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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시카고, 광주항쟁의 생존자 차명숙씨와 함께하는 5.18 기념행사
미 시카고, 광주항쟁의 생존자 차명숙씨와 함께하는 5.18 기념행사
  • 허유진 미국 통신원
  • 승인 2019.07.3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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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8일 화요일 저녁, 미국 시카고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한국에서 오신 차명숙씨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로 <5.18 광주 항쟁의 목소리, 차명숙 선생님과 함께하는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마련되었다. 차명숙씨는 1980년 5월 민주화 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수감소에서 고문을 겪었던 광주 항쟁의 생존자이다. 이 행사는 미국의 사회봉사 단체인 하나센터가 주최하고 여성핫라인 KAN WIN, 한울종합복지관, 미중서부 호남향우회가 후원하였다.

행사장 안에 진열된 사진 전시물 : 1980년 5월, 미주 최초로 시카고 알바니 뱅크 광장에서 5.18 민주화운동 동조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카고에서는 수 백여 명의 사람들이 시위행진에 참여했다.
행사장 안에 진열된 사진 전시물 : 1980년 5월, 미주 최초로 시카고 알바니 뱅크 광장에서 5.18 민주화운동 동조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카고에서는 수 백여 명의 사람들이 시위행진에 참여했다.

5.18 광주 항쟁의 목소리, 차명숙씨는

차명숙씨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시내에서 거리 방송을 통해 광주의 끔찍한 상황을 알렸던 일명 ‘5.18의 목소리’ 역할을 했다. 또한 그녀는 방송을 통해 군인들의 폭력으로 고통 받는 시민들을 위해 더 많은 광주 시민들이 나와 함께 힘을 모아 줄 것을 방송으로 독려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고 그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는 가장 어린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시위를 하다 다친 시민들을 병원에서 돌보다가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1980년 10월 27일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심지어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던 그녀는 수감소 안에서 잦은 폭행과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2년이란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교도소 밖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작년 4월, 차명숙씨는 용기를 내었다. 수감소에서 겪었던 고문의 실상,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로 한 것이다.

시카고에 울려 퍼진 차명숙씨의 목소리

이날 시카고의 하나센터 홀에는 한국에서 찾아온 차명숙씨를 비롯하여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이날 특별 손님들이 함께 했는데 흑인 인권 운동의 선구자 Curtis Muhammad와 시카고 필리핀 노동자 운동의 중심 활동가인 Jerry Clarito씨가 자리에 참석했다.

홀에는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중 눈에 띄는 메뉴가 보였는데 바로 주먹밥이었다. 주먹밥은 5.18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음식이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양동 시장에서 만들어진 주먹밥은 양은 대야에 한가득 담겨 거리에 나와 싸우는 광주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주먹밥은 목숨 걸고 거리에 나온 광주 시민들의 배를 채워주었던 연대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 앉은 다양한 국적과 연령으로 이루어진 청중들에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단 배경과 그날의 참상을 알리는 시청각 자료가 소개되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심한 동시통역 또한 이루어졌다. 큰 화면에 띄어지는 흑백 사진들과 당시에 일어난 수많은 인명 희생을 묘사하는 사회자의 설명은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일어났던 절박하고 끔찍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5.18 광주 항쟁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함께 감상하고 있다.
5.18 광주 항쟁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함께 감상하고 있다.

영상물 관람이 끝난 뒤 차명숙씨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간담회는 하나센터의 대표 하나영씨가 사회를 맡아 질문하고 차명숙씨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회자 : 차 선생님은 광주 5.18 당시 열아홉 살 이셨어요. 열아홉 살이라면 참 어린 나이인데요. 어떻게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되셨나요?

“이곳에 앉아 계신 분들이라면 다 거기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호소했어요. 어머님 아버님들 어떻게 뜨거운 이불을 덮고 주무실 수 있어요. 제발 좀 나와주세요. 계속 간절하게 호소를 했어요.

