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 최남단 대서양 쪽에 있는 도시고, 희망봉(Cape of Hope)에서 따온 이름이다. 별명은 어머니 도시(The Mother City)인데 17세기 화란 동인도회사가 남아프리카에서 세운 최초의 도시이자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의 유일한 메트로폴리스였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공 최대의 도시인 요하네스버그는 사실 19세기 후반 황금 광맥의 발견으로 생겨난 광산도시에 불과했다. 남아공은 수도가 사실상 3개인 나라다. 대통령과 내각은 요하네스버그 북쪽 55㎞에 있는 프레토리아에 있고, 의회는 케이프타운에 있다. 또 최고법원은 블룸폰테인에 있어서 행정·입법·사법 수도가 모두 분리돼 있다. 이밖에 헌법재판소에 자리잡고 있어 수도가 네 곳에 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남단에 최초로 도달한 것은 1488년, 그러니까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방문)한 지 불과 4년 전에 포르투갈의 궁정귀족 바툴루뮤 디아스에 의해서였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인들은 후추와 계피 등 동방의 항료를 아랍 중개상들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있도록 인도로 가는 직항로를 찾고 있었고 그 이전에 서아프리카 황금해안(현재의 가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앙골라 앞바다의 풍랑이 워낙 거센데다 사막에서 물과 음식을 구할 수 없어 번번이 돌아서고는 했다. 디아스는 남하를 계속했고 마침내 아프리카 남단을 크게 돌아 동쪽으로 항행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혹심한 폭풍우에 시달려 30일간 육지를 보지 못한 채 떠돌았던 디아스는 내친 김에 인도로 가고 싶었지만 선원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돌아섰고 남단을 ‘폭풍우의 곶’이라 이름 붙였다. 보고를 받은 포르투갈 왕은 인도 가는 길을 드디어 발견했다며 그곳의 이름을 ‘희망봉’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16세기 내내 아프리카의 모든 해안은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도에 정신이 팔려 금과 노예 외에는 아프리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금은 서아프리카에서만 나왔고 노예사냥은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주로 이뤄졌다. 남아프리카는 그냥 지나치는 곳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네덜란드가 17세기 들어 포르투갈의 발자취를 그대로 밟아 아프리카와 인도, 동인도(인도네시아)로 밀려들었다. 케이프타운은 동인도로 가는 네덜란드 범선들이 중간에 기착해 휴식을 취하고 물과 야채 등을 공급받는 기지로 처음 세워졌다. 케이프타운은 희망봉에서 약 50㎞ 북쪽에 있는데 현지에 가보면 왜 희망봉이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이해가 간다. 희망봉이 있는 케이프 반도는 약 50㎞ 길이의 황량한 산지인데 땅이 비좁고 물도 풍부하지 않다. 반면 케이프타운은 남쪽 등 뒤로 테이블 마운틴이 버티고 서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산 너머 드넓은 배후지가 펼쳐져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은 사실 희망봉에서 폴스베이를 건너 동쪽으로 약 150㎞ 떨어진 아굴라스곶이다. 그럼에도 대서양과 인도양의 해류가 마주치는 곳은 희망봉 앞바다가 맞다. 희망봉도 사실은 2.5㎞ 떨어진 위치에 두 개의 곶이 있다. 남단 가장 높고 요새가 구축된 곶이 ‘케이프 포인트’고 서쪽에 야트막한 곶이 ‘희망봉(Cape of Hope)’다. 케이프 포인트에 올라가면 희망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케이프반도의 남반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얼룩말과 타조 등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 또 주차장에는 개코원숭이(바분) 가족이 음식을 찾아 십 수 마리씩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희망봉까지 가려면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야하고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투어버스를 타거나 렌트카를 빌려야 한다. 투어버스가 꽤 비싸기 때문에 혼자 갔더라도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동행을 구해 비용을 분담하면 훨씬 저렴하고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다.
케이프타운 시내와 근교에 가볼만한 곳이 많다. 첫 번째는 물론 1,086m 높이의 테이블 마운틴이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산기슭에서 내리면 무료 버스가 정류장과 케이블웨이 스테이션을 이어준다. 케이블카를 타고 10여분 올라가면 말 그대로 식탁의 평평한 테이블탑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바위로 이뤄져있고 관목 숲 사이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길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다. 체력이 받쳐주는 사람들은 테이블 마운틴을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보통 서너 시간, 아주 천천히 올라가면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테이블 마운틴 남쪽 사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텐보시 식물원이 있는데 여기야말로 꼭 가볼 만한 곳이다. 여기도 투어버스 외에는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현지 가난한 흑인들은 가보기도 어려워 보였다. ‘캐노피 브리지’라고 해서 나무 꼭대기 위로 다리를 놓아서 숲을 조망할 수 있게 한 것은 독특한 볼거리였다.
