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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 ‘유럽의 탄생’을 품은 천막(天幕)을 치다
아퀴나스, ‘유럽의 탄생’을 품은 천막(天幕)을 치다
  • 박이택 본지 편집기획위원, 고려대 연구교수
  • 승인 2017.12.2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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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救援)의 경제학: 아퀴나스의 <신학대전>(1)

<동서양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

유럽의 탄생과 아시아의 재흥. 이 두 단어는 지난 천년 동안 진행된 인류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과 앞으로 도래할 극적인 전환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뿐이랴. 그것은 근대 경제문명의 태동 및 전파의 신비를 드러냄으로써, 경제발전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성배들이다. 그렇다면, 이 극적인 전환을 보여줄 고전들은 없는가? 있다. 다만, 이 전환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다중적 전환이었기 때문에, 그 모두를 온전히 담고 있는 고전은 없다. 여러 권의 고전을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유럽이 잉태되는 시기 즉 첫 번째 전환을 보여주는 고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유럽의 탄생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현재 유럽은 북서유럽을 중심으로 하고, 남유럽과 동유럽과 북유럽을 외연으로 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살펴본 바 있는데, 당시 서양의 중심은 북서유럽이 아니라 지중해였으며, 로마 제국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북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지역적 재편성은 2번째 밀레니엄의 언제가 부터 진행되었다.

지중해에서 북서유럽으로의 중심의 이동이 보여주는바 번영의 역전은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우리는 10세기 이래 북서유럽에서 농업과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데, 화폐경제의 소생은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북서유럽의 농업은 농노제와 자유보유농제를 두 기축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 발전을 보여주는 화폐경제적 표현은 도농(都農)간 대류화폐로서의 은화의 주조였다. 이후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도농간 대류화폐였던 은화는 원격지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발전하였으며, 지중해 권역과의 교역도 활발해 지면서 금화도 유통되게 되었다. 화폐경제의 발전이 보여주는바 서유럽의 경제발전에 따라 유럽 교역의 중심으로 파리 남쪽에 위치한 샹파뉴 대시가 등장했다.

북서유럽에서의 농업과 공업과 상업의 두드러진 발전은 번영의 역전 그 자체일 뿐, 왜 번영의 역전이 발생하였는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번영의 역전은 중심의 이전이라는 경제지리적 현상이기 때문에, 우선 이와 같은 변화를 밑받침한 지정학적 구조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중해 중심의 유럽이 퇴조하고, 북서유럽 중심의 유럽이 부상하게 한 지정학적 구조의 변화에는 첫 번째 밀레니엄 동안에 발생한 세 가지 변화가 중요하였는데, 지중해 권역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팽창, 북서유럽으로의 게르만족의 이주, 북서유럽에서의 기독교와 로마법의 토착화가 그것이다. 지중해 권역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지중해 중심의 유럽의 퇴조를 가져왔다면, 북서유럽으로의 게르만족의 이주는 북서유럽이 광역적 통합의 세계로 발전하는 것을 저해한 장애적 요인들을 해체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북서유럽에서의 기독교와 로마법의 토착화는 그리스 로마 문명이 북서유럽에서 재흥할 수 있는 문명적 기초를 형성함과 동시에, 북서유럽과 지중해의 통합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연륜연대학이 보여주는 유럽의 장기 파동 

지중해에서 북서유럽으로의 중심의 이동이 보여주는바 번영의 역전은 지중해 중심의 유럽의 성장과 쇠퇴라는 문명의 사이클과 북서유럽 중심의 유럽의 발흥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사이클의 중첩 속에서 진행된 장기적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장기적인 문명의 리듬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없을까?

만약 지난 3천년 동안 유럽 전역의 GDP를 추계할 수 있다면, 그 지표를 이용하여 우리의 문제를 파헤쳐 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신뢰할 만한 장기 지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이럴 때에는 연륜연대학적 정보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연륜연대학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나무의 나이테 분석일 것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일 년 동안 성장한 두께를 보여준다. 천 년 동안 산 나무는 천 개의 나이테를 가지고 있을 것인데, 각 나이테는 그 해의 성장의 조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지역의 식물의 성장 조건이 지난 천 년 동안 어떤 변천을 보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일조량과 강우량이다. 양자의 적절한 조합이 최상의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천 개의 나이테를 잘 분석하면, 지난 천 년 동안의 일조량과 강우량 더 나아가서의 기온의 변천 등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나이테에 대한 연륜연대학적 분석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17세기에 간빙기가 도래했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전개된 17세기 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나이테 분석이 많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시대의 문명의 성쇠를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연륜연대학적 정보가 필요하다.

