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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리] 북중 관계의 변화를 읽는 역설의 관전법
[천지만리] 북중 관계의 변화를 읽는 역설의 관전법
  • 신봉섭 한림대 객원교수, 前 선양 총영사
  • 승인 2019.10.15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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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지원 등 북중 관계 예전보다 많이 약화돼 있어
최근 북중 관계 정상적 관계로 복원되는 ‘해빙’…‘밀월’ 아냐
북중 관계의 작동하는 원리는 ‘전략적 이익의 균형’을 공유하는 공생관계

[이코노미21] [신봉섭 한림대 객원교수] 지난 10월 6일은 북중 수교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내 언론이 연초부터 큰 의미를 부여하며 북중 관계 밀착을 전망했던 기류에 비하면 조용히 지나갔다.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의 상호 축전 교환 이외 별도의 기념식은 없었다. 9월 25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이 주최한 건국 70주년 기념 리셉션에는 북한측에서 태형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과 리창근 당 국제부 부부장이 참석했다. 9월 30일 주한중국대사관 주최 건국 70주년 기념 리셉션에 한국측에서 문희상 국회의장과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대표 참석한 것과 비교해서 격이 높지 않아 보인다. 북한 대외문화연락위원회와 조중친선협회가 10월 6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한 수교 70주년 연회에도 마찬가지로 리진쥔(李進軍) 중국대사와 태형철 부위원장이 대표 초대되었다.

이와 관련 일부 언론은 수교 70주년 계기에 김정은 위원장의 5차 방중 가능성이 있다든지, 단둥(丹東) 소재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의 리모델링 재개관식이 양국 최고위 인사 참석 하에 열릴 거라는 추측 보도를 했지만 여지없이 빗나갔다. 항미원조기념관의 개관식을 한다면 참전 기념일인 10월 25일에 할 일이다. 북중 수교와는 무관하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참전 70주년인 내년에 개관해도 무방하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바라본 탓이다.

최근 북중 관계 훈풍(薰風)에는 지난 시기의 냉기가 서려

물론 최근 북중 관계에 ‘훈풍’(薰風)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훈풍에는 지난 시기의 냉기가 서려있다. 냉각기간 동안 쌓였던 원망과 불신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몇몇 현상에 지나친 방점을 두면 좌표를 오독(誤讀)하게 된다. 북중 관계 변화를 읽으려면 입체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그동안 북중 관계는 우여곡절과 기복이 있었지만 그래도 양측은 ‘전통적 우의(友誼)’라는 틀은 깨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왔다. 이러한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기제는 최고위급 상호교류, 전통적 우의 확인, 경제협력 및 지원, 전략적 의사소통으로 압축된다. 북중 관계의 변화는 이 4가지 기제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첫째, 최고위급 교류 측면에서 금년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 활발했다. 정상화를 넘어서 ‘밀월기’ 처럼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세 차례 방중에 이어 금년 새해 벽두에 재차 방문하면서 북중 수교 70주년 축하메시지를 공표했다. 금년 6월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최고위급 교류의 ‘완결편’이었다. 이외에도 김수길 북한군 총정치국장, 강윤석 중앙재판소장 등 고위인사의 연이은 방중과 지난 8월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방북 등 냉각됐던 북중 관계는 외관상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그런데 좀 더 정밀하게 관찰해 보면, 빈번한 왕래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미진한 구석이 있다. 다섯번의 최고지도자 회동에서 여하한 ‘공동성명’이나 ‘협정’ 체결 또는 ‘조약’의 공표가 없었다. 각자 내놓은 발표문도 양측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물론 김정일 시기에는 비공식 방문(비밀)을 선호하여 공동발표문을 낸 적이 없지만, 2005년 10월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 당시에는 ‘경제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에 조인한 바 있다. 시진핑 주석의 방북이 교착상태에 있는 미중 무역분쟁과 북미 비핵화 협상을 염두에 둔 ‘원 포인트 회동’ 성격으로 서둘러 추진된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최근 빈번한 최고위급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중 간 냉각되었던 신뢰가 온전히 회복된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6월 시 주석의 방북은 크게 4가지 측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전통적 우의 공고화,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 전략적 소통과 교류 강화,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및 발전에 관한 관심사 해결 지원이 그것이다. 매우 전략적인 고려와 강력한 관여(engagement) 의지가 투영되어 있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현주소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고 강조의 톤이 이례적으로 높은 점은 그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으로 읽힌다. 실질적인 효과는 후속 조치를 살펴야 한다. 지난 8월 평양을 방문한 왕이 외교부장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점도 북중 관계가 언론에서 평가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중국이 유엔 대북제재 해제에 소극적이고 경제 지원도 미흡하다는 북한의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교류는 전통적 우호관계 확인의 수단

