823년 미국이 몬로 독트린을 통해 미국이 유럽 대륙세력의 중남미에 대한 침탈과 식민화를 거부했을 때 미국은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축적한 경제력과 팍스 브리타니카의 해군력에 기반한 시장개방 및 자유무역 정책의 집행자로서 카리브해 지역에서 미국을 대행했다. 따라서 18세기 미국 독립전쟁과 19세기 초 미영전쟁으로 적대적 경색관계였던 미국과 영국은 21세기까지 이어지는 ‘특수관계(the Special Relationship)’을 이 시기에 형성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고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남미를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중남미 신생 국가들에 대해 ‘맏형정책(Big Brother Policy)’을 밀고 나갔다. 1898년 미-스페인전쟁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영국 세력마저 배제하고 독점적 관할권을 행사하게 되는 분수령이 됐고, 이후 대공황 때까지 미국이 중미와 카리브해 곳곳에서 벌인 바나나전쟁의 경과에 따라 맏형정책이 ‘미 제국주의’로 진전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에서 최대 관건이 된 것은 1914년 8월15일 개통한 파나마 운하였다.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무역활동의 목줄이었을 뿐 아니라 적대적 해군력의 투사를 통제할 수 있는 급소였다. 미국은 콜롬비아로부터 파나마를 떼어내 독립시킨 다음 파나마 운하 양쪽으로 5마일(8㎞)에 이르는 지역을 파나마로부터 할양받아 ‘파나마 운하구역(Panama Canal Zone)’을 설정함으로써 영구 지배를 꾀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1916년 니카라과 정부에 3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니카라과운하 무기한 옵션을 사들임으로써 장차 대체 운하가 경쟁자로 나타날 가능성을 없앴다.

HKND그룹의 실적과 공신력을 감안할 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 이번에는 니카라과 운하가 꼭 이뤄진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여태까지 몇 차례나 팡파레를 울렸다가 결국 헛소동으로 끝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중국기업이 니카라과운하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사실이다. 설령 어떤 이유로 해서든지 성사가 안 된다 하더라도 다른 기업과 다음 기회가 있고, 중국의 자본동원력에 비추어 언젠가는 현실화될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을 사실상 독점해온 상태에서 중국이 니카라과 운하를 장악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미 해군력이 괌이나 하와이도 아닌, 중미 지역으로까지 후퇴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기업이 운하 건설에 나선 사실에 주목해야

중국 정부로서는 니카라과운하는 하나의 ‘꽃놀이 패’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언제든지 민간 기업의 프로젝트라고 연관성을 부인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뒷전에서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 니카라과운하는 중국이 미국 오바마행정부의 ‘아시아로의 중심이동(Pivot to Asia)’ 정책에 대한 대응카드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건설 주체인 HKND그룹도 자체 자금으로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투자가를 모아 자본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에 재정적 부담이 별로 없는 셈이다. 때문에 왕징 회장은 프로젝트가 잘 풀리면 제일 좋고, 자금 동원에 문제가 생기면 수익성 있는 부대사업 운영권만 챙기는 옵션도 택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미안하다고 말하고 손을 털어도 니카라과정부로서는 제재할 수단이 별로 없다.

니카라과 정부로서는 운하건설 계획은 대박이다. 우선 운하가 실제 완공된다면 건설비 400억 달러의 많은 부분이 니카라과에 풀려 경제가 활성화되고, 일부 추산에 따르면 국민 1인당 GDP가 현재 4,400달러(2012년 구매력 기준)에서 곱절로 뛸 수 있다. 또 혹시 HKND가 나가떨어지더라도 프로젝트 추진 자체로 중국의 여타 기업이나 다른 나라의 투자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큰 손해가 없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로, 모든 것이 무산되더라도 니카라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줘서 2016년 대통령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오르테가에게 큰 득이다. 프로젝트가 실패한 책임은 미국의 음모와 중국의 성의 부족으로 돌리면 그만이니 문제가 없다.

미국에게 니카라과 운하는 눈엣 가시일 뿐이다. 실현 가능성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눈을 깜박이면 슈퍼파워로서의 체면만 구기게 된다. 미국의 정보기관에서는 이미 일정한 정보 평가를 끝내고 있는 상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의 하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실제 완공될 단계에 이르는 경우 미국은 이런 조건을 감내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쿠바 미사일위기 때와 같이 강압적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자신의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훼방을 놓거나 망가뜨리는 수단은 넘치고도 남는다. 다만 지금은 묵묵히 지켜볼 뿐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조금이라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중국이 약점을 찾았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니카라과 운하는 눈엣 가시일 뿐

니카라과운하는 우리나라에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니카라과운하가 중국의 일개 기업에 의해 순조롭게 이뤄지리라 보기 힘들다면 미국에 의해 추진되기는 더욱 어렵다. 미국은 최근 중국처럼 전국적인 고속철도망을 구축하기는커녕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샌프란시스코 구간에 건설하는 것조차 재정적으로 힘겨운 상황이다. 따라서 파나마운하와 중첩되는 니카라과운하에 투자한다는 것은 논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과 대서양간 물동량이 현재 추세대로 늘어난다면 제2 운하의 건설은 경제적 타당성이 충분하다. 이 경우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이 컨소시엄을 이뤄 니카라과운하 건설에 나서는 상황이 없으란 법은 없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상당 기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중국이 한반도 통일을 저지할 경우 우리로서도 중국과의 대결을 겁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최근의 추세와 같이 중일대립의 맥락 속에서 한중접근이 가속화할 경우 한미-한중의 ‘2중동맹’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니카라과운하는 한미중 3국이 공동 추진할 수 있는 시범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될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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