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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진국형 사회보장제도 절실
1. 선진국형 사회보장제도 절실
  • 조준상 <한겨레> 경제부 기
  • 승인 200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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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해고땐 ‘노동 빈민’ 전락… 노동쟁의 생존권 투쟁으로 치달아
지난 7월 제노바 정상회담에서 서방 선진 7개국(G7)과 러시아 정상들이 경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기초경제여건(펀더멘털)이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빨리 둔화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는 것이었다.
G7은 이번에도 “펀더멘털이 건전하다”는 표현을 포함시켰다.


미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감원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시아 금융위기가 임박했던 1997년 여름에도, 아마존닷컴의 주가가 솟구치며 세계 최대 다국적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보다 기업가치가 높게 평가될 만큼 주식시장에 거품이 일어났던 99년에도 G7은 세계 경제의 펀더멘털은 건전하다고 밝혔다.


펀더멘털이 건전하다는 것과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감원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영국의 진보지 <가디언>은 지난 7월23일치에서 이 ‘신비한 표현’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G7 정상들의 말은 ‘펀더멘털, 특히 이윤을 늘리기 위해 노동자를 감원한다’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침체에 따라 감원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6월 11만4천개를 비롯해 올해 2분기에만 27만1천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는 91년 불황 이후 최대 규모다.
올해 들어 이미 1만9천여명을 해고한 미국 광통신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스를 비롯해 캐나다의 노텔네트웍스 등 세계의 주요 정보·통신·반도체 기업들은 7월24일과 26일 모두 4만명 규모의 직원 해고계획을 추가로 발표했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는 2003년까지 9500명을 줄일 계획으로, 8월1일부터 조기퇴직 희망자를 받기 시작했다.
앞서 7월에는 이스즈자동차가 희망퇴직으로 740명을 회사 밖으로 내보냈고, 마쓰다자동차는 3월에 2210명으로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 절차를 거쳐 감원을 실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치상으로는 아직까지 실업의 몸살을 덜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발표한 6월 실업률은 IMF 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3.3%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적어 구직을 포기한 사람이 크게 늘어나 비경제활동인구가 확대된 때문이다.
15살 이상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취업자와 실업자를 뺀 비경제활동인구는 6월에 1397만3천명으로 전달보다 9만9천명이나 증가했다.
하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 신용평가 회사들은 구조조정 등으로 한국에서 연내에 적어도 20만명의 실업자가 추가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부실기업을 하루속히 퇴출시켜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합의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같은 실업자 증가 예상은 곧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97년 IMF 사태 이후 강화됐다고는 하지만, 사회안전망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안전망이 정작 보호받아야 할 계층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최대 780만명으로 추정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국민연금·고용보험·의료보험·산업재해보상보험 등 4대 사회보험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중앙대 김연명 교수(사회복지학)는 “정확한 실태조사 자료가 없기는 하지만 단편적인 연구들을 종합하면 최소한 비정규직의 50~70%가 4대 사회보험에서 제외돼 있다”고 지적한다.
임금 수준이 낮아 저축할 여력도 없는 비정규직들은 노동능력을 잃기라도 하면 비참한 ‘노동빈민’으로 전락할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선진국과 달리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연대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노사관계가 절박한 생존권 투쟁 양상을 보이는 우리나라 실정은 결국 사회보험으로부터 배제되는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라는 게 노동계의 중론이다.
노동계에서도 780만명이나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노동계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계속 요구하는 이유는, 사용자가 정규직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비정규직을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박영삼 정책기획국장은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기업과 사회에서 누리던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며 “노동계가 구조조정을 정리해고와 등치시키고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근본 배경에는 사회안전망의 부실이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해고가 노동자에게 주는 생존상의 부담이 더 크다는 얘기다.
부실기업 퇴출과 내수 진작 ‘충돌’ 네덜란드는 우리나라 정부와 사용자쪽에서 노동시장이 유연한 사례로 꼽는 대표적인 나라다.
이 나라의 비정규직 비중은 약 4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스페인과 우리나라를 빼고는 이 비중이 높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네덜란드 노동계를 방문했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소장은 “네덜란드의 유연한 노동시장 뒤에는 잘 짜여진 사회안전망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사회안전망에 포괄돼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심각한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선진국에서 해고를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이런 보편적인 사회안전망이 구축돼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선진국의 비정규직 문제 해결책이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비정규직 보호’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근본적으로는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사회보험 가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한적 경기부양과 구조조정의 가속화도 쉽게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98년 3분기부터 지난해 3분기까지 성장률이 10% 안팎으로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체감하지 못한 것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작은 정보기술(IT)과 반도체 산업이 성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며 “마찬가지로 현재의 경기둔화에도 이 분야 산업의 침체가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소비의 감소폭이 성장률 둔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수가 그럭저럭 버티고 있어 체감경기가 수치로 드러나는 성장률 감소폭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얘기다.
문제는 사회안전망 확대가 지지부진한 속에서 구조조정을 가속화하면 내수경기도 급속히 냉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경기부양에 나선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수출이 둔화하는 가운데 국내 소비심리마저 얼어붙을 경우 재정정책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노동계와 사회복지학계 일각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투입의 방향에 서비스업과 사회간접자본 투자, 그리고 비정규직으로의 사회안전망 확대가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안전망의 확대야말로 정부가 말하는 구조조정과 경기부양의 동시 추진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얘기다.
일본의 경험에 비춰보면, 지난 10여년 동안 구조개혁을 다그치려고 하면 저축률이 높아지고 소비가 둔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미래의 고용과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불안이 현재의 소비를 강하게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고이즈미 총리가 내놓은 우정사업, 공공법인, 국립대 민영화와 악성 부실채권 12조엔 조기정리 등 강력한 구조개혁 정책이 일본의 경기침체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 역시 IMF 체제 이후 정부가 부실기업 퇴출 등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면 국내소비가 둔화하는 양상이 되풀이됐다.
이런 점에서 소비심리의 위축은 구조조정·구조개혁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꼭 해야 할 부실기업의 퇴출과 함께 내수시장도 유지해야 할 우리에게 “(구조조정을 열심히 하면)세계경제의 펀더멘털은 건전하다”는 G7의 성명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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