둘째, 전통적 우호관계의 확인은 주로 문화 예술 교류를 그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지난해 4월 쑹타오(宋濤) 대외연락부장이 인솔하는 중국예술단이 방북하여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했고, 금년 1월에는 북한 친선예술단이 방중하여 수교 70주년을 축하했다. 공연은 ‘조중 친선은 영원하리’라는 합창으로 막을 열었다. ‘양국 인민의 우의’라는 이름으로 정서적 유대를 자극한다. 직접 관람했던 시진핑 주석은 문화예술 교류를 “중조 관계의 특색과 전통이 풍부한 중요 구성 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최고위급 교류의 전후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친선 문화예술단이 동원된다. 현실적인 이해 상충의 장벽을 외교적으로 넘기 어렵기 때문에 감성에 호소하는 문화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2015년 12월 방중했던 모란봉악단(단장: 현송월)이 돌연 공연을 취소하고 귀국했던 3년 전의 해프닝에 비하면 이제 분명 상황이 호전됐다. 센카쿠 분쟁, 사드 갈등, 미중 무역전쟁 과정에서 한껏 고조된 중국 인민의 신(新)민족주의 정서가 북중 간 ‘전통적 우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인 것이다. 금년 10월과 11월에는 베이징과 평양에서 처음으로 북중 국제영화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문화예술단 교류는 과거부터 북중 관계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2010년 북한 피바다가극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무려 2개월 동안 ‘홍루몽(紅樓夢)’ 순회공연을 했다. 당시 198명의 피바다가극단원이 참여한 가극 ‘홍루몽’의 전국 순회공연은 북중 우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2009년 방북한 중국예술단의 ‘홍루몽’ 순회공연은 북한 지방간부들의 반발로 무산된 바도 있다. 이제 다시 10년이 지나서 수교 70주년에 문화교류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지형의 변화는 ‘조중 우의’라는 상징 조작의 필요성을 더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북중 문화 협력의 확장성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도 역시 주목해야 한다.

2018년 6월 19일 북경에서 열린 3차 북중정상회담 모습. 사진=Jtbc 화면캡처
2018년 6월 19일 북경에서 열린 3차 북중정상회담 모습. 사진=Jtbc 화면캡처

‘중조 우호 송유관’은 대북 영향력의 지탱 수단

셋째, 경제협력 및 지원 면에서의 북중 관계는 예전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대부분의 교역이 유엔 안보리 제재와 연동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제협력은 한계가 있다. 제재 결의에 동참했던 중국으로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사용할 수 있는 대북 카드는 인도적 물자에 해당되는 비료와 식량의 지원, 관광객 방북 허용, 항공노선 증편 등에 불과하다. 또한 경제교류 면에서도 금년 상반기 북중 교역이 전년 동기에 비해 15.3% 늘어나면서 상승곡선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지난해 북중 교역액은 전년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4.2억 달러로 최저점을 찍었다. 이미 절반 이하로 축소된 무역규모에서 15.3%가 증가한다고 해도 상반기 무역총액은 12억 5천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만큼 UN 경제제재의 여파가 여전히 크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경제 지원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은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을 통크게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3억 2000만 달러의 무상원조가 제공됐다.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은 보상금이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또한 1976년 완공된 ‘중조 우호 송유관’도 ‘전통적 우의’를 지탱해 주는 대표적인 경제지원 수단이다.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중국도 1992년 1월 북한에 경화 결재 적용을 통보했지만, 압록강 하저(河底)를 관통하는 이 송유관을 통한 무상 원유공급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과거 우호시기에는 100만~150만톤의 원유가 제공된 걸로 알려져 있지만, 1996년 이후에는 매년 50여만 톤이 공급되고 있다.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을 ‘고난의 행군’으로 극복하고 체제 붕괴 위기를 넘겼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의 원유공급이 기본 원동력이 되었다.

