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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로 떠나는 역사여행...세계문화유산 '한국 고인돌'
‘고인돌’로 떠나는 역사여행...세계문화유산 '한국 고인돌'
  • 장한규 기획위원
  • 승인 2023.08.02 16: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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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3만여 기, 북한에 1만여 기 분포해
고창·화순·강화 유적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고인돌로 나눠져

[이코노미21 장한규] 고인돌은 밑에 돌을 받쳐 고인 덩이돌이라는 뜻으로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선사시대 거석문화를 말한다. 거석문화는 고인돌 이외에도 하나의 돌을 세워 놓은 선돌, 선돌을 한 줄 또는 여러 줄로 배열한 열석(프랑스 카르나크 열석 등), 선돌을 원형으로 둥글게 배열한 환상열석(영국의 스톤헨지 등), 사람의 모습을 한 거대 석상(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 등) 등이 있다.

다양한 거석문화 중에서 고인돌은 한반도에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이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남한에 3만여 기(그중 전라도에 2만여 기가 집중되어 있음)와 북한에 1만여 기(평양 인근에만 1만 4천 기 정도 있다고도 함) 합해서 4만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7~8만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한반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한반도를 고인돌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고인돌이 한반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 다양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왜 한반도에만 유독 고인돌이 많은 걸까? 왜 만들었고 언제 만들었을까? 들판에 널려 있는 바위들과 고인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고대인들은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달하는 바위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한반도 지역 고인돌의 가치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0년 12월2일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남한 지역 3만여 기의 다양한 고인돌 유적 중에서도 이 세 지역을 한정적으로 등록한 이유를 유네스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 지역 모두에 수백 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 지역에 분포한 다양한 형태와 유형의 고인돌을 통해 거석문화 발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고인돌의 축조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채석장의 존재는 한국 고인돌의 기원과 성격을 비롯해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유산의 완전성에도 기여한다. 고창·화순·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은 대부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다. 거대한 규모의 석조 유적이기 때문에 변형이 쉽지 않아 장기 보존이 가능한 측면도 있다.”

고인돌은 보통 거대한 덮개돌과 이를 지탱하는 받침돌, 그리고 무덤방과 뚜껑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구성요소의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 고인돌, 바둑판식 고인돌, 개석식 고인돌로 나눌 수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네 개의 판석으로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아 마치 탁자처럼 생겼고 무덤방은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고인돌이며, 무덤방이 지상에 있어 도굴 등의 이유로 유물은 거의 발굴되지 않는 편이다.

탁자식 고인돌(강화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강화 부근리)

바둑판식 고인돌은 구덩이를 파서 지하에 납작한 돌이나 깬돌로 무덤방을 만들어서 뚜껑돌로 덮은 다음 지상에 4~8개 정도 받침돌을 놓은 후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덮어 놓아 마치 다리 달린 바둑판처럼 생겼다. 받침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데 커다란 바윗돌 아래 받침돌이 있고 돌들을 가공한 흔적이 있어 고인돌 유적임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둑판식 고인돌(고창)
바둑판식 고인돌(고창)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어 뚜껑돌을 덮은 다음 받침돌 없이 바로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 고인돌은 커다란 덮개돌만 지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들판에 널려 있는 커다란 바위들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덮개돌을 다듬은 흔적이 있다거나 주변에 강가나 평야 지대 등으로 생활하기 좋은 곳이거나 그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어 조망이 좋은 곳들에 있는 바위들이 고인돌일 가능성이 있지만 여전히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석식 고인돌은 대규모의 댐이나 도로, 주택단지 등을 건설하기 전에 해당 지역의 유적과 유물이 파괴될 처지에 있어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질 때(이를 구제발굴이라고 함)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개석식 고인돌(고창)-축소
개석식 고인돌(고창)

