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반도 중재자나 북한의 후견 역할을 자임할 가능성 별로 없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금년 초 중국을 네 번째 방문한데 이어 24일부터 러시아를 처음 방문하고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11년 8월 방러 이후 8년 만의 일이다. ‘동방의 진주’라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리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북∙러 정상회담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시각과 평가는 엇갈리는 것 같다. 김 위원장이 “중국에 이어 러시아도 ‘지원군’으로 확보할 것”이라는 예단에서부터 “대미 협상의 지렛대 확보 목적”, 또는 “비핵화 협상의 답보 상태에서 잠시 쉬어가는 산책길”이라는 인색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미국의 변함없는 ‘일괄타결’ 해법과 북한의 ‘단계적 해결’ 입장 사이에서 버티기가 장기전을 예고하면서 비핵화 협상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김 위원장이 지난 13일 시정연설에서 금년 말까지 한시적인 유예를 선언한 만큼, ‘여유 부리기’ 차원의 외유도 가능하고, ‘뒷배 다지기’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이번 러시아행은 과연 '새로운 길'을 모색할는 것일까?
새로운 길’이란 금년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제기한 “미국이 북한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 부득불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길이다. 어법이 전례없이 완곡하다. 원치 않는 길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 새로운 길’의 구체 의미를 두고는 아직도 정론이 없다. 핵과 미사일 실험 재개로 회귀를 의미하느냐, 또는 미국 대신 중국과 손잡기를 말하나,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인 다자협상으로 가겠다는 뜻인가,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에서 양측이 나누어 가질 이익은 적지않다. 핵심에는 경제협력이 있다. 낙후된 극동 개발에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러시아와 외화부족을 해결하려는 북한에게는 협력의 공간이 있다. 북한으로서는 유엔 대북제재 완화와 단계적 비핵화 해법에 대한 지지 등 러시아 도움이 필요하다. 러시아로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비핵화 협상의 앞마당에 다시 가세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한반도 역할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러시아는 북한의 ‘새로운 길’에 대안이 될 의지도 능력도 없어
첫째는 러시아가 중국을 대신해서 북한의 후견국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중국은 금년 초 네 번째 방중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중관계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면서 ‘뒷배’ 역할을 할 것처럼 사기를 올려줬다. 그런데 북한 중앙통신이 보도한 것처럼 “조선의 믿음직한 후방으로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해 줄거라던 중국은 실제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소극적으로 입장을 바꿨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중단된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의 방북도 급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우군 확보를 위해 김정은이 러시아 방문을 결심한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러시아가 실제로 얼마만큼 후견국 역할을 할 수 있느냐다.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우선 관심이 줄었고, 무엇보다 관여할 능력이 약화되었다. 북핵문제에 대해서도 중국과 보조를 맞출 뿐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는 ‘역할 분업’에 대한 내부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동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가 이니셔티브를 갖는 대신에 한반도는 중국에게 맡기는 분업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반도 중재자로 나서거나 북한의 후견 역할을 자임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회담에서 러시아가 비핵화의 단계적 해법에 동조하고 경제제재 완화를 거론하더라도 이는 실행의지가 아닌 수사(rhetoric)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는 입장에서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여력이 없다.
러시아행은 그저 상황 타개를 탐색하는 ‘나들이 길’일 뿐
둘째는 북한이 러시아를 상대로 중국과의 사이에 등거리외교의 시동을 걸었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은 과거 중∙소 양국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경제원조를 이끌어냈던 ‘꽃놀이’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일이다. 북한이 등거리외교의 한 축으로 러시아에 접근할 만한 이권이 크지 않다. 러시아가 경제적, 국제안보적 영향력이 크지 않고, 또한 북한 편향 보다는 남북한 균형외교를 지향하는 점에서 그렇다.