인류는 석기 시대를 넘어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의 시대를 거쳐 이제 플라스틱과 세라믹과 반도체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금속을 대체할 새로운 소재들이 많이 발견된 현대에는 금속 생산량이 문명 성쇠의 좋은 지표가 아닐지 모르지만,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의 시대에 있어서는 금속 생산량은 문명의 성쇠를 보여주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해양과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홍성민 교수는 프랑스 그르노블 조제프 푸리에 대학의 빙하 및 환경지구물리 연구소에서 빙하화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홍성민 교수는 박사과정 시기에 본인을 제1저자로 하는 두 편의 논문을 Science 지에 게재했다(S. Hong et al., ‘Greenland ice evidence of hemisphere lead pollution two millennia ago by Greek and Roman civilization’, Science 265 (1994), 1841– 3, and S. Hong et al., ‘History of ancient copper smelting pollution during Roman and medieval times recorded in Greenland ice’, Science 272 (1996), 264– 9). 이 두 편의 논문은 그린랜드 만년설에 포함된 납의 함량에 관한 것으로써, 기원전 1300전부터 기원후 1800년까지 북반구에서의 금속 생산 추세의 근사치를 보여준다. 이 논문들에 의하면 금속 생산량은 기원전 13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기원후 100년을 정점으로 하고 이후 감소하여 기원후 900년경에 최저 수준에 도달하고, 기원후 900년부터 다시 성장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그리스 로마 문명은 고대 자본주의 시기라고 표현할 만큼 발전하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기원후 100년부터는 800여년에 걸쳐 쇠퇴의 길을 걸었던 셈이다. 그리고 다시 900년경부터 경제문명의 성장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중심은 그리스 로마가 아니라 북서유럽이었다.  

13세기 북서유럽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사실 지식경제의 발전은 사회적 분업이 어느 정도 고도화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위대한 학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학자들이 아프리카의 밀림이나 사하라 사막 같은 곳에서도 있었을 것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아프리카의 밀림과 사하라 사막에는 이와 같은 학자들이 존립할 수 있는 사회적 분업체계도 고도 문명도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고도 문명 속에서 존립할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발전된 문명 속에서만 그의 연구 성과가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원후 100년부터 전개된 문명의 쇠퇴기에는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유용하였던 다양한 기술이나 지식이 소실되었다. 많은 유용한 기술과 지식이 소실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소실된 가장 잘 알려진 기술은 강화 시멘트 제조술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소실된 가장 잘 알려진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문명이 소생되면, 잃어버린 기술이나 지식이 재발견된다.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은 이와 같은 문명의 재흥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북서유럽에서 어떻게 재발견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는데, 리차드 루빈스타인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민음사, 2004)은 이 과정을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용과 관련된 논쟁의 터전이 북서유럽에 위치한 파리 대학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열광했던 학자들 중 일부는 가톨릭 신학 체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독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대한 주해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가톨릭 신학을 통합한 <신학대전>을 저술한 이유였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가톨릭 신학이 어떻게 통합되었는가가 본 글의 주제는 아니다. 본 글의 주제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유럽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이다.

<신학대전>은 ‘유럽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이 물음은 ‘유럽의 탄생’을 야기한 요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현재까지 경제사가들이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 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한 지식경제의 발전’과 ‘사적 소유권에 기반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지지하는 제도적 체계의 발전’이 유럽의 탄생에 중요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신학대전>이 유럽에 있어 지식경제와 제도적 체계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일 것이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은 ‘자연과학의 발흥’을 품은 천막이었다

