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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와 볼리비아
페루와 볼리비아
  • 이병효 <오늘의 코멘터리> 발행인
  • 승인 2018.08.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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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는 역사와 문화, 자연 등 여러 면에서 환상적일 만큼 가멸찬 나라다.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방대한 제국을 세웠던 잉카문명의 중심지역이 바로 페루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1955)>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슬픈 열대>는 1930년대 브라질 내륙 오지에 머물면서 원주민 4개 부족의 생활을 관찰한 기록이다. 페루의 경우 안데스 산맥 이동의 내륙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은 전통적인 삶이 얼마만큼 온존해 있기는 하지만 안데스 고지대는 오랫동안 고도의 문명을 유지해 온 곳이고 지금은 원주민과 정복자의 문화가 병존하는 지역이다. 수도 리마가 자리 잡은 태평양 연안의 건조지대는 3,200만 명에 가까운 페루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는 곳으로 과거 서구 문명의 교두보에서 현재는 근대적 대도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지만 리마에서도 골짜기 건너편 달동네에는 빈곤과 기아, 질병에 시달리는 피곤한 삶이 이어지고 있다.

겉으로는 상당히 유럽문명에 동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페루 전체 인구에서 45%는 원주민이고 37%가 메스티소, 15%가 백인이다. 따라서 볼리비아와 함께 원주민 비율이 남미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 그래서인지 무표정하고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 뒤에는 스페인 정복자와 혼혈 메스티소에 대한 포한과 원망이 숨겨져 있는 듯이 보인다. 다른 남미 국가에서는 원주민이 사실상 거의 절멸한 상태여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원주민이 다수고, 그들의 억눌리고 착취당해온 삶의 자취를 곳곳에서 엿볼 수 있기에 느낌이 전혀 다르다. 페루는 또한 남미에서 세 번째로 넓은 나라로 남한 면적의 13배, 한반도의 6곱절에 이른다. 이 넓은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고도 3,000∼4,000m의 안데스 산지다. 예컨대 리마에서 쿠스코는 직선거리가 573㎞에 불과하지만 깊은 골짜기로 격리돼 있어 도로로는 1,100㎞가 넘고 18시간 이상 소요된다.

볼리비아의 옛 이름은 ‘알토 페루’ 즉 상(上)페루다. 바꿔 말하면 스페인 지배시대에는 두 나라가 하나였다. 볼리비아가 스페인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포토시(Potosi) 은광 때문이었다. 포토시라는 도시를 굽어보는 산은 ‘세로 리코(Cerro Ricco)’라고 불리는데 표고 800m의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은덩어리라 한때 불릴 만큼 은광석이 풍부했다. 16세기 후반 세계 은 생산량의 60%가 이 산 하나에서 채굴됐고, 이제까지 총 6만t의 은을 캐냈다고 한다. 쿠스코가 잉카의 수도였고 원주민 세력의 웅거지였다면 리마는 포토시 광산에서 캐낸 은을 스페인으로 수송하기 위한 관문으로 세워진 도시였고 식민세력의 본거지였다. 포토시에서 캐낸 은은 라마와 당나귀에 실린 채 태평양 연안까지 내려오고 다시 리마까지 올라가 수송선 편으로 파나마 시티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다시 당나귀와 원주민들의 등에 얹히어져 파나마 지협의 대서양 쪽 항구인 포르토벨로 등지로 가고 거기에서 배로 스페인 세비야 등 항구로 옮겨졌다.

그런데 포토시의 세로 리코는 엄청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약 300년 동안의 스페인 지배기간 중 모두 800만 명 이상이 이 광산에서 죽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절대 다수는 잉카시대부터 내려온 부역제도(Mita)를 악용해 보수를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던 원주민들이었다. 마을마다 15세부터 50세 사이의 남자 인구의 7분의 1은 노역을 무상 제공해야 했는데 명목상 1년에 넉 달만 일하면 됐지만 노역기간 중 음식과 세금을 위해 빚을 질 수 밖에 없었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번 광산에 끌려간 원주민들은 거의 돌아오는 일이 없었고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10년 안에 규폐증으로 예외 없이 사망했다. 굶주림과 추위, 막장의 더위와 혹사를 이기기 위해 원주민들은 코카 잎을 씹었다. 한때 스페인 지배자들은 인디오들의 노동 속도에 실망해서 원기 왕성한 흑인 노예들을 들여와 광산에 일을 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흑인들은 가혹한 조건을 이기지 못해 몇 달 안에 죽어나갔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흑인 노예들을 가족과 함께 열대 기후의 저지대로 옮겨 살게 했고 지금도 그 후예들이 융가스 지역 등에 살고 있다.

나는 볼리비아를 갈 때 칠레의 국경도시 아리카에서 육로를 통해 볼리비아 라파스(La Paz)로 넘어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라는 라파스에서 2박3일을 지내고 코로이코(Coroico)라는 조그만 마을에 갔다 올 작정이었다. 우유니 소금 사막과 포토시 광산, 이슬라 델 솔(태양의 섬)을 꼭 가고 싶었지만 남미 8개국을 한 번에 도는 여행이라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었다. 코로이코는 큰 산들과 골짜기 사이에 아늑히 들어선 마을인데 이집트 룩소르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아가씨가 꼭 가보라고 권한 곳이다. 라파스에서 고개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코로이코에 들어서니 역시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가장 위험한 도로라는 건 교통사고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는 뜻인데 이 길을 자전거로 주파할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주고 차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는 관광 패키지도 있었다.

