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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투명기업들의 투자홍보비법
3. 투명기업들의 투자홍보비법
  • 이정환 기자
  • 승인 2001.07.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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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이 최고의 무기” 투명기업들의 투자홍보 비법… CEO가 발품 팔고 IR위원회가 전략 짜고 포항제철 황태현 상무는 새벽 다섯시에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 벨소리에 깨어났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자회사 포스벤이 만기가 돌아온 차입금 2억6600만달러를 연장하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지급보증을 섰던 포항제철은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물어야 하게 됐다.
지난 6월19일의 일이다.
함께 지급보증을 서기로 했던 미국 건설회사 레이시온이 발을 빼면서 만기연장이 틀어지고 레이시온 몫까지 모두 포항제철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레이시온은 처음 계약할 당시 공장을 다 지을 때까지만 지급보증 의무를 떠안기로 했다.
공장 건설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레이시온이 포스벤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고, 포항제철은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았으니 레이시온이 계속 지급보증 의무를 져야 한다고 맞서왔다.
어찌 됐든 그 와중에 포스벤은 차입금을 연장하는 데 실패했고, 포항제철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황 상무는 부리나케 회사로 달려가 긴급회의를 열고 상황을 정리했다.
최악의 경우 포스벤이 부도를 맞게 되면 포항제철이 입게 될 손실은 모두 3247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것은 지난해 순이익의 3분의 1이 넘는 엄청난 규모다.
레이시온이 말썽만 부리지 않았어도 별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갑작스레 꼬여버린 것이다.
황 상무는 이 사실을 투자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드러날 일이라면 이쪽에서 먼저 치고나가는 편이 훨씬 충격이 덜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은 출근하자마자 포항제철에서 날아온 e메일을 볼 수 있었다.
포항제철은 모든 지급보증 채무를 이행하고 그것을 대손충당금으로 잡아 손익에 반영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예상됐던 대로 주가는 시장이 열리자마자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장은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다.
시장은 이 손실이 정상적인 영업활동으로 인한 것이 아닌데다 전체 사업규모에 견줘볼 때 그리 치명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다.
실적이 조금 나빠지겠지만, 큰 밑그림은 달라질 게 없다는 포항제철의 조목조목한 설명이 설득력을 발휘했다.
오히려 잠재 부실이 겉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도 있었다.
많은 증권사들이 잇따라 보고서를 내고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평가했고, 다음날부터 주가는 바닥을 치고 오르기 시작했다.
저점 매수를 노리는 투자자들이 몰려들면서 가볍게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숨기려고 한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외국인투자자들은 몇주 전부터 포스벤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밝히는 게 최선이었죠.” IR팀 조재구 부장의 이야기다.
만약 이 사실이 포항제철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먼저 흘러나왔다면 포항제철의 주가는 바닥 없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믿을 수 없는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혀 영원히 버림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정보에 빠른 외국인투자자들 눈을 피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쉽다.
포항제철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정보를 바로바로 투명하고 정확하게 공개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시장의 판단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다.
“시장을 놀라게 하지 마라.” 포항제철 IR팀의 핵심원칙 가운데 하나다.
시장을 놀라게 하지 마라 주택은행은 행장이 직접 나서서 IR을 진두 지휘한다.
지난해 모두 349건의 투자설명회를 열었는데, 이 가운데 126건에 김정태 행장이 직접 참석했다.
증권사 출신인 김 행장은 98년 부임하면서 IR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나섰다.
조용성 IR팀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한참 잘릴 뻔한 지경까지 갔었지요. 왜 매도 보고서가 나왔느냐, 왜 그런 것까지 공개했느냐, 참 말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다가 행장이 새로 오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IR에 있어서 대표이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지요.” IR 전략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최고경영자의 의지다.
아무리 담당직원이 열심히 하려고 해도 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움츠리면 아래서는 정보가 터무니없이 왜곡되고 움직임이 둔해지게 된다.
김 행장은 새로 꾸린 IR팀에게 모든 정보를 투명하고 신속하게 공개할 것을 주문했다.
권한을 대폭 위임해 웬만한 일은 IR팀장 직권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김 행장은 쌍방향 의사소통을 강조했다.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장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경영전략을 그때그때 바로잡겠다는 이야기다.
