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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감원, 생산성 향상 보증수표인가?
[특집]감원, 생산성 향상 보증수표인가?
  • 이미경 기자
  • 승인 2001.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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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동기·사기 하락 두드러져… 전문가들 “감량경영 한계 드러낼 것” 지적
1991년 8월 울산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출근을 앞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통근버스가 끊겼다는 소식과 함께 회사측에서 날아온 공식휴무 통보를 받았다.
울산 시내가 물에 잠긴 터라 회사는 나중 일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에 제집 지키기도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현대차 울산공장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길을 헤치고 버스도 안 다니는 길을 걸어 회사에 도착한 노동자 수는 1만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당시 출고돼 있던 3만대의 자동차를 물바다에서 건져내 언덕 위로 끌어올렸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자동차가 못쓰게 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 덕택에, 이때 건진 3만대의 자동차 중 90% 이상이 온전히 ‘목숨’을 부지해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만약 울산이 물에 잠긴다면 현대차 노동자들은 또다시 물길을 열고 회사로 달려갈 것인가. 의장3부에서 일하는 백창근씨는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98년 IMF 사태로 인해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회사측이 단행한 대규모 감원은 단순한 서류상의 숫자가 아니었다.
98년의 ‘노란봉투’는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슴에 생채기로 남아 두고두고 그들을 힘들게 했다.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해고통지서를 받아든 사람들은 자신을 감원대상으로 만든 반장들에게 화가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경기가 나아지고 일손이 달리자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중 일부가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때 느낀 배신감은 아직도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노조 관계자는 “회사측이 다시는 대규모 감원이 없을 거라면서 상여금을 올려주고 대규모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신경을 썼지만, 예전처럼 ‘한가족’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생존자 신드롬’ 파문 확산 눈앞에 닥친 부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업의 대규모 감원은 엄청난 후유증을 낳는다.
‘일단 살고보자’는 생각에 인건비를 줄이고 남은 사람들을 독려해 위기를 피할 수는 있겠지만, 감원대상에서 제외돼 어렵사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생존자 신드롬’(Survivor Syndrome)이라는 말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일찌감치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영국에서는 다운사이징과 감원이 보편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운사이징 효과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고, 그 원인이 ‘생존자 신드롬’으로 인한 생산성 하락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잇따라 나왔다.
생존자 신드롬은 감원 한파를 피해 조직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상으로, 화가 나고 침울하며 일상적인 공포를 느끼고 조직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에 다운사이징을 경험했던, 500명 이상 사업장의 인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생존자’들은 스트레스가 크게 증가하고 성취동기와 충성심, 신뢰감이 낮아졌으며 안정감은 0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도 감원과 생산성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계속돼왔다.
미국 경영협회(AMA)가 1994년부터 95년까지 미국 기업들의 인력감축과 생산성과의 관계를 조사한 내용을 보면, 감원 경험이 있는 기업 중 생산성 향상 효과를 본 기업은 34%에 불과했다.
또 조사에 응한 경영진 중 74%가 종업원들의 사기와 신뢰, 생산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존자 신드롬이나 그것이 기업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의 최종태 교수는 “감원 중심의 구조조정이 단기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효과가 있겠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긴장과 협박’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조만한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남다르고 ‘정’과 ‘신바람’이 작업장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생존자 신드롬은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이름을 붙여 “나는 OO맨, OO기업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국 노동자들이 “나는 재단사, 나는 배관공”이라는 직업 중심의 정체성을 가진 서구 노동자들에 비해 ‘감원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해고는 유연하고 고용은 경직된’ 국내 노동시장에서 재취업률이 10%도 안 되는 한국의 중·장년층들에겐 고용불안에 따른 스트레스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재취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의 해고통보는 개인의 파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0년대 GM의 실패와 교훈 한국사회에서 ‘구조조정’은 ‘감원’의 또다른 이름이다.
최근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삼성경제연구소 이종년 기획실장은 이런 사회적 인식이 뿌리내리게 된 까닭이 “그간의 구조조정이 감량경영을 위주로 한 급한 불 끄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0%니 40%니 하는 계수에 얽매여 무조건 감원부터 하는 기업들이 많았어요. 앞으로 어떤 산업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 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결국 실패합니다.
