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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시트콤] 눈물
[건강시트콤] 눈물
  • 이우석(자유기고가)
  • 승인 2000.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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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조적 상징물로 그득하다.
물과 불은 어떤가. 한의학에서는 상극이라고 하여 서로 맞지 않는 몸의 기운을 표징한다.
어둠과 밝음, 가난과 부, 큼과 작음, 명민함과 아둔함 등등.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상은 화투패처럼 짝이 맞아 돌아간다.
물론 이분법적 세계관이라고 힐난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면접장에 흐른 씁쓸한 웃음
모 신문 사회면에 영동지방의 큰 산불과 서울의 첫눈이 나란히 톱기사로 실렸다.
마치 일이 뒤바뀌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이 낯설음은 기사거리가 되고, 또 돈이 된다.
스포르닷컴 사옥. 오늘은 2000년도 하반기 신입사원 면접이 있는 날이다.
대기업의 채용계획이 전면 백지화된 상황이라 취업난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대학은 휴학에 따른 수입감소로 하나둘씩 문을 닫는 형편이고, 휴학생들은 가뭄에 콩 나듯 자리가 나는 정부의 공공근로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
스포르닷컴 측은 몰려든 지원자 때문에 매우 난처한 입장이다.
개발팀, 영업·마케팅팀, 대외사업팀, 연구팀 총 4개 팀에서 5명 안팎의 신입사원을 모집하는데 인터넷 응시와 우편접수를 포함해 무려 400여명의 지원자가 몰린 것. 그러나 막상 면접에 응시한 인원은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면접 도중에 타회사와 착각한 듯 횡설수설하는 등 백태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바야흐로 구직난과 구인난이 최악의 흐름으로 맞닿아 있는 형국이다.
허운동 실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면접장을 빠져나온다.
한편, 한재능 팀장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우리 팀은 올해 인원 보강 없습니다.
” 공태만씨와 남궁용씨는 꽤나 아쉬운 모양이다.
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객원 프로그래머들을 투입하고 있지만 핵심사업을 진행시키기엔 한계가 있는 법. “도아랑씨로 만족해 겠네.” 실웃음을 살랑거리며 도아랑씨에게 눈길을 건네는 공태만씨. 하지만 도아랑씨는 입을 꼭 다문 채 클릭하는 손을 더욱 재게 놀린다.
머쓱해진 공태만씨는 담배를 꺼내들고 남궁용씨에게 시가콜을 보낸다.
도아랑 눈물이 마른 이유 ‘MOVIE MOON.’ 낯선 간판이 도아랑씨 상념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이내 그의 의식은 그 단어를 끌어들여 해체하기 시작한다.
도아랑씨는 몽유병 환자처럼 유유히 그 카페 입구에 몸을 밀어넣는다.
그의 동공은 3류극장의 건조한 스크린이 된다.
스크린이 뿜어내는 주인공은 둘, 테이블에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꼭 둘씩만 앉아 있다.
도아랑씨도 빈 의자를 치면 역시 둘이다.
맥주 거품이 개구리 알처럼 이물스럽다.
도아랑씨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아니,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른다.
다만 붓을 꺾어버린 직후라고 추측할 뿐이다.
매사에 당차고 도전적인 도아랑씨가 처음으로 처연한 절망에 휩싸인 건 ‘그림’ 때문이다.
그가 그림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유는 결정적으로 경제 사정 때문이지만, 시력 탓도 있었다.
어렸을 때 홍역을 심하게 앓은 탓인지 학창시절에도 눈 때문에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색조감각을 최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환쟁이에게는 치명타일 수 있다.
그런 도아랑씨가 선택한 프로그래머 역시 눈을 혹사하기는 마찬가지. ‘미술대전 출품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해마다 이맘 때면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불현듯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도아랑씨는 올 봄부터 그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다시 붓을 잡았다.
어머니에게 ‘독한 년’ 소리를 들으면서도 밤마다 이를 악다물며 조금씩 그려나갔다.
그러나 몇달 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단 몇초 만에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
단순히 물리적인 눈의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 감식안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사실을 자각하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히려 담담했다.
찜찜했던 무언가가 확 뚫린 기분이었다.
도아랑씨는 이렇게 뜻깊은 순간에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힘든 노역을 끝낸 뒤의 질펀한 뒤풀이인 눈물이. 그는 카페를 나오면서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아랑아, 뭐하느라고 이제 들어오니? 김장하는데 돕지 않고….” 도아랑씨는 생긋 웃으며 팔을 걷어붙인다.
“엄마, 내가 마늘 빻고 양파 깔게…. 근데, 눈이 왜 이렇게 맵지? 눈물이 다 나네.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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