IR팀은 정보를 내보낼 뿐만 아니라 시장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김 행장 자신도 “은행 안에서보다 투자자들에게서 은행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말할 정도다.
주택은행의 IR 담당자는 뜻밖에도 파란눈의 외국인이다.
맥킨지 출신인 피터 코이스겐은 아직도 한국말이 조금 서툴다.
“사실 외국인투자자들이 훨씬 까다로워요. 외국 투자자들 입맛에 맞추면 국내투자자들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 주택은행의 외국인투자자 지분은 이미 60%에 가까워지고 있다.
주택은행은 전략적으로 투자자들을 맞이하는 대외창구로 피터를 내세웠다.
주택은행을 찾는 투자자 가운데 90% 가량이 외국인들인데, 그들은 아직도 국내 기업관행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피터는 그런 외국인투자자들에게 친밀감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투자자들에게도 주택은행이 뭔가 국제적인 전문성을 갖췄다는 인상을 주는 역할도 한다.
주택은행은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투자자들에게 큰 신뢰감을 준다.
한국에서 뉴욕 증시 회계기준을 맞추는 은행은 주택은행이 유일하다.
주택은행은 뉴욕 증시가 부과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철저히 지킨 덕분에 외국인투자자들에게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인상을 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투명하다는 믿음을 줘라 IR팀을 두고 임원이 직접 IR을 챙기고 나서는 포항제철이나 주택은행과 달리 제일모직에는 IR팀이 따로 없다.
“팀을 따로 두면 정작 현장 분위기를 모르고 겉돌게 될 위험이 있어요. 우리는 전직원의 IR 요원화를 추구합니다.
” IR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안종환 재무팀장의 이야기다.
제일모직은 대신 비상설 조직으로 태스크포스팀을 두고 있다.
경영기획실, 재무팀, 홍보팀, 신사업추진팀 등 각 부서에서 한명씩 뽑아 모은 태스크포스팀이 안종환 재무팀장을 중심으로 매주 월요일 회의를 한다.
이 자리에서는 업무추진 현황과 시장의 반응, 실적 전망 등 다양한 IR 전략이 논의된다.
태스크포스팀과는 별도로 한달에 한번씩 IR위원회가 따로 열린다.
안복현 사장이 참석해 위원장을 맡는다.
시장의 요구를 읽고 경영전략을 모색하는 자리다.
제일모직 또한 특별한 비밀만 아니라면 모든 기업내용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특히 제일모직은 전체 발행주식 가운데 12%가 우리사주 조합 소유라 직원들이 곧 주주라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
당연히 회사 안에서부터 모든 기업내용이 철저하게 공개되고 태스크포스팀이나 IR위원회를 통해 이런 정보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사장이 직접 나서서 정기적으로 모든 직원들 앞에서 기업내용과 경영전략을 설명하고 그 내용들이 바로 IR에 반영된다.
이런 독특한 IR 조직체계 덕분에 제일모직은 정확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최근에는 굴뚝기업의 이미지를 벗고 신소재 사업을 비롯한 첨단기술 기업 이미지를 심기에 힘을 쏟고 있다.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를 줘라 IR에 열성적이고 그만큼 투자자들의 신뢰를 빨리 회복시킨 회사는 역시 현대자동차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외국인 지분이 22%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인 지분은 그러나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나기 시작해 지금은 56%를 넘어섰다.
현대그룹과의 계열 분리가 순조롭게 이뤄진데다 경영 실적이 눈부시게 나아진 것도 좋은 평가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자동차가 투자자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계열분리 작업 진행상황과 경영 전망을 알렸고 한번 한 약속은 빠짐없이 지켰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갖는 부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위해 적극적인 IR 공세를 펼쳐나갔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사주를 매입·소각하는 전략을 펼친 것을 비롯해 최고경영자가 직접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를 찾아다니면서 이른 아침부터 기업설명회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채권시장과 신용평가기관에까지 IR을 넓혀나갔다.
게다가 회사 경영실적까지 꾸준히 나아졌으니, 신뢰도가 높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자동차에도 대표이사가 주축이 된 IR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정몽구 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이계안 사장과 박완기 부사장, 박흥국 IR팀장 등이 위원을 맡고 있다.
팀장이 고위 임원들과 한자리에 앉아 시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IR 전략을 모색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의 비난이 엄청나게 쏟아졌지요. 그러나 지금은 약속을 지키는 기업, 예측가능한 기업으로 투자자들의 인식이 바뀌는 중입니다.
