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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잠 못 이루는 ‘철강 공룡’의 실험
[커버스토리] 잠 못 이루는 ‘철강 공룡’의 실험
  • 이정환 기자
  • 승인 2001.08.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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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량 증가 불구 매출액·영업이익 감소… 성장 한계 넘기 위한 새판짜기 '꿈틀’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포항제철 TV 광고 가운데 ‘소리없이’라는 말이 유독 눈에 띈다.
세상을 움직여왔다는 자부심과 함께, 정보화 시대에 들어 주목의 대상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진 전통기업의 소외감이 묻어난다.
세상을 움직여왔는데 왜 알아주지 않느냐는 불만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포항제철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끌어왔다.
포항제철이 없었으면 자동차회사나 조선회사나 외국에서 값비싼 철강 재료들을 수입해다 써야 했을 것이고 지금 같은 경쟁력을 갖추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 펄펄 끓는 용광로 앞에서 만난 직원들은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한때 포항에서 포항제철에 다닌다는 건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작업복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작업복을 맡겨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직원들 사이에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역 회사,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포항제철 직원들은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혔다.
그러나 지금 포항제철의 위상은 옛날과 크게 다르다.
한수 접고 내려보던 인천제철이 지금은 더 많은 월급을 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힘들고 위험한 ‘굴뚝산업’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포항제철에 다닌다는 게 더는 큰 자랑거리가 아니게 됐다.
이제 거리에서는 포항제철의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들 ‘소리없이’ 묵묵히 일할 뿐이다.
회사 밖을 보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크고 작은 철강회사들과 아웅다웅 밥그릇 다툼을 하는 처지다.
지난 몇년간 이어졌던 성장세가 올해 들어서는 크게 꺾이고 있다.
4조3교대로 모든 설비를 100% 가까이 돌리고 있지만 매출과 순이익이 눈에 띄게 부진해졌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쟁쟁한 철강회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손해를 보면서 제품을 팔고 있는 철강회사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에서 만든 싸구려 철강 재료들이 쏟아져나오면서 포항제철 몫까지 넘보고 있다.
이래저래 포항제철은 지금 성장성의 한계를 맞고 있다.
포항제철의 상반기 실적은 이런 위기상황을 그대로 드러낸다.
생산량은 1400만톤으로 지난해보다 30톤 가량 늘어났지만, 매출액은 5조5790억원으로 2840억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영업이익도 7350억원으로 3200억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지난 7월25일 상반기 경영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유상부 회장은 “철강업계 사상 초유의 경영난”을 겪고 있다면서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탓에 전망이 빗나갔다”고 털어놓았다.
포항제철은 지난 4월에 이어 또 한차례 올해 실적전망을 크게 낮췄다.
포항제철의 올해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1조2천억원과 1조576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지난해보다 각각 4.2%와 24.9% 적은 수준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라지만, 지금 같아서는 이런 전망도 불확실하기만 하다.
포항제철의 위기는 자못 심각해 보인다.
원가 상승·수출가 하락, 전망마저 어두워 철강산업은 이미 1990년부터 포화상태에 들어섰다.
지난해 전세계 철강회사에서 만들어낸 철강제품은 모두 8억4400만톤. 수요가 주춤한 가운데 공급이 넘쳐나면서 1억8500만톤 가량의 설비가 남아돌고 있다.
공장 열개 가운데 두개가 놀고 있다는 얘기다.
포항제철의 주력상품인 열연강판과 냉연강판의 수출가격은 지난 20년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90년만 해도 1톤에 405달러를 받았던 열연강판 값은 올해 들어 그 절반에도 못미치는 193달러까지 떨어졌다.
냉연강판 가격도 565달러에서 296달러까지 내려갔다.
유 회장은 “제조원가는 밝힐 수 없지만 포항제철은 아직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의 철강산업 전문 연구기관인 월드스틸다이내믹스(WSD)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포항제철의 냉연강판 제조원가는 톤당 315달러로 추산된다.
미국이나 일본 업체들보다 100달러 이상 낮다고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런 원가수준에서는 앞으로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좀처럼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기회복도 불투명하고 무엇보다도 공급과잉 문제가 뚜렷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올해 들어서만 6개 철강회사가 문을 닫았다.
베들레헴스틸같이 한때 이름을 날렸던 철강회사도 1억달러 가까이 적자를 내고 주가가 반토막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료 가격까지 크게 뛰어올라 가뜩이나 어려운 철강업체들의 목을 죄고 있다.
올해 들어 철광석은 4%, 석탄은 10% 이상 값이 뛰어올랐다.
우리나라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96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내는 냉연강판의 연간 생산량은 820만톤에 지나지 않았는데, 설비투자가 부쩍 늘어나면서 지난해 1475만톤에 이르렀다.
포항제철은 물론이고 현대하이스코나 동부제강 등이 잇따라 냉연강판을 만들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수요가 따라주지 않았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냉연강판은 다 합쳐 789만톤밖에 안 됐다.
나머지 686만톤은 외국에 내다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인데, 수출도 결코 쉽지 않았다.
손익분기점이라는 톤당 300달러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 됐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산 철강제품을 덤핑이라며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데 이어 여차하면 긴급 수입제한 조처까지 발동할 계획이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냉연강판의 재료가 되는 열연강판은 공급이 달려서 걱정이다.
냉연강판 공장만 서둘러 지었지 열연강판 공장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업체들이 일본에서 열연강판을 수입해다 쓰는데 가격이 워낙 비싼 탓에 요즘 같으면 기껏 만들어내도 남는 게 없다.