크리스텐보시 식물원 바로 남쪽에 컨스텐샤라는 포도원 구역이 있다. 이곳은 렌트카나 투어버스로 와인투어를 가는 곳인데 세계 어디나 포도를 기르는 곳은 다 마찬가지지만 기후와 경제, 문화가 어우러져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고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대서양 쪽의 포구 마을 가운데 워터프론트에서 20㎞ 정도 내려가면 후트베이라는 곳이 있는데 워터프론트만큼 번성한 곳은 아니지만 시내버스로 갈 수 있는 소박한 바닷가 마을이다. 케이프타운에서 테이블 마운틴과 함께 꼭 갈 곳이 워터프론트다. 온갖 쇼핑몰과 레스토랑이 다 모여 있어 샌프란시스코의 피셔먼스 워프보다 더 화려하다. 여기서 배를 타고 넬슨 만델라가 영어생활 27년의 대부분을 지낸 로벤 아일랜드를 갈 수 있다. 인원이 제한돼 있어 보통 예약을 해야 하고, 입장료도 꽤 비싸다. 내 경우 굳이 감옥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을 뿐 아니라 관광객을 위해 조성된 유적이라는 생각에 부두에 있는 박물관 겸 매표소만 가보고 로벤 섬은 건너뛰기로 했다.
이밖에 시내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 컴퍼니스 가든은 도심 한복판의 식물원 겸 공원인데 남아공 의회와 구 총독관저, 국립 중앙도서관, 세인트조지 대성당과 각종 기념탑과 동상들이 들어서 있고 시 광장과 중심가로 이어져 있다. 굿호프 성채는 안 가봐도 무방하지만 케이프타운대학 캠퍼스 옆 세실 로즈 기념탑은 그 조망이 좋아서 꼭 갈 만하다. 케이프타운 동쪽과 북쪽에는 이른바 타운십(흑인 밀집 거주지역)이 다수 있는데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남아공 사회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요하네스버그 근교에 인구 500만 명에 가까운 수웨투(South West Township의 앞 음절을 따서 Soweto라고 한다)가 워낙 유명해 다른 타운십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아공에는 인구 10만 이상의 타운십이 30여 개 있고 모든 대도시에는 하나 이상의 타운십이 교외에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흑인 인구를 타운십에서만 살 수 있도록 거주 제한을 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가볼 도시는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프레토리아라 할 수 있다.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제일의 관광지고, 도시 자체가 목적지다. 그러나 오하네스버그는 거리 범죄가 심각해 되도록 빨리 지나쳐야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공과 남아프리카의 교통허브(Hub) 도시로 우리나라에서 케이프타운을 가려해도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요하네스버그 길거리를 잠시 걸어보면 백인을 단 한 명도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파크 스테이션의 버스터미널이나 요하네스버그와 프레토리아를 잇는 고급 철도 ‘하우트레인’ 플랫폼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간혹 백인을 보기는 했다. 일단 미니버스 터미널이나 길거리는 100% 흑인이라 보면 된다. 나는 프레토리아와 공항에서 들어갈 때는 하우트레인을 이용했지만 나머지는 미니버스를 탔다. 파크 스테이션에서 수웨투 백패커스를 찾아가는 길에 흑인들이 이용하는 메트로레일을 타려고 했더니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던 흑인들이 “메트로를 탔다가는 가진 걸 다 뺏기고 알몸으로 내리게 된다”며 말렸다. 막상 수웨투 백패커스가 가보니 리셉션에서 일하는 아가씨는 메트로가 뭘 어떠냐고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결국 초행길임을 감안해 게스트하우스에 택시를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항에서 백패커스까지 무료 서비스라는 말이 있는 것같아 은근히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택시요금을 다 받았다. 배낭을 풀어놓고 한 시간 넘게 걸어서 헥터 피터슨 박물관과 만델라 생가, 데스몬 투투 주교 자택까지 갔다. 적어도 대낮에는 안전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만델라 하우스 주변 레스토랑에는 백인 단체관광객들이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핵터 피터슨은 1976년 수웨투 봉기때 백인 경찰의 발포로 총에 맞아 숨진 13살짜리 흑인 중학생의 이름이다. 스웨투 봉기와 헥터 피터슨의 시신을 안고 가는 사진은 전세계에 알려져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횃불이 됐다. 이튿날 아침에는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파크 스테이션으로 나와 산상의 왕국 레수투(Lesotho)로 향했다. 레수투는 남한의 3분의 1쯤 되는 영토에 인구가 200만 명을 약간 웃도는 나라인데 남아공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세계에 내륙국가는 많지만 한 국가에 완전히 둘러싸인 나라는 바티칸 시국과 산마리노 등 미소국가(마이크로스테이트) 외에 레수투와 스와질란드가 있을 뿐이다.
