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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벤처들의 머니게임, 그 초라한 성적표
[머니] 벤처들의 머니게임, 그 초라한 성적표
  • 이정환
  • 승인 2000.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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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8239억원 투자, 2636억원 회수…자금난 악화로 처분물량 급증
비쌀 때 사서 쌀 때 판다? 기상천외한,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투자기법이 요즘 코스닥시장에서 유행하고 있다.
하필이면 주가가 연중 최저치에 머물러 있는 이때 타법인 출자지분을 처분하는 벤처기업들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주식을 팔아치우는 심정이야 오죽할까마는 전염병처럼 번졌던 무분별한 머니게임의 끝을 바라보는 시장의 눈길은 결코 곱지 않다.



비쌀 때 사서 쌀 때 판다? 코스닥 등록 벤처기업들은 올 들어 지난 12월2일까지 922개 기업에 모두 1조8239억원을 투자했다.
시가총액 36조9296억원의 5%에 이르는 방대한 금액이다.
지난해 3272억원에 견주면 457.4% 가량 폭증했다.
월 평균 1658억원 가량을 투자한 셈이고, 코스닥 등록기업 하나가 평균 1.5개 회사에 투자한 꼴이다.
타법인 출자는 코스닥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급격히 늘었다가 올 2월 정점을 이뤘다.
이후 시장이 위축되면서 투자 목적의 출자는 크게 줄어들고, 인수합병(M&A)을 염두에 둔 몇몇 대규모 출자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기업별로는 새롬기술이 10개 기업에 672억원을 출자한 것을 비롯해 CJ삼구쇼핑이 13개 기업에 627억원, 세원텔레콤이 14개 기업에 578억원을 각각 출자했다.
이밖에도 35개 기업이 100억원 이상의 타법인 출자를 단행했다.
최근에는 자금난이 악화하면서 지분출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반면 보유 지분을 처분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어났다.
올 들어 95개 기업 2636억원의 출자지분이 처분됐는데, 이 가운데 41.8%에 이르는 1102억원 가량이 지난 10월과 11월에 쏟아져나왔다.
자금난이 심각해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보기 어려운 기업의 지분을 우선 처분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개중에는 주가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실망매물도 상당 부분 섞여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벌었나 자금난을 겪은 메디슨 계열의 메디다스가 대표 사례다.
메디다스는 최근 무한기술투자와 한글과컴퓨터 지분을 매각하고 67억원을 회수했다.
매각 당시 주가는 2만3600원과 5120원으로 지난 1월의 고점 6만900원과 5만7천원과 비교하면 각각 38.8%와 8.9%에 불과하다.
1월에 팔았으면 556억을 받을 수 있는 주식을 고작 67억원에 팔아치운 것이다.
메디다스는 지난해와 올해 14개 기업에 303억원을 출자하고 6개 기업 주식을 처분해 85억원을 회수했다.
사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만 해도 기업들은 지분 투자로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대표 사례가 다음커뮤니케이션과 골드뱅크가 될 것이다.
다음은 지난해 12월 등록을 앞둔 한통하이텔 주식을 공모가격인 주당 2만8천원에 56억원어치를 매입했다.
이후 불과 20일 남짓한 동안 한통하이텔 주가는 8만6500원까지 치솟았고 다음은 보유 지분 전량을 매각해 144억원(수익률 257.2%)의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렸다.
골드뱅크도 투자전력도 이에 못지않게 화려하다.
지난해 6월 디지토에 27억원을 출자해 같은해 12월 42억원(수익률 55%)을 회수한 것을 비롯해 9월에는 온네트에 9억원을 출자했다가 불과 3개월 만에 49억원(수익률 444.4%)을 거둬들였다.
골드뱅크는 지난해와 올해 39개 기업에 561억원을 투자하고 이 가운데 9개 기업 지분을 처분해 모두 156억원을 벌어들였다.
디지틀조선도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렸다.
디지틀조선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하나로통신과 비테크놀로지, 휴먼컴 등의 출자지분을 처분해 모두 443억원을 벌여들였다.
디지틀조선은 올 들어 14개 기업에 94억원 가량을 출자했다.
좋았던 시절 다 지나가고 그러나 다음과 골드뱅크의 사례는 호시절 ‘반짝 신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투자를 회수할 방법이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장외시장에 투자한 많은 투자자들처럼 뒤늦게 타법인 출자에 따라나섰던 벤처기업들은 자금이 묶여 울상을 짓고 있다.
사겠다는 사람만 나서면 언제든지 헐값에라도 내던질 태세다.
거래소의 메디슨이나 코스닥의 메다다스 같은 경우가 실제로 그랬다.
지난해와 올해 1200여건의 타법인 출자 가운데 업무제휴와 관련 없는 투자 목적의 지분 출자가 210건에 이른다.
주가가 연중 최고치로 치솟았던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이루어진 투자가 대부분인데다 장외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어 실제로 투자수익을 올린 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아직까지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일부는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지분매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한통하이텔에서는 제법 재미를 봤지만 인포뱅크와 오이뮤직 등 375억원을 출자한 나머지 11개 기업에서는 아직 단맛을 보지 못했다.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시너지 효과를 노린 전략적 제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서는 무분별한 사업다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골드뱅크는 최근 ‘사업상 시너지 효과 반감’이라는 이유로 골드북과 이게임즈, 엔써커뮤니티 지분을 처분하고 15억원 가량을 회수했다.
최근 코스닥에 신규 등록한 엔써커뮤니티를 제외하면 나머지 지분의 매각은 현금흐름 확보를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넷기업으로 변신을 꿈꾸며 네띠앙과 하늘사랑 등 27개 기업에 348억원을 투자하면서 다각화를 추진한 한글과컴퓨터는 최근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한기술투자 보유지분을 매각해 23억원을 회수했다.
비트컴퓨터와 인터파크, 세원텔레콤 등 유동성 위기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기업들도 10월과 11월에 잇따라 출자지분을 매각했다.
헐값에라도 팔자 이같은 타법인 출자지분 매각을 바라보는 시장의 눈길은 따갑다.
코스닥증권시장 윤권택 공시팀장은 “유행처럼 번졌던 타법인 출자가 최근에는 무더기 지분 매각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특히 지난해 말과 올해 초 공모와 유상증자를 통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이 기술 개발이나 경쟁력 강화는 도외시한 채 시세차익을 노린 머니게임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KTB네트워크 박훈 이사는 “장외시장이 완전히 마비된데다 코스닥 침체도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타법인 출자도 이제 철저한 기업분석과 과학적 시장전망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장기적 투자회수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때 머니게임에 경쟁적으로 나섰던 코스닥 벤처기업들은 지금 아픈 만큼 성숙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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