현대하이스코가 포항제철에게 열연강판을 공급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보조기사 참조) 사업다각화·업무혁신으로 수익성 제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철강업체들 사이에 전략적 제휴와 합병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규모를 키워서 수익성을 높이고 협상력을 갖추자는 전략인 셈이다.
유럽의 유지노스틸과 아베드스틸, 일본의 NKK제철과 가와사키제철이 서로 합병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의 합병이 성사될 경우 생산량이 각각 4400만톤과 3400만톤으로 세계 1, 2위 규모가 된다.
철강 원료업체나 수요업체들도 철강업체들과 마찬가지로 합병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철광석 업계에서는 상위 3개사가 세계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자동차 업계에서는 상위 6개사가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시장지배력이 없는 영세한 업체들은 명함도 내밀기 어렵게 됐다.
포항제철도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제휴를 모색하는 등 대안을 찾고 있지만 이래저래 힘겨운 도전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철강업체들 사이에서는 감산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조금씩 생산량을 줄여 가격 하락을 막아보자는 논리다.
그러나 다들 겉으로는 감산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뒤로는 생산량을 늘리는 데 바쁘다.
많은 제조업이 그렇듯 철강산업도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제조원가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감산을 통해 당장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할만한 업체는 없다.
뾰족한 대책 없이 철강산업은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유 회장은 “철강산업은 이제 성장기를 벗어나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젠 예전처럼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어려운 계절을 지내고 나면 수많은 철강업체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릴지도 모른다.
포항제철의 딜레마는 생산량을 늘려도 오히려 매출과 영업이익이 줄어든다는 데 있다.
그나마 이제는 생산량도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다.
머지않아 만들어도 팔 데가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포항제철의 고민은 깊고도 깊다.
다른 성숙기 기업들처럼 포항제철은 지금 성장성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히고 있다.
성장성의 한계를 넘는 해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업다각화로 매출기반을 확대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업무혁신으로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다.
유 회장이 여러 차례 밝혔듯이 포항제철이 잡고 있는 사업다각화의 방향은 에너지와 정보통신이다.
그러나 에너지 사업을 추진해왔던 자회사 포스에너지는 제대로 일을 벌여보지도 못한채 최근 문을 닫았고, 통신쪽에서는 SK텔레콤과 IMT-2000사업 말고는 더는 신규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최근에는 생명공학이나 환경쪽으로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짙은 안갯속이다.
무분별하게 신규사업을 벌였다가 낭패를 본 외국 철강업체들 짝이 나지 않을까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 회장은 업무혁신쪽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업무구조를 뜯어고쳐 제조원가를 낮추고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빠르고 정확한 생산체계를 갖춰 다른 철강업체들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신규사업은 신규사업대로 가져가지만 승부는 주력사업인 철강쪽에서 보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마침 지난 2년 반 동안 1950억원을 쏟아부어 만든 업무혁신 프로젝트가 지난 7월2일 첫선을 보였다.
기업가치를 대폭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결국 포항제철의 미래는 신규사업 진출과 업무혁신, 이 두가지에 달려 있다.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여온 포항제철이 다시 한번 성장성에 날개를 달 수 있을까 주목된다.
현대하이스코의 도전, 포항제철의 딜레마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 유상부 회장의 단호한 목소리로 보아 포항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분쟁은 더는 절충점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분쟁은 지난 1월 현대자동차가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직접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불거졌다.
그동안 포항제철에서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구입해왔던 현대자동차가 포항제철과 거래를 끊고 계열사인 현대하이스코와 손을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문제는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열연코일을 만드는 회사가 우리나라에서는 포항제철밖에 없다는 데서 비롯한다.
현대하이스코가 열연코일을 팔라고 했을 때 포항제철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한해 100만톤 가까이 냉연강판을 사갔던 현대자동차가 갑자기 등을 돌린데다, 직접 냉연강판을 만들 테니 원료만 팔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코카콜라를 직접 만들 테니 원액을 팔라고 하는 것과 같다.
25년 동안 개발해온 노하우를 어떻게 송두리째 넘겨줄 수 있겠는가.” 포항제철 최광웅 전무의 이야기다.
포항제철 사람들은 분쟁이란 말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투다.
한해 2840만톤을 만드는 포항제철과 180만톤을 만드는 현대하이스코가 경쟁이나 되겠느냐는 이야기다.
자동차용 냉연강판을 만들 수 있는 회사는 포항제철밖에 없다는 자부심도 깔려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의 판결이 불리하게 나온다면 포항제철은 울며 겨자먹기로 현대하이스코에 열연코일을 팔아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포항제철은 그동안 현대하이스코가 사주었던 냉연코일을 팔 다른 수요처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는 것이다.
포항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문제는 설비 과잉에서 비롯한다.
원료가 되는 열연코일 설비도 갖추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냉연강판 공장만 늘려 지은 탓이다.
1995년만 해도 우리나라 냉연강판 공장은 944만톤 정도 생산할 수 있었는데 지난해까지 1372만톤으로 45%나 부쩍 늘어났다.
냉연공장이 늘어나면서 값비싼 열연코일 수입은 98년 80만톤에서 2000년에는 440만톤까지 늘어났다.
그 결과 이제는 기껏 만들어봐야 팔 데가 없는 상황이 됐다.
한해 200만톤 이상이 남아돈다.
규모는 부쩍 늘어났지만 별반 이익은 없는 답답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냉연강판 공장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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