프레토리아에서 레수투를 가려면 요하네스버그로 가서 블룸폰테인을 거쳐 레수투로 들어가야 한다. 블룸폰테인 미니버스 터미널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막차를 타고 레수투에 입국하니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잠 잘 곳 찾기가 마땅치 않아 국경 안쪽 주유소에서 새벽까지 기다리는 고지라 그런지 꽤 추웠다. 12월이면 남반구의 여름이라 한 벌만 가져간 파커를 꺼내 입어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침에 미니버스로 수도 마세루에 들어갔는데 다시 백패커스를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구 공항이 공군기지로 바뀌어 있었는데 여 공군장교가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레수투같은 소국에 공군이라니 ‘개발에 편자’같은 느낌도 있지만 우리나라 국산 공격기 FA50을 사가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남아공의 보츠와나가 FA-50을 구매하려고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근자에는 소식이 없는 듯하다. 마세루 교외 3㎞ 떨어진 백패커스의 시설은 낡았지만 경치는 그만이었다.
이튿날 오전에는 레수투 건국의 요람인 타바 보슈라는 산채를 갔다가 오후에는 백패커스 옆 호숫가에서 열린 결혼식을 보러 갔다. 타바 보슈에 놀러온 흑인 처녀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는데 또래가 아닌 나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거듭 조르는 것을 보니 현실에 대한 불만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만만치 않은 듯 했다. 레수투는 높은 산의 왕국이라 산마리노 같이 그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그런지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우량이 충분하지 않은지 숲이 무성하지도 않았다. 남아공에 둘러싸인 또 다른 왕국 스와질란드는 상대적으로 자연이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레수투에서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수도 음바바네로 갔는데 스위스처럼 임상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며칠 뒤 모잠비크로 넘어가는 길은 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아서 범프(현지에서는 영국식으로 험프라 불렀다)를 넘을 때마다 척추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케이프타운에서 남아공 여행을 시작했다면 케이프타운 시티보울과 워터프론트, 테이블 마운틴에 이어 희망봉에 간 다음에는 서쪽으로 50㎞ 떨어진 스텔렌보시를 꼭 가야한다.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는 케이프타운이고 두 번째가 스텔렌보시, 세 번째 사이먼스 타운(케이프 반도 동쪽의 군항), 네 번째가 스웰렌담이다. 네덜란드인들이 처녀지의 너른 공간에서 이왕이면 경치 좋은 곳을 새 도시의 입지로 택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이먼스타운과 스텔렌보시는 케이프타운 사람들에게 주말 행선지로 인기 높은 곳이다. 스텔렌보시의 대학 캠퍼스와 조그만 식물원, 레스토랑과 와이너리 등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케이프타운이 테이블 마운틴 산지락에 자리 잡았다면 스텔렌보시와 스웰렌담은 모두 평원을 한참 지나 드라마틱한 산들의 기슭에 들어선 도시다. 전체적으로 경치가 아주 아름답고 유럽의 소도시처럼 넉넉한 느낌이 나는 곳들이다.
남아공은 인종차별 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흑인정부가 들어섰지만 사실상의 아파르트헤이트는 그대로 온존한 사회로 보였다. 소수의 백인들은 겉으로 정치권력을 내놓았지만 토지 등 자산소유권을 고스란히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실질적인 흑백분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1980년부터 1998년까지 토지개혁을 시행한 짐바브웨는 더 엉망이라고 비판하지만 그 나라는 무가베가 백인 땅을 빼앗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만 나눠줬기 때문이다. 남아공은 앞으로 경제민주화라는 아파르트헤이트 해체과정을 한 번 더 겪어야 한다. 모르긴 해도 남아공과 짐바브웨 땅만 제대로 경작하면 아프리카 11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남아공의 땅은 넓고 비옥하다. 강수량은 약간 모자라지만 남한보다 약간 많은 인구지만 남한 12배의 면적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땅을 흑인 소농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 농장주가 흑인 일꾼을 동원해 조방적 농업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토지개혁에 안성맞춤이다. 남아공이 적극적 개혁정책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는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