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울산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출근을 앞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통근버스가 끊겼다는 소식과 함께 회사측에서 날아온 공식휴무 통보를 받았다.
울산 시내가 물에 잠긴 터라 회사는 나중 일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에 제집 지키기도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현대차 울산공장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길을 헤치고 버스도 안 다니는 길을 걸어 회사에 도착한 노동자 수는 1만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당시 출고돼 있던 3만대의 자동차를 물바다에서 건져내 언덕 위로 끌어올렸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자동차가 못쓰게 되는 건 참을 수 없다”고 여긴 노동자들 덕택에, 이때 건진 3만대의 자동차 중 90% 이상이 온전히 ‘목숨’을 부지해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만약 울산이 물에 잠긴다면 현대차 노동자들은 또다시 물길을 열고 회사로 달려갈 것인가. 의장3부에서 일하는 백창근씨는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98년 IMF 사태로 인해 자동차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회사측이 단행한 대규모 감원은 단순한 서류상의 숫자가 아니었다.
98년의 ‘노란봉투’는 현대차 노동자들의 가슴에 생채기로 남아 두고두고 그들을 힘들게 했다.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해고통지서를 받아든 사람들은 자신을 감원대상으로 만든 반장들에게 화가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
경기가 나아지고 일손이 달리자 정리해고자와 무급휴직자 중 일부가 회사로 돌아왔지만, 그때 느낀 배신감은 아직도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노조 관계자는 “회사측이 다시는 대규모 감원이 없을 거라면서 상여금을 올려주고 대규모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신경을 썼지만, 예전처럼 ‘한가족’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생존자 신드롬’ 파문 확산 눈앞에 닥친 부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업의 대규모 감원은 엄청난 후유증을 낳는다.
‘일단 살고보자’는 생각에 인건비를 줄이고 남은 사람들을 독려해 위기를 피할 수는 있겠지만, 감원대상에서 제외돼 어렵사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생존자 신드롬’(Survivor Syndrome)이라는 말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일찌감치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영국에서는 다운사이징과 감원이 보편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운사이징 효과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고, 그 원인이 ‘생존자 신드롬’으로 인한 생산성 하락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잇따라 나왔다.
생존자 신드롬은 감원 한파를 피해 조직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상으로, 화가 나고 침울하며 일상적인 공포를 느끼고 조직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에 다운사이징을 경험했던, 500명 이상 사업장의 인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생존자’들은 스트레스가 크게 증가하고 성취동기와 충성심, 신뢰감이 낮아졌으며 안정감은 0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도 감원과 생산성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계속돼왔다.
미국 경영협회(AMA)가 1994년부터 95년까지 미국 기업들의 인력감축과 생산성과의 관계를 조사한 내용을 보면, 감원 경험이 있는 기업 중 생산성 향상 효과를 본 기업은 34%에 불과했다.
또 조사에 응한 경영진 중 74%가 종업원들의 사기와 신뢰, 생산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존자 신드롬이나 그것이 기업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의 최종태 교수는 “감원 중심의 구조조정이 단기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효과가 있겠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긴장과 협박’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조만한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남다르고 ‘정’과 ‘신바람’이 작업장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생존자 신드롬은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이름을 붙여 “나는 OO맨, OO기업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국 노동자들이 “나는 재단사, 나는 배관공”이라는 직업 중심의 정체성을 가진 서구 노동자들에 비해 ‘감원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해고는 유연하고 고용은 경직된’ 국내 노동시장에서 재취업률이 10%도 안 되는 한국의 중·장년층들에겐 고용불안에 따른 스트레스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재취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의 해고통보는 개인의 파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0년대 GM의 실패와 교훈 한국사회에서 ‘구조조정’은 ‘감원’의 또다른 이름이다.
최근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삼성경제연구소 이종년 기획실장은 이런 사회적 인식이 뿌리내리게 된 까닭이 “그간의 구조조정이 감량경영을 위주로 한 급한 불 끄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0%니 40%니 하는 계수에 얽매여 무조건 감원부터 하는 기업들이 많았어요. 앞으로 어떤 산업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 없이 진행되는 구조조정은 결국 실패합니다.
” 감원 위주로 구조조정을 하면, 위기 속에서 새로운 사업을 도모해야 할 때 기업의 위기를 감지한 유능한 인재들이 먼저 유출되는 일 등 수많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김종년 실장은 80년대 일본차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제너럴모터스(GM)가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던 사례를 들어 국내 현실을 꼬집었다.
“가혹하리만치 사람들을 잘랐는데, 일시적인 1인당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서비스 질의 하락과 제품 이미지 악화로 점유율이 대폭 하락했죠.” 현재 GM이 직원들에게 목표실적을 달성하면 아무도 해고하지 않는 ‘조건부 고용보장’ 제도나 해고된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워크아웃스테이션’과 같은 ‘보상시스템’을 마련하게 된 것도 80년대의 경험에서 얻은 작은 교훈인 셈이다.
‘생존자 신드롬’을 개인 정서의 문제로만 이해한다면 GM의 쓰라린 경험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재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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