라파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달동네’라는 별명이 있듯이 도시 전체가 무질서한 느낌을 준다. 특히 퇴근 시간의 도심지는 미니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비다 못해 거의 아수라장 같았다. 진짜 달동네는 해발 4,000m 높이의 라파스에서 400m를 더 올라가 골짜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엘 알토’라는 이름의 변두리다. 저녁에 버스를 다투는 사람들은 대부분 엘 알토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서민이다. 볼리비아에서는 시위가 일상적이다. 칠레에서 라파스로 들어가는 날에도 버스가 길이 막히는 바람에 시내로 진입할 수 없어 몇 번이나 빙빙 돌다가 두어 시간 뒤에야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위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 대한 불만이 그 뿌리다. 그들은 보통 길을 차단하고 모닥불을 피운 채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특별히 경찰이 제지하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코로이코에서 돌아와 라파스에서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를 향할 때에도 시위로 도로가 차단돼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기는, 체 게바라가 죽은 나라가 볼리비아 아니던가.

라파스에서 페루로 향하는 버스에서 볼리비아 출신으로 페루에 산다는 50대 멋쟁이 숙녀를 만났는데 “페루에 가면 도둑을 조심하라”고 했다. 일단 고맙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의아했다. 치안이 불안하고 가난한 볼리비아에서도 괜찮았는데 더 잘 사는 페루에서 무슨 일이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산이었다. 원래 직행이라는 버스가 티티카카 호숫가의 푸노라는 도시에서 몇 시간 머물 수밖에 없도록 제멋대로 바뀌었다. 큰 배낭을 버스회사에 맡겨두고 작은 배낭만 지닌 채 푸노 시내를 돌아봤다. 어느 길가에서 하프를 파는 가게를 봤다. 장난감이 아닌 풀사이즈 하프지만 콘서트용은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이런 소도시에 하프 전문점이 있다는 것이 신기로웠다. 버스 출발 두 시간 전 쯤 터미널로 돌아와 기다리느라 론리 플리트를 읽고 있었다. 옆 좌석에 올려놨던 배낭은 자리를 내주느라 발 옆에 옮겨 놨다. 그런데 한 순간 배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우선 터미널 주재 경찰을 찾았다. 터미널 내부이니 CC-TV를 보자고 요구했다. 아니나 다를까 웬 놈 둘이 카메라에 들키지 않으려고 기둥 뒤에 숨어서 노리다가 한 녀석이 살금살금 기어와 내 발 밑에서 배낭을 낚아채 달아나는 것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얼굴은 가리고 있었지만 옷차림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경관은 알고 있을 것이 뻔했다. 녀석들은 어차피 터미널을 무대로 한 상습 절도범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경관을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왜 배낭을 두 발 사이에 넣고 있지 않았냐면서 나를 탓했다. 전혀 잡으려는 시늉도 안 하는 걸 보며 경관도 그들과 한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경관과 말씨름을 더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푸노를 떠났다. 노트북과 배낭을 페루의 가난한 도둑에게 남기고 말이다. 결국 쿠스코에 와서 경찰서를 몇 군데 돌아다닌 끝에 도난 보고서를 받긴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보험회사에 클레임을 하진 않았다. 단지 귀찮아서였다.

볼리비아 비자를 얻을 때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영사관을 어렵사리 찾아갔더니 백발의 영사가 반갑게 맞으면서 비자피도 공짜로 내줬다. 아마 몬테비데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달리 비자 신청자가 거의 없고 특히 한국인은 거의 못 봤던 덕인 듯했다. 페루는 비자가 필요 없었고 쿠스코를 거쳐 리마에서 출국했다. 쿠스코는 옛날 잉카의 궁전 터에 성당을 세웠는데 잉카시대의 정교한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인상적이었다. 잉카의 건축은 최고 열두 개의 모서리의 가진 돌을 다듬어 접착제 없이 서로 맞물려 끼워 맞춘 석축으로 유명하다. 쿠스코에 왔으면 당연히 마추픽추를 가 봐야 하는 것인데 나는 건너뛰기로 했다. 그곳에 가는 최선의 방법은 잉카 트레일을 걷는 트레킹이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없어 그럴 수는 없었고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기차를 타야 했는데 예약이 필요한 데다 그 값이 백 수십 달러여서 장난이 아니었다. 듣기로는 페루 정부가 민영화 바람을 타고 맞추픽추 기차 운영권을 민간업자에게 팔아넘긴 탓이라 했다. 어쨌건 바가지를 쓰고 마추픽추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으니….

페루의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해발 2,450m의 고지에 있는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맞추픽추의 유적. 출처=나무위키
페루의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해발 2,450m의 고지에 있는 잉카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맞추픽추의 유적.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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