차명숙 : 열아홉 살은 작은 나이가 아니에요. 저희 세대에서 열아홉 살이면 집에서 밥도 하고 이불도 꿰매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1980년 5월에 접하게 되었어요. 이곳에 앉아 계신 분들이라면 다 거기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군인들이 산발적으로 나와 있었고 시민들은 무서워하며 밖을 내려다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군인들이 이미 방송을 장악했다. 그들이 광주의 모든 것을 차단했다’라는 말은 유언비어라고 하지만 정말 사실이었어요. 오히려 경찰들이 시민들을 숨겼어요. 안병하 치안감 같은 경우는 시민들을 숨기고 경찰 옷을 입혀서 시민들을 외부로 내보냈죠. 그 역할로 그분은 이후에 80년에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요. 그때 그분이 자신이 다 책임질테니 부하들만은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그분은 본인의 책임을 다하셨죠. 광주 시민을 보호하려는 그런 분위기속에서 저도 확성기를 잡을 수 밖에 없었어요. 확성기를 들고 거리를 걸어 다녔죠. 사실 그대로를 알리기 위해서요. 그때 우리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나왔어요.

호소했어요. “어머님 아버님들 어떻게 뜨거운 이불을 덮고 주무실 수 있어요. 제발 좀 나와 주세요.” 계속 간절하게 호소했어요. 죽음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고요. 그 당시 저처럼 방송하는 사람들과 방송 차량은 군인들의 사격 대상이었어요. 그 이후에 들었는데 저격수가 결국 방송하는 사람들을 못 죽였대요. 너무 어려서요. 지금 그분들이 증언하고 계세요.

도청에서 대학살이 일어났어요. 도청에 갔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은 죽어 있고 저는 걸어 다니고 있었어요. 사람의 피와 살. 저는 멍하니 혼을 놓고 걸었어요. 그리고 걸어서 병원까지 갔어요. 병원에 갔는데 환자들이 쌓여 있다고 표현해야겠네요. 그분들을 눕힐 수 있는 장소가 없었어요.

그렇게 병원에 있는데 지프차가 오고요. 형사 2명이 오고요. 잠시 말할 게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어요. 순간, 내가 잡혀가는구나를 느꼈어요. 그곳을 가는데 굉장히 긴 거리에 나무가 많이 있었어요. 그게 화정동 대공분실이에요. 대공분실에 들어가면 무조건 간첩으로 잡아요. 빨리 간첩으로 몰아야 되는 거죠.

개 패듯이 팼어요. 개 패듯이. 옛날에 개를 죽일 때, 개의 목을 매달아 놓고 패면 숨이 떨어져요. 그리고 상무대에 갔을 때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렇게 엄청난 사람들이 잡혀갔구나. 상무대에 들어와서 또 맞아요. 그때 정말 많이 맞았어요. 정말 많이.. 지금 제가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요. 그때 지나가면서 곤봉으로 한 대 패고요. 많은 여성들 잡아놓고 시범 케이스로 두드려 팼습니다. 제가 전쟁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인권 같은 것이 보장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수사관들이 참 잔인하단 생각을 했었어요.

사회자 : 오랫동안 차 선생님께서 국내 이야기를 못하셨잖아요. 저희가 최근에 뉴스에 본 것처럼 이제는 선생님이 기자회견을 하시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누시길 시작했는데 왜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는지, 그리고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광주를 잊어버리고 살고 싶었고요. 그런데 저처럼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전국 그리고 전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여성들이 기록이 되지 않아요. 여성들이 나와서 말을 하지 않으면,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기록을 하겠어요.”

차명숙 : 저는 사실 16년 동안 광주를 가고 싶지 않았어요. 광주를 잊어버리고 살고 싶었고요. 그런데 저처럼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전국 그리고 전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여성들이 기록이 되지 않아요. 몇몇 나와서 이야기한 여성들만 기록되고 있어요. 5.18 책을 보시면 여성들이 거의 등장을 하지 않아요. 그러나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죠. 그 누구도 용기내어 말하지 않았어요. 저도 광주 교도소에 기록이 없었다면 저도 말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저를 간첩으로 몰기 위한 기록이었어요. 재심청구를 해서 2011년도에 무죄판결을 받아냈어요. 그리고 용기를 갖기 시작한 거죠. 그래, 내가 기자회견을 한번 해야겠다. 이렇게 해야만 덜 억울할 것 같았어요. 역사는 가짜가 되었든 진짜가 되었든 역사는 바로 잡혀야 된다는 생각. 물론 오늘 당장 바로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기자회견함으로써 다른 여성들이 용기를 갖고 그 여성들이 다시 나와 주었으면 하는 거죠. 저는 이것을 3년을 준비했어요. 작년 4월 30일 광주 시청에서 기자회견 하면서 여성들에게 나오라고 직접 말을 하진 않았지만 실은 나와 주었으면 하고 호소했던 기자회견이었어요. 여성들이 나와서 말을 하지 않으면,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세상에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기록을 하겠어요. 여성은 강해요. 여성이 건강해야 만이 여성이 똑바로 생각해야 만 미래가 있고 나라가 있어요.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여성 후배 두 명만 있으면 내 인생은 성공한 거라고, 그래서 기자회견 한 겁니다.