근대 경제문명을 떠받치는 기술적 기초에는 자연과학이 있다. 자연과학과 신학은 공존할 수 있을까? 신학이 가정하고 있는 세계의 섭리에 대한 교리를 자연과학이 비판하는데, 신학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학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13세기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는 이와 같은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속에서 신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일까? 우선, 신학의 생존을 위해 자연과학을 이단의 영역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이렇게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대중화되어 있다면, 다른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데, 자연과학의 성취를 신학의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13세기 신학자에게 부여된 이 과업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리차드 루빈스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획기적인 아퀴나스의 연구 전반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논제는 “은총은 자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와 자연과학이라는 사고의 두 가지 영역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구별하는 한, 종교와 자연과학, 즉 창조자에 대한 사랑과 그의 창조에 대한 이해 간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다. 이성의 영역을 신학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확장하고 스스로 “자연 신학”이라고 불렀던 분야를 만들어 냄으로써, 아퀴나스는 당시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위험한 급진주의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자연적인 이성을 사용해서 증명할 수 없는 교리들은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즉 무로부터 우주의 창조, 삼위일체로서의 신의 본성,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그것들이다.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이 진리들은 신앙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창조자의 불멸성, 완전성, 선성, 지식, 그리고 다른 속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신의 존재와 같은 다른 신학적인 교리들은 관찰된 자료를 분석하고 일반화하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다. 단순히 계시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기도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이 요구하는 도덕적인 기준들과 사후 세계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에 관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 274-275면)

자연과학적 연구들도 ‘신이 요구하는 도덕적인 기준들과 사후 세계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는 것으로 위치 지움으로써,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은 ‘자연과학의 발흥’을 품은 천막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퀴나스, 파라다이스에도 좋은 제도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다

근대 경제문명은 고도로 발전된 사회적 분업을 전제하는 것으로써, 이와 같은 사회적 분업을 지탱할 적절한 제도적 체계가 발전되지 않으면, 유지 발전할 수 없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사회적 분업을 지탱할 제도적 체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아퀴나스는 교부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아퀴나스는 사회적 분업을 지탱할 제도적 체계를 원죄의 산물이 아니라 원죄가 발생하기 이전인 무죄의 상태에서도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한다. 즉 사회적 분업을 지탱할 제도적 체계는 파라다이스에서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꼭 필요한 것으로 본 것이다. <신학대전 요약> 제1부 96문 ‘무죄 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의 피조물 관리’를 보자.

“제97문: 무죄 상태 있어서의 인간의 피조물 관리

1. 무죄 상태에서 아담은 동물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비록 오늘날의 우리에게서 만큼 그 지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2. 다른 것들도 지배했다.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그것들을 이용했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3. 그러나 인간들 사이에는 성(性)·연령·육신 그리고 자유 의지에 관한 영혼에 있어서까지도 어떤 차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4. 노예 신분이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서로서로 의존 관계만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루고 살아야 했으므로 일종의 정부가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신학대전 요약> 116면)

아퀴나스는 무죄상태에서도 인간의 번식과 인류의 보존을 위해 출산이 이루어져서 사람 수가 늘어나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제도적 체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 의한 동물의 지배는 무죄 상태에서도 정당한 관계였지만, 제4항을 보면 무죄 상태에서는 노예 신분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주인과 노예라는 인간 간의 지배 관계는 원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위치 지우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무죄 상태에서도 정부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는 통치자와 피치자로 구성되는 통치 관계는 원죄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파라다이스에서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관계로 본 것이다.

아퀴나스는 정치를 인간이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동체의 평화적 질서 유지와 발전에 불가결한 것으로 보아, 원죄 이전의 파라다이스에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으며, 원죄 이후에는 신의 은총으로 부여되었던 인간의 본원적 정의 능력이 소멸하기 때문에, 인간이 선행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도적 체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모세의 구법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법을 더 완전한 법으로 상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제도적 체계에 대한 이해에 바탕한 것이었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한 지식경제의 발전’과 ‘사적 소유권에 기반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지지하는 제도적 체계의 발전’을 담아낼 수 있는 천막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근대경제에 온전히 들어맞는 사유의 체계는 아니었다. 아퀴나스가 수용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에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딛고 있었던 시대적 한계도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면을 고려하면서 아퀴나스의 경제사상의 특질을 고찰하는 것은 다음 호의 과제이다.

 

본 기사는 월간지 <이코노미21> 437호(2016년 4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 《신학 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ca)(1265-1273)은 중세의 스콜라 학파였던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표적 저서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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