우선 경제면에서 대북 영향력이 크지 않다. 2018년 북∙러 무역액은 3,406만 달러로 북한 전체 교역의 1.4%에 불과하다. 북한의 대중국 무역의존도가 94.8%로 절대적인 것과 비교된다. 군사협력도 2001년 ‘방산군수협정’을 맺었지만, 러시아의 협력 범위가 재래식 군사장비의 현대화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북협력 수준에 한계가 있다. 2012년 구소련의 채권 110억 달러의 90%를 탕감해줬던 채무변제 이외에 추가로 무상원조를 제공할 여력은 별로 없다. 특히 지난해 러시아의 방문 요청에 불응하다가 뒤늦게 나선 김 위원장의 행보는 시진핑 주석의 4월 방북이 무산되자 에둘러 추진된 ‘차선(次善)’이란 점에서 ‘행차 값’이 많이 떨어진다.
또한 러시아는 남북한에 대해 결코 편향적이지 않다.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우선 목표 아래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한 경제협력과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복원을 추구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북제재 결의로 인해 중단된 철도 및 항만 협력사업은 러시아 측에도 경제적으로 타격이다. 한국과의 협력에서 얻을 이익이 북한보다 적지 않다. 북한의 등거리외교 대상은 오히려 중국과 미국이 되어야 마땅하다.
며칠 전에 만났던 한 중국인 한반도전문가는 김 위원장 방러의 의미에 대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신(新)등거리 외교’ 출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중국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중국측 시각을 드러냈다. 북한의 러시아 경사를 우려할 중국이 아니라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셋째는 김 위원장의 러시아행이 북∙중∙러 연합전선의 시발점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북∙중∙러 3각 연합전선 구축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대미 협상의 자산으로 활용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중∙러 3국은 연합전선을 펼 수 없다. 상호 이해관계가 어긋난다. 공동협력의 진영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북∙러 간에는 동맹이 이미 파기됐고, 북∙중 간에도 ‘우호조약’은 유명무실해졌다. 중∙러 간에는 오랜 불신이 여전하다. 북∙러 관계는 일반적인 우호협력관계일 뿐이다. 그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상호 필요와 전략적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 중국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중.러 및 중.북 양자관계는 선호하지만 3각 연합전선 형성에는 소극적이다.
오히려 회담의 실패를 인민들에게 설명하는 최고지도자 연설이 희망의 불씨가 되길
중국과 러시아 모두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안에 동의를 했다. 제재 동참에 예외는 없다. 경제제재의 효과가 갈수록 커지는 형국이다. 2018년 북한의 대외무역은 최악의 수준으로 격감했다. 북∙중 교역은 전년대비 51.4%, 북∙러 교역은 56.3% 각각 감소했다. 점점 더 경제제재의 ‘벼랑 끝’에 몰리는 걸로 보인다. 우회로는 없을 것이다, 비핵화의 정문을 통과하는 길 이외에는….
지난 13일 김정은 위원장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은 대미 강경 메시지 라기 보다는 제재를 해제해 달라는 간절히 호소처럼 들린다. ‘제재 해제문제 따위에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그만큼 목이 말라 있다는 뜻이다. 실수를 인정해본 적이 없는 ‘무(無)오류의 수령론’을 허물고, 기꺼이 하노이 회담에서 빈손 귀국한 이유를 주민들에게 설명하면서 다시금 허리띠를 졸라 매자는 ‘자력갱생’의 외침. 저 대목은 과거 어느 연설보다 더 진지함이 녹아 있고, 문제 해결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높여준다는 생각이 필자만의 과욕일까?
이제 그동안 숨가빴던 한반도 정세와 비핵화 협상의 상황판을 꼼꼼히 다시 복기를 하면서 재설계를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동북아 다자협력의 플랫폼에 대해서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비핵화 이후의 동북아 질서는 다자주의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필자 소개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 객원교수
前) 중국 선양 총영사, 주중 공사
평생 중국통으로서 중국과 깊은 연(緣)을 쌓았다. 주중 대사관 공사, 주선양영사관 총영사등 중국 대륙과 홍콩의 주중 공관에서 20여년 넘게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중관계와 북∙중관계, 중국 외교안보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현재 한반도개발협력연구센터 운영위원, 강원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동아시아평화연구원 국제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