사회자 : 말씀하신 것처럼 선생님은 광주 사태를 겪고도 활동가로서 쭉 활동을 해오셨잖아요. 사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통해서 우리나라 민주화가 이루어졌죠.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사실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 민주화 사회 운동에서 여성들이 겪은 차별은 어떤 것들인지, 그리고 왜 여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요?

어쩔 수 없는 우리 사회구도인 것 같아요. 여자들은 돈을 벌어서 남자를 대학교까지 보내고, 여자는 나가서 노동을 해야 하고, 그리고 여성들의 노동의 대가는 평가가 되고 있지 않죠”

차명숙 :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사내, 남자 중심이었어요. 어쩔 수 없는 우리 사회구도인 것 같아요. 여자들은 돈을 벌어서 남자를 대학교까지 보내고, 나가서 노동을 해야 하고, 그리고 여성들의 노동의 대가는 평가가 되고 있지 않죠. 남자들은 여자들이 당연히 희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제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도 계속 상습 되는 사회 구도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한 거죠. 그러나 항상 여자 때문에 그렇다고 손가락질하죠. 여성이 자기 스스로가 여성을 귀하게 여겨야만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 20대와 30대가 저희 나이가 되었을 때 서로가 당당하게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위해 저는 지금 빗자루 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자 : 차 선생님이 경험하셨던 것은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잖아요. 아무리 성숙한 19살이라도 말이죠. 어른이라도 당시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경험했을 때 그때의 트라우마라는 게 있을 텐데요. 감옥생활도 하시고 고문까지 당하셨는데 그런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지금까지도 힘드신 부분이 있으시다면요?

나도 살아야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연습해야 하고 강인해져야 하고 그래야 된다고 마음에 최면을 스스로 걸었어요.”

차명숙 : 어렵죠. 서울이나 다른 지역은 광주의 5월을 겪은 동료들이 한두 명씩은 있을 거예요. 그럼 그런 둘이 만나 이야기를 하겠죠. 그렇지만 제가 사는 안동은 한 명도 없어요. 한번은 97년에 막 악을 쓰고 우는데 찔레꽃이 피어있는 거에요. 그런데 비가 오는 날 노란 송충이가 보글보글 걸어가는데 이런 곤충도 이렇게 예쁜데 하물며 내가 인간인데 나도 분명 쓸모가 있어서 안동에 보낸 것이 아닐까. 나도 살아야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연습해야 하고 강인해져야 하고 그래야 된다고 마음에 최면을 스스로 걸었어요. 그래서 안동 교도소의 장기수 분들을 뒷바라지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치유의 방법이 되었어요. “장기수 분들은 여기서 10년 20년 40년까지 사는데 나는 15년형 받고 2년 감옥에서 살았네.” 이런 생각으로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제가 치유를 받기 시작합니다. 위로를 받기 시작하죠. 그리고 90년도부터 저에 대한 이야기가 왜곡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용기를 냈어요. 아이들 데리고 광주에 가서 기자회견을 했어요. 나의 기록을 함부로 왜곡하지 말라고. 지금부터 내가 내 것을 제대로 찾겠다고. 그러면서 치유가 되지 않았나. 끊임없이 지금도 치유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한 번도 제가 마음 놓고 울어본 적이..(눈물) 그래서 한 번은 울어야 치유가 될 것 같습니다.

광주 5.18의 목소리, 차명숙씨와의 간담회 모습
광주 5.18의 목소리, 차명숙씨와의 간담회 모습

사회자 : 광주에서 기자회견하시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았다고 하셨는데요. 전 사실 처음 선생님 만났을 때 당연히 광주에서 사신다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생각이 짧았죠. 광주에서 살 수 없던 이유는 뭔지, 가족분들이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 나눠주시겠어요.

