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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아시아는 잠을 깨야 한다.
[포커스] 아시아는 잠을 깨야 한다.
  • 박윤정(아이칸 DNSO위원)
  • 승인 2000.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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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이버 문명을 향하여… 국제도메인관리기구 ‘아이칸’ 회의 참관기
얼마 전 미국 잡지 <인포월드>에 “국제도메인관리기구(ICANN·아이칸)가 중요한 인터넷 정책을 결정하는 데도 세계는 지켜보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머릿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아이칸이 왜 중요한지, 왜 아이칸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일반인은 물론 인터넷 업계 관계자들에게 이해시키려 할 때마다 겪던 어려움이 떠올랐다.
단일분쟁해결정책 결정 선진국에만 유리 아이칸은 인터넷 도메인 주소,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와 그 프로토콜을 관장하는 국제적인 비영리 민간기구다.
지난 98년 11월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자는 뜻에서, 미국 상무부 주도로 설립됐다.
지난해 3월 싱가포르 회의를 시작으로, 베를린(99년 5월) 산티아고(99년 8월) 로스앤젤레스(99년 11월) 카이로(2000년 3월)를 거쳐 지난 13~17일 일본 요코하마 회의까지 이르렀다.
IMF 때 한 한국인이 ‘엑손’의 도메인 이름을 선점해 거액의 외화를 벌어들였다는 뉴스 때문인지, 한국은 ‘사이버 스쿼팅’(도메인 사재기)이 유난히 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상당수 국제 도메인 분쟁에 많은 한국인들이 관련되면서 그것이 소문만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한국은 사이버 스쿼팅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불거질수록 국제 도메인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요코하마 회의 전까지 아이칸 회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도메인 분쟁 해결에 신속성의 원칙을 도입한 ‘단일분쟁해결정책’이 채택된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바이오필드’(Biofield)라는 도메인을 선점한 한국인을 상대로 미국의 바이오필드라는 회사가 소송을 내려면, 예전엔 재판절차가 무척 복잡했다.
소송을 한국 법원에 내야할지, 미국 법원에 내야할지를 둘러싼 재판관할권 논란은 물론이고, 재판 지연에 따른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45일 안에 신속하게 도메인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단일분쟁해결정책으로 인해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등록한 도메인이, 그것이 대기업의 유명 상표라는 이유로, 또는 기존 상표와 혼동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하나하나씩 대기업에게 넘어가고 있다.
단일분쟁해결정책이 시행된 이래 벌써 1천여건의 분쟁이 해결됐거나 해결되고 있다.
자신이 쓰고 있는 도메인이 미국 또는 유럽 회사의 상표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도메인을 넘겨줘야 한다면, 과연 이런 정책(‘법’이 아니라 ‘정책’이다)이 공정한 것일까. 단일분쟁해결정책은 지난해 6월 아이칸 산하 도메인지원기구(DNSO) 안에 워킹그룹A가 구성되면서 ‘자발적인 참여회원들의 합의’에 따라 탄생했다.
즉 어느 누구라도 토론에 참여해 의견을 펼 수 있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런 자발적 참여는 ‘권장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임의 자발적 참여자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에 소속한 변호사였다.
그들의 합의에 따라 태어난 정책이니, 그 정책의 수혜자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이런 중대한 논의가 지구 차원에서 전개될 때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들은 중요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말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칸은 인터넷 역사에서 ‘역사적인 실험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책은 지금까지 대개 ‘위에서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아이칸에서는 ‘밑에서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
지구촌 인터넷 이용자와 관련된 정책을 발의하고 결정하는 것도 ‘합의’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구현된다.
이 점이 아이칸을 설명할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정부’가 아니라 ‘시민’(인터넷 사용자)이 정책을 정하다니. 이런 아이칸의 틀이 한국인의 눈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밑에서 올라가는’ 정책결정 방식 이번 요코하마 회의에서 열린 최상위국가도메인(ccTLD, Country Code Top Level Domain) 회의부터 들여다보자. 최상위국가도메인 회의는 각 나라의 국가주소 관리책임자들의 모임이다.
국가주소 관리책임이라고 하면, 일반인은 당연히 정부의 몫으로 생각하는데, 이런 경직된 사고야말로 아이칸의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민간 참여의 문화는 인터넷 탄생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인터넷은 미국의 학교와 연구소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당시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ANA)에 의해 인터넷 국가주소가 배분될 때만 해도 인터넷의 영향력은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좀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몇몇 교수나 엔지니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쯤으로 받아들여졌고, 각 나라 정부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95년을 기점으로 인터넷이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인터넷의 통제와 관리를 둘러싸고 민간과 정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국경 없는 사이버 시대를 맞아 확실한 패권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30여년 넘게 이해당사자들의 합의에 바탕을 두어온 민간 부문의 관례 사이에서 마찰음이 터져나온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시점인 셈이다.
이번 요코하마 회의에서는 아이칸 출범 이후 진행돼온 최상위국가도메인과 아이칸 사이의 계약조건에 대한 마지막 조율이 진행됐다.