북한의 경제원조 요청을 받은 중국은 1996년 북한과 ‘경제기술합작협정’, ‘상품차관협정’, ‘경제군사원조협정’ 등을 맺고 본격적인 경제 지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제2차 북핵위기와 6차에 걸친 핵실험 강행을 거치면서 경제협력은 단절과 재개의 반복과 함께 활력을 잃었다. 2010년 이후 나선경제특구와 황금평 개발계획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던 북한의 경제개방 분위기도 경협을 주도했던 장성택의 처형(2013.12)으로 차갑게 식어버렸다.

‘전략적 소통’ 강조는 소통의 부재와 의구심을 반증

넷째, ‘전략적 소통’은 최고위급 교류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용어다. 양국 간 정치 안보 현안에 대해 긴밀하게 입장 조율을 하자는 얘기다. 그런데 자꾸 소통을 강조한다는 것은 바꿔 해석하면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번 면전에서는 원칙적인 약속을 하지만 뒤돌아 서면 전략적 이해가 상충되는 상황에서 현안을 사전 통보하고 입장을 조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구심이 생기고 불신이 쌓인다.

김일성 생전에는 북중 사이에 ‘통보제도’가 있었다. ‘전략적 소통’을 실행하던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중 수교 여파와 김일성 사망에 따른 8년간 불통시기를 거치면서 ‘통보제도’는 사문화 되었다. 2000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의 첫 방중 시 중국의 강력한 요구로 ‘통보제도’ 부활에 동의했지만, 깊어진 불신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북한의 계속되는 핵실험을 중국은 직전에야 일방적인 통보를 받거나 혹은 ‘패싱’을 당하곤 했다. 2010년 김정일 방중 시 후진타오 주석과 ‘전략적 소통’ 기제에 재차 합의를 했고, 이에 의거하여 2011-2012간 당 대 당 전략대화를 베이징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했지만, 2013년 김계관 제1부상과 장예쑤이(張業遂) 부부장 간 외교부 실무급 전략대화로 격하된 이후 그나마 중단된 바 있다. 왜 그렇게 됐나? 물론 북한의 3차 핵실험 강행(2013.2)이 결정적이다. 대표적 친중파인 장성택의 처형도 상호 불신을 가중시켰다. 급기야 2014년 북중 수교 65주년 기념행사는 취소되었다.

그런데 북중 관계는 냉각되고 소원해지더라도 파탄까지 가지는 않는다. 서로 공유하고 있는 전략적,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 위원장의 수차례 회동에서도 전략적 의사소통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왕이 외교부장과 리용호 외무상의 평양 회담에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긴밀한 소통”을 이어가기로 합의하며 지역내 평화 수호를 위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역대 북중 수교 10주년차는 관계 변화의 분수령

