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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트랜드] 아르헨티나의 비극, 전염될까
[경제트랜드] 아르헨티나의 비극, 전염될까
  • 이용인 기자
  • 승인 2001.07.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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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 바람 잘 날이 없다.
먹여 살려야 할 자식은 많고, 빚은 산더미처럼 떠안고 있는 흥부네와 닮은꼴이다.
채권자들은 놀부처럼 밥주걱을 들고와 꿔간 쌀을 갚든지, 아니면 한쪽 뺨을 대라고 매일 독촉을 해댄다.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살림살이를 모두 뒤엎을 태세다.
그렇다고 아르헨티나가 흥부네처럼 박씨를 물어다줄, 강남갔던 제비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르헨티나는 사면초가에 몰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르헨티나에 대한 국제 금융자본의 불신감은 올해 초부터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국제 신용평가 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 등은 올해 초부터 아르헨티나에 대한 신용등급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초 S&P는 아르헨티나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고, 무디스도 이에 뒤질세라 며칠 뒤 똑같은 조처를 취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정치적 불화, 경기둔화 심화 등이 그 이유였다.
아르헨티나 위기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은 7월10일 있었던 국채발행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올해 말 만기가 되는 52억달러 규모의 외채 상환을 앞두고 신규 채권을 발행해 만기를 연장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입찰에 참여한 12개 금융기관 가운데 뱅크오브아메리카를 포함한 일부 투자자들이 응찰을 포기하면서 발행조건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가 경제회생책으로 내놓은 재정규모 삭감조처를 못 믿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국채 금리는 14.1%로 치솟아, 7.9%인 단기 채권금리의 두배 가까이가 됐다.
이후 아르헨티나 주가인 메르발지수가 곤두박질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설이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사실 아르헨티나의 실물경기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시작됐던 97년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금융위기의 파고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넘긴 데 비해 아르헨티나는 99년 -3.4%, 지난해 -0.3% 등 마이너스 성장을 탈피하지 못했다.
올해 1분기에도 아르헨티나는 -2.1%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고용불안이 확대돼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실업이나 임시고용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터에 빚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깔려 있다.
외채 대 외환보유액의 비율은 자그마치 585%에 이른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100원뿐인데, 빚은 585원이나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빌려 쓴 돈의 이자 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올해 갚아야 할 외채 이자만도 100억달러(약 13조원)에 이른다.
그렇다고 돈벌이가 잘 되는 것도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적자 경제구조이고, 재정 부문도 상반기에만 4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상황이다.
아르헨티나 위기의 원인으로는 재정수지 적자 폭 확대와 이에 따른 대외부채 증대, 페로니즘으로 불리는 대중영합 정치, 부진한 구조조정 등이 꼽히고 있다.
위기의 원인이 복합적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위기의 밑바닥에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미국 경제의 하강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달리 얘기하면 아르헨티나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와 달리 아르헨티나 지원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다.
때문에 국제 금융시장은 아르헨티나발 위기가 세계 신흥시장으로 전염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단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으로 묶여 있는 브라질 등은 파편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가뭄으로 극심한 전력난을 겪고 있는 브라질은 이미 아르헨티나에서 온 충격으로 레알화가 매일 최저치로 속락하고 있다.
멕시코 주식시장도 휘청거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위기의 파장이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가 전체로 확대될 것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낙관론자들은 지금은 97~98년 국제 금융시장 위기 때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동안 신흥국가들에서 구조조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외환보유액도 훨씬 넉넉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과의 직접 무역교류 규모가 작아 타격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국제 투기자본이 꼭 실물경기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남미의 금융시장 불안이 신흥시장 전체에 대한 불신을 심어줘, 또다시 ‘자본 엑소더스’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신흥시장 채권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때문에 IMF도 최근 보고서에서 “아르헨티나 위기가 신흥 국가들에 전염될 가능성은 여전하며, 확실한 투자여건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금융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별것 아니다’라는 자만은 언제든 위험하다.
97년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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