저에 대한 것은 왜곡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 인생은 두 번 다시 광주와 연결되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어요. 광주의 5월 자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16년 동안 머릿속에서 광주의 기억을 빼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차명숙 : 제가 간첩으로 지목되었다고 했었잖아요. 그 당시 저에 대한 수많은 유언비어가 있었어요. 교도소 수감 기록 중에서 ‘현 정부를 따르느니 김일성을 따르겠다’라는 모함과도 저를 연관 시킨 것이 있었어요. 굉장하죠. 그래서 제가 간첩에 소속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15 형을 받고 형정집행정지로 2년을 교도소에서 살고 광주로 돌아왔는데 광주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너는 이상한 여자아이야. 교도소 안에서도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여자애야.” “너는 광주에 있으면 안 된다.”와 같은 식으로요. 저에 대한 것은 왜곡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 인생은 두 번 다시 광주와 연결되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어요. 광주의 5월 자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고요. 16년 동안 머릿속에서 광주의 기억을 빼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90년도 제가 텔레비전에서 왜곡이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저는 끊임없이 혼자 싸우고 있어요. 그러나 말은 혼자이지만 대구도, 광주도, 서울도, 안동도 숨어있는 젊은 지지자들이 제가 말 한마디 하면 동시에 움직입니다. (미소)

사회자 : 시카고에서도 얼마 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을 했어요. 시카고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한국 사람들이 있는 곳에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했습니다. 차 선생님께서는 직접 경험하신 5.18 정신이 우리 후세대들에게 어떻게 기억이 되고 전해졌으면 하는지 저희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지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똑바로 서야 만이 힘을 얻고 든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미가 뽑은 간들간들한 실, 그것들이 여럿이 엉키면 끊어지지 않고 결국 단단한 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 실을 손으로 탁 튕겨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광주 5월의 정신이 더 단단하게 묶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차명숙 : 광주 5.18은 제게 굉장히 큰 정신적인 지주이지요. 쉽게 말하면 정부에게 우리의 권리와 우리의 주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광주 5.18 이라고 봐요. 광주의 정신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것은요. 제가 경상도에 떨어져서 살지만 광주 5.18 정신이 똑바로 서줘야 그나마 우리가 지금의 민주화를 제대로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바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시카고나 엘에이나 미국 모두 똑같은 마음이라고 봅니다. 5월을 겪었던 사람, 제가 마지막 세대에요. 제일 어린 세대였으니까요. 오히려 똑바로 서야 만이 힘을 얻고 든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미가 뽑은 간들간들한 실, 그것들이 여럿이 엉키면 결국 끊어지지 않고 단단한 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 실을 손으로 탁 튕겨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광주 5월의 정신이 더 단단하게 묶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소)

이어서 이날 행사에 참석한 흑인 인권운동가 커티스 무함마드(Curtis Muhammad)씨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차명숙씨와 같이 한때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던 운동가였다.

커티스 무함마드 : 선생님도 저처럼 고문당하신 경험이 있으신데 그걸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그리고 지금은 어떠신가요?

차명숙 : 지금은 많이 잊어버리려고 노력 하는데요. 제가 지금 아파트에 살지만 집안에서 창으로 땅이 보여야 돼요. 땅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요. 거실에서 잡니다. 방에 들어가서 잘 수가 없어요. 독방이 굉장히 좁지 않습니까. 그 독방에 갇혀있던 그런 짓눌리던 기억 때문에 방에 들어가 잘 수 없습니다. 가족들이 굉장히 불편하죠. 그러나 그건 가족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고요. 그렇게 저는 아파트에서 2층 이상 올라가서 살지 않습니다. 제 스스로가 많이 아프지만 현 역사의 한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아픔마저도 달래가면서 함께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땅에 감사해요. “아, 땅아 너 정말 고맙다.” 선생님도 아프시겠지만 육체적인 아픔과 정신적인 아픔은 제가 생명이 다 할 때까지 같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래면서 가려 합니다.

청중 : 지금 하나둘씩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 가해자 입장에 섰던 분이 증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데 가해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 그분들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계신 건지 궁금합니다.

차명숙 : 먼저 함께했던 동지들을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 당시 9월 1일에 잡혔던 동지들이 있어요. 그 두 동지가 산속에서 6월 7월 8월, 3개월을 고구마와 감자 캐먹으면서 도망 다녔다가 9월 1일에 잡힌 거예요 작년에 5.18 기념재단 차종수님이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주어서 이 두 사람들(양기욱 씨, 이 모 씨)을 만났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서로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더 빨리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5.18 기념재단, 전남도 5.18 연구소, 현대를 연구하는 이들이 더 귀를 기울여서 세월이 가기 전에 기록을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군인 사람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굉장히 오픈 되어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전화번호도 오픈 돼서 예전 군인 사람들이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 전화가 와요. 옆에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하지만 저는 몸을 사리지는 않아요.

