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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뛴다! 무아지경을 향하여
[문화] 뛴다! 무아지경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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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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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뒤편 육상보조경기장에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초겨울 바람에 몸서리를 치던 태양이 종종걸음을 치며 퇴근을 서두른다.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오는 테헤란밸리 빌딩이 그나마 을씨년스런 경기장 풍경에 훈기를 불어넣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무렵이다.
하늘색과 남색 운동복을 입은 중년 남자 2명이 보폭을 맞추며 트랙을 돌고 있다.
한바퀴, 두바퀴, 세바퀴 400m 트랙을 25바퀴나 돌고나서야 두사람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친다.
배움닷컴 임춘수(37) 사장과 TBD코퍼레이션 유문선(40) 사장은 그제서야 명함을 내민다.

담배 끊을 필요 없어요 임 사장이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지난 4월께였다.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에는 오후만 되면 물 빠진 낙지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오면서 만사가 귀찮아졌다.
최고경영자 자리가 신경쓸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줄담배를 피우게 되고 몸은 더욱 축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담배를 끊어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담배에 대한 고민도 싹 사라졌다.
몸이 딴 사람처럼 좋아졌기 때문이다.
사실 임 사장은 달리기에는 ‘젬병’이었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체력검정’을 할 때도 1000km 달리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라톤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5km를 뛰고 나서는 일주일 동안 끙끙 앓아야 했다.
하지만 두어달 전 10km를 완주하고 나서 달리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6, 7km 지점에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8km를 가까스로 넘으니 환각상태 같은 묘한 희열감이 밀려들었다.
10km를 뛰고 나서 그는 트랙에 벌렁 누웠다.
“아 성취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달리는 기쁨이란 이런 거구나.” 그는 이제 10km를 달리는 것쯤은 예삿일로 여긴다.
최근엔 한 언론사에서 주최한 단축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직원도 그의 마라톤 사랑에 동참했다.
내년에는 하프마라톤(20km)에 도전한다는 게 그의 야심찬 포부다.
사실 그는 아주 우연한 계기를 통해 마라톤에 접하게 됐다.
지난 4월 테헤란밸리의 IT 사장단 친목모임에서 갑작스럽게 마라톤을 하자는 얘기가 오간 것이다.
건강 포털에 관심이 많은 대웅제약 윤재승 사장이 첫 제안자였다.
황영조 선수를 알고 있으니 가끔 ‘사부’로 모셔올 수도 있다고 했다.
처음엔 회원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다.
체력 관리엔 달리기가 그만이라는 찬성론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운동 중에 하필이면 재미없는 마라톤이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유문선 사장, 인성정보 원종윤 사장, 씨앤엠테크놀로지 김무엽 사장 등 몇몇 달리기 마니아들이 바람을 잡기 시작하면서 친목모임은 ‘베이스캠프 러닝클럽’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마라톤 모임으로 바뀌었다.
황영조 선수 나와 코치해줘 베이스캠프 러닝클럽 회원 28명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1시간30분 정도 마라톤 연습에 몰두한다.
바쁜 일정상 물론 모든 CEO들이 참석하는 것은 아니다.
힘에 부쳐 중도 탈락한 회원도 나타났다.
많게는 15명도 참석하지만 출석률이 높은 열성 회원은 5~6명 안팎이다.
황영조 선수가 정성껏 코치를 해주면서 초보자들도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보폭을 짧게 해라, 발뒤꿈치부터 먼저 닿게 하라, 무릎이 스치듯 일자로 딱붙여 가라, 팔꿈치로 치듯이 가라, 호흡을 맞춰라 등등 자세교정이 이루어지면서 달리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베이스캠프 러닝클럽 회원들은 한달에 한번 정도 마라톤을 마치고 간단한 회식을 한다.
자연스럽게 친목을 다져가는 것이다.
씨앤엠테크놀로지의 김무엽(37) 대표는 마라톤 모임에 참석하기 전부터 달리기엔 일가견이 있었다.
2년 전부터 마라톤을 시작했으니 회원들 가운데는 비교적 고수축에 드는 셈이다.
올해 들어서만 마라톤 대회에 4번이나 참석했을 정도다.
최근 하프마라톤 완주를 잇따라 두번이나 성공하면서 기세가 올라 있다.
그는 내년 봄께 풀코스에 도전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마라톤 모임이 없는 날에도 수영이나 헬스를 하면서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마라톤을 하는 시간이 그는 즐겁다.
유일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제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직원도, 업무제휴를 하자며 전화를 거는 사람도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휴대전화도 이때만큼은 꺼놓는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뛰다보면 얽혀 있는 회사문제도 자연스럽게 해답이 떠오른다.
함께 뛰는 동료 CEO들과 스치듯 얘기하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뛴다는 것은 아주 원초적 행동이지요. 그런데 그게 즐거워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얘기해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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