” 감원 위주로 구조조정을 하면, 위기 속에서 새로운 사업을 도모해야 할 때 기업의 위기를 감지한 유능한 인재들이 먼저 유출되는 일 등 수많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김종년 실장은 80년대 일본차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제너럴모터스(GM)가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던 사례를 들어 국내 현실을 꼬집었다.
“가혹하리만치 사람들을 잘랐는데, 일시적인 1인당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서비스 질의 하락과 제품 이미지 악화로 점유율이 대폭 하락했죠.” 현재 GM이 직원들에게 목표실적을 달성하면 아무도 해고하지 않는 ‘조건부 고용보장’ 제도나 해고된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워크아웃스테이션’과 같은 ‘보상시스템’을 마련하게 된 것도 80년대의 경험에서 얻은 작은 교훈인 셈이다.
‘생존자 신드롬’을 개인 정서의 문제로만 이해한다면 GM의 쓰라린 경험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될 수 있다.
인터뷰 |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이수봉 소장 “고용은 최고의 복지”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는 지난 98년 IMF 사태로 급격히 증가한 실업자 문제를 노동자 입장에서 풀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현재 감원 위주의 기업 구조조정과 정부 실업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장기실업자와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수봉(40)소장은 2년 전부터 고용안정센터 소장으로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중인 구조조정의 문제점은. =노동자가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인식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다. ‘신바람’이 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한국 노동시장의 특성, 잠재적 생산성이랄까, 그런 것들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회사측과 노동자가 함께 풀어야 생산적인 구조조정이 가능하다.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나. =세계에서 가장 유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고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나. 문제는 해고는 유연한데 고용은 전혀 유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40대 이상은 정말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이 있는 것 아닌가. =고용은 최고의 복지다.(웃음) 정부는 지금의 실업을 경기침체에 따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실업은 구조적인 것이고 장기화될 것이다. 그러니 공공근로나 실업수당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노동자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필요한 노동력으로 변신하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면서 교육의 기회를 정부도 기업도 보장하지 않는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끝도 없이 늘어날 것이다. 이들이 빈민층을 형성하고, 결국 국가 전체의 생산성은 더 떨어질 것이다. 좀더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주5일 근무제 논란이 한창인데, 민주노총 분위기는. =고용을 창출하는 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임금삭감 없는 주5일 근무제가 돼야 한다. 노동자들의 여가시간이 많아지면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재계와 전체 휴일수에 대한 견해차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융통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부에서도 논의중이다. 이미경 기자 friendlee@dot21.co.kr
인터뷰 |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 본부장 “정리해고는 필요악”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44) 본부장은 “구조조정이 사람을 자르는 것 위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면서도 “늘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현대사회에서 정리해고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인력감축을 한다고 발표하면 주가가 상승하지만 국내에서는 오히려 주가가 떨어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사관계가 시끄러운 것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감원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노조에서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파업으로 연결돼 기업에 손해를 끼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급속히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업은 계속 사업부문을 바꿀 수밖에 없다. 인력 재배치는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물론 최대한 회피노력을 해야 하지만 정리해고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감원 위주로만 구조조정을 해온 측면이 많다. =보이는 현상이 그런 것이다.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할 경우 우선 광고비를 줄이고 다음으로 교육훈련비를 줄인다. 그리고 연구개발비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이것은 모두 감원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감원을 피하는 것이 아닌 정리해고를 진행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노사간의 불신이 있어서다. -한국은 선진국과는 다른 복지구조를 갖기 때문에 정리해고가 곧 개인에 대한 사형선고로 이어진다. 노조의 반발은 당연하지 않은가. =인정한다. 국내에서는 전직훈련도 부족하고 정리해고된 사람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다. 정부에서는 실업급여만 줄 것이 아니라 직업알선도 더 열심히 하고 능력개발 사업도 벌여야 한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감원을 피할수 있지 않나. =기업에서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임금이 깎이기 때문에 6개월 정도만 지나면 오히려 정리해고를 하라고 말할 정도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제도다. -국내 노동시장이 이제 많이 유연화되지 않았나. =절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한국은 두번째로 경직된 나라다. 정규직에 대한 경직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경총은 구조조정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요즘은 상시적인 구조조정 체계를 갖춰야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사람이 아닌 사업 위주로 진행돼야 한다. 인력 해고는 가장 나중에 이뤄져야 한다. 사람자르는 것을 구조조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 분야에 있는 사람을 전환배치하는 것에 대해서 노조가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임채훈 기자 choonlim@dot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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