그렇게 예전 군인들과 연락이 닿으면 기자나 다른 분들을 통해 오는 분들도 있지만 직접 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럼 저는 바로 알아요. 이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함께 술을 먹어요. 그럼 그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말해요. 자신들은 군화를 4~5일을 벗어 본 적이 없다고. (미소)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도 받아줄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위로를 받아서 양심고백을 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한번 오고 두 번 와서 양심고백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 역시도 저 차명숙의 책임이겠죠. 이번에도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거부하진 않아요. 그런데요. 그분들 만나러 가면 제가 굉장히 아파요. 잠 못 자고 저녁 되면 악쓰고. 그래도 만나야 됩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 둘 씩 양심고백하면서 그렇게 역사가 바로 잡히지 않을까. 5.18은 그렇게 단단하게 기록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기 사시는 분들 용기를 갖고 계세요. 제가 국내에 가서 자그마한 힘이지만 용기 전해 드릴게요. 한번 살아보시라고. 이상입니다. (미소)

잊지 못할 그날의 기억

청중들을 배려하기 위하였을까. 사람들 앞에서 차명숙씨는 마이크를 잡고 그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하면서도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몇몇 대목에서 차명숙씨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렇게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유연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동안 차명숙씨가 견뎌냈을 고통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차명숙씨는 단지 슬픔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를 제시했다. 다짐, 용기, 연대의 언어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광주의 5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했음을, 주먹밥 하나로 광주 시민 누구도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던 도시 광주의 인심을, 5.18 역사에서 잊힌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와 줄 것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때의 군인들이 나타나 최소 한 마디라도 양심선언을 해줄 것을, 그리고 5.18 광주 이후 그 누구보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자신이지만 이렇게 미소 지으며 단단히 나아가고 있음을. 1980년 5월 목숨 걸고 확성기를 손에 쥔 채 광주 시민들을 독려했던 차명숙씨는 39년이 흐른 지금, 이곳 미국 시카고에서 다시 한번 굳게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차명숙씨가 겪은 1980년의 5월과 지금의 5월은 그 모습이 다르지만 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광주의 목소리로써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차명숙씨의 진솔하고 생생한 이야기가 끝난 뒤, 홀 안의 사람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다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추모하는 이 곡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미국이란 나라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오늘의 이 행사를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끝으로 미국의 흑인 인권 사회 운동가 Curtis Muhammad와 필리핀 노동자 운동 활동가인 Jerry Clarito가 차명숙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국적과 연령을 불문하고 차명숙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카고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날 광주 5.18 행사는 깊은 여운을 선사하며 막을 내렸다.

미국 흑인 인권 사회 운동가 Curtis Muhammad (좌), 차명숙씨 (중간) 필리핀 노동자 운동 활동가인 Jerry Clarito (우)
미국 흑인 인권 사회 운동가 Curtis Muhammad (좌), 차명숙씨 (중간) 필리핀 노동자 운동 활동가인 Jerry Clarito (우)

이 행사를 주관한 하나 센터 (HANA Center)는?

모두의 권리를 위하는 미국 한인 봉사단체

한국어로 하나를 의미하는 하나센터 (HANA Center)는 모든 사람은 성별, 인종, 계급, 연령,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체 취지에 따라 사회에서 불평등에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을 위해 사회봉사, 지역 사회 조직, 문화, 교육을 제공하는데 힘쓰고 있다.

민주화 운동가인 윤한봉 선생이 미국 망명 당시 만든 단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현재 미국에 사는 이민자, 여성, 청소년, 유색 인종, 저소득층 가정, 노인, 성소수자(LGBTQ), 입양인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현재진행형의 5.18 광주

1980년 21일 시민들을 향한 1차 발포 당시, 차명숙씨는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대한민국 경찰 안병하 치안감, 5월의 광주를 사진에 담아 세계에 알린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 기자, 그리고 그 기자를 태워 광주에 데리고 왔던 택시 운전사 김사복씨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그분들 속에서 홀로 남겨진 생존자 차명숙씨는 그들의 아들 (안호재씨, 김승필씨)와 함께 80년 5월의 광주를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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