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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트렌드]노동을 신성하게 하려면
[경제트렌드]노동을 신성하게 하려면
  • 투자팀 이용인 기자
  • 승인 2001.08.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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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신성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끔 일이 재미있을 때가 있고, 대개는 그냥저냥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게 대부분 아닐까. 거기에 ‘신성’이라는 거룩한 단어까지 붙이는 데는 왠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실제 노동에 몰입감을 느끼며 ‘자아’와 회사, 그리고 사회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고 신성한 의무감을 느끼며 일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아무런 판단기준이나 사전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학교 성적과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한국 사람들이 유독 ‘삶의 여유’에 목말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최근 주 5일 근무제를 올해 안에 입법화하겠다는 소식은 직장인들에게는 반갑게 들린다.
김대중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주 5일 근무는 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며 “법안이 조속히 처리되길 기대한다”고 주문했다.
노동부 장관도 노사정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올해 안에 정부가 직접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강경 발언으로 대통령의 재촉에 화답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주 5일 근무제의 도입은 당분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가시밭길이 예정된 불행한 아이의 슬픈 운명처럼 말이다.
절차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우선 주 5일 근무제의 도입은 지난해 10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이미 합의된 사항이었다.
당시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진전된 것은 하나도 없다.
올해 안으로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그래서 미덥지가 못하다.
물론 정부는 “노사정 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단독으로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행시기를 놓고 보면 현 정권이 주 5일 근무제를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애시당초 합의된 2002년 하반기보다 6개월 더 늦추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빨라야 2003년부터, 그것도 정부와 학교 등 공공부문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겠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얘기다.
시행시기를 이처럼 늦추는 것은 주 5일 근무제라는 뜨거운 감자를 다음 정권으로 넘기겠다는 의도처럼 비친다.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곤욕을 치른 정부가 또다시 미묘한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정권 초기의 공약을 이처럼 어물쩍 넘겨버리는 것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실제 다음 정권으로 공이 넘어갔을 때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될지는 확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른바 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한 정치인은 “주 5일 근무제는 임금인상 효과만 나타낼 수 있다”며 좀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은 하지 말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나 자민련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명분만 내세워 서둘러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기업에 큰 부담이 된다”고 주장한다.
차기 정권으로 주 5일 근무제가 넘어갔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어찌 입법화를 한다고 해도 주 5일 근무제는 여기저기 꿰어맞춘 누더기가 될 게 뻔하다.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될 경우 공휴일이나 월차휴가, 생리휴가를 없애는 방안을 놓고 이해당사자들끼리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돼 일주일에 이틀을 쉬고 기존 법정공휴일을 모두 쉰다고 해도 우리의 휴일은 연간 143~153일로, 프랑스의 휴가일수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가뜩이나 법정 휴가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차’ 떼고 ‘포’ 떼면 노동환경은 오히려 더 열악해질 수도 있다.
설령 토요일을 쉰다고 해도 실제 주당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보장도 없다.
주 5일 근무제 논의의 핵심은 주당 44시간 노동을 40시간으로 줄이는 데 있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보면 마치 ‘토요 휴무’ 자체가 쟁점인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
토요일날 쉬기만 하면 평일에는 8시간 노동이든, 12시간 노동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다.
개별 기업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고 요식적인 행정지도만 있는 상황에선 법정 근로시간은 공염불일 뿐이다.
게다가 주 5일 근무를 할 경우 임금삭감이나 계약직 증가를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휴일을 제대로 챙길 수 있는 간 큰 직장인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이제 기업도 정부도 ‘노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유 없이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것은 제 아무리 신성하다고 떠들어댄들 귀담아들을 직장인이 아무도 없다.
소속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날 리도 없다.
1989년 제조업의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임금상승률도 최고치를 이뤘지만 다시 3~4년 만에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상승률이 균형을 이루었다는 통계를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장의 치부보다 기업의 영속성을 중시하는 기업가라면, 진정한 생산성은 노는 데서 나온다는 새로운 경영 대차대조표를 도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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