” 박 팀장의 이야기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1년간 무려 690건의 기업설명회를 열었다.
CEO가 직접 나서라 IR을 잘 하는 기업들의 IR 전략을 살펴보면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최고경영자가 직접 IR을 챙기고 나서고 중장기적 경영전략을 총괄한다는 점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숨김없이 경영정보를 공개하려고 노력한다는 점, IR 전담조직을 꾸리고 있다는 점, 정기적으로 기업설명회를 열고 꾸준히 투자자들을 접촉한다는 점 등도 공통점이다.
또 한가지 공통점을 더 찾자면, 이들은 모두 뉴욕 증시에서 해외예탁증서를 발행했거나 외국인투자자 지분이 높은 기업들이다.
까다로운 외국인투자자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투명한 정보공개가 어느 정도 몸에 배게 됐다고 볼 수도 있고, 외국인투자자들이 그런 기업만 골라 투자한다고 볼 수도 있다.
IR 담당자들이 말하는 IR 성공전략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위험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다.
위험을 숨기거나 줄여서 말해서는 안 되고,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투자자들의 믿음을 확보하는 데는 정직이 최선이다.
베테랑 애널리스트의 IR 제언
진실하게, 꾸준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기업공개로 조달된 자금을 이리저리 다 쓰고 난 벤처기업들은 주가폭락으로 분노한 투자자들의 주머니를 다시 탐내기 시작하고 있다.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여의도행이 잦아지고 있고, 여의도의 호텔과 고층빌딩은 다시 ‘투자홍보활동(IR) 특수’를 맞고 있다.
그러나 내실 없이 IR이라는 식상한 이름만으로 투자자와 애널리스트들을 다시 불러모으기에는 역부족이다.
기업의 3대 요소가 사람, 기술, 돈이라면 한국의 벤처기업이 가진 것은 사람과 기술이고, 모자라는 것은 돈이다.
가장 부족한 것을 얻는 데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그것이 얻어질 리 만무하다.
IR은 당당해야 한다.
자기를 알리는 것이 겁나거나 부끄러운 회사는 상장을 취소하고 개인회사로 돌아가는 게 맞다.
주주에게 결산보고를 하기 겁나 대기업과 주주총회 날짜를 맞추는 회사, 주주가 찾아오는 게 겁나 지방에 있는 공장에서 주총을 하는 회사는 이제 자본시장의 외면을 받는 1순위 회사다.
IR은 진실해야 한다.
투자가들은 투자하기에 바빠 한 회사를 오래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돈 필요할 때만 하고 투자자가 정말 답답해하면서 알고 싶을 때는 정보의 문을 닫아거는 회사는 한번의 멋진 투자유치는 가능하겠지만 두번 다시 하기는 어렵다.
IR에서 공언했던 목표치를 절반도 달성하지 못했거나 적자를 냈으면 투자가에게 솔직히 알리고 용서를 구하는 게 정상이지만, 끝까지 숨기고 감추려는 노력을 사업하듯이 열심히 하는 회사를 보면 안쓰럽다 못해 애처롭다.
왜 상장을 했는지. 주식시장은 이제 소비자시장이다.
99년 이래로 하도 많은 비슷한 회사가 상장되어 모르면 안 사면 되고, 이 회사가 정보공개를 꺼리면 다른 회사 주식을 사면 된다.
이제는 회사 정보의 창을 하나로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열어 투자자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홈페이지도 있고 e메일도 있고 매스컴도 있다.
좀 구식이긴 하지만 매달 주요 투자자들에게 사장이 경영 현황을 알리는 편지를 쓰는 것도 요즘 잘 먹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더 좋은 건 회사의 CEO가 직접 투자자를 만나 자본시장의 소리를 듣고 투자자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다 벤처기업의 엔지니어 출신 기업가들은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프로일지 몰라도 자본시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큰손이 움직이는 무대에 나선 초보 배우에 불과하다.
초보 배우가 무대의 룰을 지키기 않고 자기 멋대로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은 주가 하락으로 응징한다.
이런 응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상장기업은 지금보다 더 진실되게, 정기적으로, 그리고 더 많은 정보를 시장에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전병서/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수석연구위원 bsjeon@beste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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