그 열쇠는 주로 정부관리 또는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GAC와의 협상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나 애초 14일 오후 열릴 예정이던 GAC의 공개회의가 취소돼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국제토론에 한국 엔지오 참여 늘어 요코하마 회의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기획된 ‘시민사회 포럼’이 크게 주목을 끌었다.
지적재산권그룹, 도메인등록대행그룹, 인터넷서비스제공그룹, 비영리기관그룹, 최상위국가도메인그룹, 일반도메인등록그룹, 영리기관그룹 등 기존 선거권자 회의와는 별개로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 전문가 모임’(CPSR)이 주최한 포럼이다.
아이칸 설립 당시의 정신, 그러니까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다양한 대표성 보장, 지나친 상표권 보호 지양, 시민대표 선출 관련 선언문 채택 등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는 뜻에서 기획된 것이다.
도메인지원기구가 그동안 상업적 이해관계에 압도돼왔다는 위기의식도 포럼 형성에 한몫했다.
13일 오후 ‘비영리선거권자 회의’(NCC)가 끝났다.
아이칸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은 NCC였다.
안도감과 뿌듯함이 교차했다.
지난해 8월 산티아고 회의에서 정식으로 승인된 NCC는 최상위국가도메인 회의와 마찬가지로 각 나라 사람들이 참석한 모임이어서 합의에 이르는 길이 ‘예술의 경지’로 불릴 만큼 어렵다.
이 자리에서는 다른 토론그룹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거수기로 전락할지 모를 위기를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모면할 것인가가 최대 과제였다.
미국의 입김이 곧바로 합의사항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얻어내야 할 것을 얻어낼 것인가. 지난번 카이로 회의에서는 미국 회원들이 회의 도중 갑자기 결정서를 낭독하면서 “NCC의 이름으로 결정서를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비영어권 지역 회원들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투표에 참여하려고 했다.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이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는 결정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냈다.
막 투표를 하려던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회원들은 나의 돌발적인 제안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미국 회원들과 줄다리기 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NCC 결정서’가 아닌 ‘회의 참석자 결정서’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뒤에야 비로소 투표가 진행될 수 있었다.
요코하마 회의 직전까지도 몇몇은 미국 회원들로부터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고분고분한 거수기 노릇을 하지 않은 대가였다.
그들을 설득해 회의가 열리기 일주일 전 마침내 결정서를 채택하는 새로운 절차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회의장에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선택을 강요받는 이전의 진행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이제부터는 결정서 초안을 미리 전자우편 토론그룹에 알려야 하며, 이들에게 이를 검토할 시간 여유를 줘야 하고, 회의장에서 활발한 토론을 거쳐 문제되는 부분은 첨삭가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권리를 얻는 데까지 약 넉달이 걸렸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인터넷포럼 등의 후원으로 30명이 넘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여했다.
참여연대, 피스넷, 진보네트워크 회원들은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해 회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들만의 잔치 막으려면 떠들어야 한다” ‘네임 카운슬’(Names Council)은 위원 19명이 단상에 올라 4시간여에 걸쳐 공개토론을 벌인 자리였다.
이 회의는 운영방식 때문에 애초부터 잡음이 많았다.
특히 지난 4월 말 아이칸의 뜨거운 감자인 새로운 도메인 생성과 관련해, 워킹그룹C의 최종보고서를 아이칸 이사회에 올리면서, 그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됐다.
6~10개의 새로운 최상위도메인을 만들자는 워킹그룹C의 제안을 뚜렷한 이유없이, 단지 합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제한된 숫자’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네임 카운슬이 직권을 남용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 팽배한 터였다.
게다가 그 뒤엔 한달에 한번은 열기로 한 원격회의를 열지 않아 직무태만이라는 비난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회의는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조용히 지나갔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지만,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참가자부터 신경조차 쓰지 않는 참가자까지 모두가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코하마에서 회의가 열리기 10일 전쯤 이 문제를 포함한 활발한 토론이 온라인에서 진행됐다.
새로운 도메인을 도입할 때 그 운영권의 할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아이칸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등 네임 카운슬이 그동안 회피해온 의제들이 온라인을 달궜다.
이를 계기로 거의 소리 죽여 지내던 전자우편 토론이 한바탕 열기를 내뿜었다.
전자우편 토론이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네임 카운슬에서 온라인에서 제기한 의제들이 어떤 식으로 채택될 것인가만 남았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아주 민감한 쟁점은 슬쩍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거나 빠졌다.
그 대신 ‘개발도상국의 입장’이라는 안건이 채택됐다.
결국 네임 카운슬과 다른 토론그룹간에 의견 교환을 제도화하는 작업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네임 카운슬의 책임을 직접 추궁하는 데서 다소 물러난 셈이다.
5일간의 요코하마 회의에 참가하면서 좀더 적극적인 참여만이 인터넷의 민주화를 일굴 수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잠들어 있는 많은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이제는 깨어나, 아이칸이 민주정치의 최고봉을 구현하는 사이버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힘쓰는 촉매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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