이상의 네 가지 관점에서 볼 때, 최근 북중 관계는 지난 몇 년간 냉랭했던 감정을 털고 정상적인 관계로 복원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해빙’이지 ‘밀월’은 아니다. ‘혈맹관계의 부활’을 운운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다. ‘전통적 우의’를 유독 강조하는 점은 역설적으로 전통적 우호관계 회복에도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과거 북중 관계 변화에서 역대 수교 10주년차는 큰 흐름이 바뀌는 ‘분수령’이 되어 왔다. ‘분수령’은 오르막의 끝이자 내리막의 시작이다. 1999년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거의 파탄이 났던 북중 관계는 전면 회복되었다.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이 10월5일 평양에 도착, 백남순 외무상과 회담을 가졌으며, 김정일 총비서도 50주년 축하 메시지를 중국에 전달했다. 메시지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양국의 우정은 지속 발전하고 있다”는 수준의 밋밋한 내용이었다. 그동안 많이 섭섭했다는 뜻이다. 2009년 수교 60주년도 북한 핵실험(2006.10)으로 냉각됐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로 활용되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새해 첫날부터 축전을 교환하며 '북-중 우호의 해' 지정을 알렸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2009년 10월5일~10월7일까지 방북하여 굳건한 협력관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전통적인 우의’를 강조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예전만 못하다는 의미다.

일부에서는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북중 군사대표단 교류를 부각시켜 ‘군사동맹’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북중 간에는 군사동맹이 갖춰야 할 요소가 미비하다. 연합 군사훈련이 없고 주둔군이나 군사기지가 존재하지 않으며, 첨단무기 제공도 없다. 혹자는 1961년 체결된 ‘조중 우호협력 조약’의 제2항을 ‘자동개입 조항’이라며 ‘군사동맹’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타당한 논리일까? 자동개입 조항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조약 제2항은 일방이 제3국으로부터 먼저 침략을 받을 경우에 지원할 의무가 있다는 규정이지, 선제 공격 또는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지지하고 돕는다는 개념은 아니다. 또한 중국은 1980년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폐기한 이후 여하한 국가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비동맹(不結盟) 원칙’을 외교방침으로 삼고 있다. 1982년 12차 당대회 정치보고 및 제5기 5중전회에서 헌법 수정을 통해 ‘독립 자주의 대외정책’과 ‘비동맹 원칙’을 공식화한 바 있다. 이에 중국학자들은 북중동맹이 사문화 되었다고 간주하며, 그 시점을 한중 수교 이후라고 평가한다. 김정일도 방북(2000년 10월)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중러와의 군사동맹 효력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조중우호조약’의 정체성은 현재도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중국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에 대응 및 대북 영향력 유지를 위해,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탈피와 체제 유지, 경제적 지원 획득을 위해 각기 ‘조약’을 지속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금이 간 동맹’의 신뢰를 돌이키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북중 관계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는 결국 ‘전략적 이익의 균형’을 공유하는 공생관계에 다름 아니다. 중국은 북한에 대해 ‘특수한 관계 하의 정상적 국가관계’를 지향한다.

‘전통적 우의’로 포장된 불편한 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그렇다면 사문화된 ‘조중 조약’을 왜 살려두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양측 모두 현재로서 굳이 파기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의 ‘지분’을 지키면서도 북한의 돌출행동을 제어하고 나아가 북한이 미국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미연 방지하는 ‘관리 기제’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더더욱 동맹조약을 파기 이유가 없다. 한.미.일에 대응하기 위한 ‘대적(對敵) 균형’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중국의 ‘전략적 관리’ 의도와 북한의 대중국 ‘결박’(tethering) 의도는 상호 이해가 충돌한다. 역설적이게도 중국에게는 북한의 돌출행동에 대한 의구심이 북중 간 ‘전통적 우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다. 반면 북한은 이러한 중국의 딜레마를 경제 지원 획득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 우의’로 포장된 북중관계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냉철한 직시와 객관적인 관전법이 꼭 필요하다.

전체적인 좌표로 볼 때 북중 관계의 변화는 언제라도 중간 수준의 이익 균형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큰 틀에서의 북중 관계는 나빠도 파탄 수준까지 악화되지 않는 것처럼, 좋아져도 동맹시대로 복귀하지 않는다. ‘순치(脣齒)’는 레토릭(rhetoric, 修辭)이고, ‘전통적 우의’ 강조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는 뜻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엄연한 현실의 국제정치는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니다. 북중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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