고인돌의 덮개돌은 작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무게가 수십 톤에서 수백 톤에 달하는 것들이고 고창이나 화순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 덮개돌의 무게가 100톤 이상인 것도 많다. 사람이 인력으로 운반할 수 있는 무게가 1인당 100㎏ 정도라고 하는데 200톤 정도의 돌을 운반하려면 2천 명 정도의 사람이 필요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왜 수천 명의 대규모 사람들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만들었을까? 한반도 지역은 산성 토양이라 유기물이 쉽게 부식되므로 수천 년 된 오래된 사람 뼈가 발굴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고인돌 유적의 정체를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1962년 충북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 고인돌 유적 발굴 시 처음으로 사람 뼈가 발굴되어 고인돌이 사람 무덤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대구·춘천·진주 등의 다른 지역의 고인돌에서도 사람 뼈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사람 뼈 중에는 여자나 아이들의 사람 뼈도 있어 고인돌이 큰 세력을 가진 부족장의 무덤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고인돌은 제사를 위한 제단이나 묘역을 상징하는 묘표석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고인돌,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이유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수천 명을 한꺼번에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수렵 채집을 주로 하던 구석기시대나 수렵 채집과 농경을 병행하던 신석시시대에는 이 정도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을을 만들어서 농경을 시작한 청동기시대에 고인돌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인돌과 주변 유적지와 유물들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 등으로 조사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3000년 이전인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고인돌 무덤방과 그 주변 그리고 인근 주거지 등에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청동제품으로는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청동창,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라고 하더라도 청동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실용 목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고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제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토기제품으로는 붉은간토기와 미송리형 토기, 가지문토기 등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던 토기가 출토되었다. 실생활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은 석기제품으로 간돌검과 간돌화살촉 등의 무기류, 반원형 석도 등 농기구류, 가락바퀴와 그물추 등 생활용구류로 종류가 다양하다. 대부분의 석기류가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던 것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지만 간돌검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새로 제작된 것이다. 이밖에도 매장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유물로 곡옥, 관옥, 환옥 등의 다양한 옥제품도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은 1000년간 계속 만들어지다가 기원전 200년 정도 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철기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대규모 인력 동원이 농업 생산에 많은 어려움을 초래하는 등 비능률적인 점이 많아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돌은 역사적으로는 어떤 시대에 만들어졌을까?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 지역과 중국 랴오닝성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인돌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도 고조선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의 활동 시기와 고인돌의 청동기 유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고인돌은 고조선 시기에 고조선 영토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인돌이 대량으로 분포되어 있는 남한 지역의 경우 역사적으로 고인돌이 만들어진 청동기시대가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시대 이전 시기에 해당하므로 이 지역에 어떤 국가들이 존재했는지, 고조선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고인돌은 남한 지역에 3만여 기가 있고 그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에 2만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전국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밀집도와 보존상태가 좋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로 여행을 떠나보자.

고창 고인돌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 1.8㎞ 동서 방향으로 447기의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 고인돌이 세계에서 가장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총 6개 코스로 나누어서 관리하고 있는데 모로모로 탐방열차를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탐방열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1코스부터 6코스까지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의 삶을 음미하면서 사색해 보는 것도 좋다. 고인돌 유적지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유적지 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2005년까지 근처로 이주하여 새롭게 고인돌공원이 조성되었고 고인돌박물관도 2008년에 개관하였다. 고인돌 유적을 사랑하여 정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1코스에 가면 군장 고인돌이라는 탁자식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에는 고창군장의 딸과 강화군장 아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로 사랑했지만 고창군장의 딸이 아버지에게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살하자 고창군장은 강화도에 있는 돌을 가져다 받침돌을 세우고 고창에 있는 덮개돌을 얹어 고인돌을 완성함으로써 두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한다. 받침돌은 강화도 고인돌의 모양을 닮았고, 덮개돌은 고창의 커다란 바둑판식 고인돌을 닮아서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고창 군장고인돌
고창 군장고인돌

화순 고인돌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 일대 5㎞에 596기가 분포(유네스코는 효산리 158기, 대신리 129기가 있다고 함. 나머지 309기는 고인돌로 추정되고 있음)하고 있다. 화순 고인돌은 경사진 언덕 위에 있고 비교적 최근인 1995년 12월 목포대학교 이영문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고인돌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인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화순 고인돌군
화순 고인돌군

그리고 덮개돌을 캐던 채석장도 여러 곳 잘 보전되어 있는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감태바위 채석장은 도로에서도 가까워서 쉽게 가볼 수 있다. 효산리와 대신리를 잇는 도로 주변으로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걸어서 다 돌아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차로 이동하면서 쉬엄쉬엄 다양한 고인돌들을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다만 넓은 부지에 있는 다양한 고인돌들을 살펴보는데 상세한 설명이 있는 안내판이 많이 없는 것이 아쉽다. 화순 고인돌에도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도로 옆에서 바로 만날 수 있는 핑매바위 고인돌에도 전설이 있다. 핑매란 돌팔매의 사투리인데 마고할미가 바로 근처에 있는 화순 운주사에서 천불천탑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커다란 돌을 치마폭에 싸서 가다가 천불천탑이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여기에 돌팔매처럼 던져서 핑매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화순 핑매바위 고인돌
화순 핑매바위 고인돌

강화 고인돌은 인천시 강화도 북쪽 고려산 일대의 부근리·삼거리·고천리·오상리 등에 160여기가 흩어져서 분포하고 있으며 이중 7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 고인돌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강화역사박물관 앞 잔디밭에 있는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이다. 강화도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가까우므로 고인돌을 보러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고창이나 화순처럼 밀집해서 분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발품을 팔아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을 보고 나서 시간이 되면 박물관 옆에 있는 다른 부근리 고인돌도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고천리나 삼거리 고인돌도 볼 수 있지만 오상리 고인돌도 가보면 좋겠다. 오상리 고인돌들은 발굴 조사를 마치고 12기가 정비복원이 잘 되어 있어 탁자식 고인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사진 7)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1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1

고인돌은 선사시대인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유적과 유물이므로 문헌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집대성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면 좋겠다. 그리고 남북 공동연구를 활성화하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남북한 지역에 있는 다양한 고인돌들이 추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다면 좋겠다. 더 나아가 발굴된 유적과 유물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더욱 심도 깊게 탐구하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K컬처의 스토리텔링을 창조해내면 좋겠다. [이코노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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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2023-08-02 19:50:36
고인돌을 통한 역사 여행 재밌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