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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로벌 기업 한국지사 ‘뒤숭숭’
2. 글로벌 기업 한국지사 ‘뒤숭숭’
  • 유춘희 기자
  • 승인 200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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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대규모 구조조정 여파… “아직은 잠잠” 낙관론 속 결과 주목
한때 지칠 줄 모르는 근력으로 세계 경제성장의 원동력 구실을 했던 정보기술(IT) 산업이 지금은 침체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IT기업들은 경기둔화와 주가폭락에 신음하던 끝에 감원이라는 구조조정 카드를 잇따라 꺼내들고 있다.
‘사람 자르기’를 통해 비용절감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내로라는 기업들이 너도나도 경쟁이라도 하듯 감원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것은 IT 경기의 침체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파산설에 휩싸이기도 했던 루슨트테크놀로지스는 2만명 규모의 감원계획을 발표한 지 석달 만에 1만6천명의 추가 감원계획까지 발표했고, 15년 만에 처음으로 1분기 영업손실을 기록한 모토로라는 모든 직원의 15%인 2만2천여명을 감원하기로 했다.
시스코시스템스는 나스닥 상장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내더니, 창업 이래 처음으로 8500명을 감원한다고 밝혔다.
캐나다 IT기업의 대표격인 노텔네트웍스는 애초 1만명이라고 발표했던 감원규모를 2배로 늘려잡았다.

감원의 열풍은 북미 기업들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프랑스 알카텔, 이탈리아 마르코니, 스웨덴 에릭슨, 핀란드 노키아, 독일 지멘스 등 유럽 각국의 대표급 통신장비 업체들은 물론,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과 케이블앤드와이어리스(C&W), 미국의 월드콤그룹과 AOL타임워너, 일본의 NTT 등 주요 통신서비스 업체도 마찬가지다.
hp, 델컴퓨터, 컴팩컴퓨터, 썬마이크로시스템스 같은 컴퓨터 기업들도 감원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하면 마치 IT 업계에서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영향권 든다 해도 ‘조족지혈’ 수준 이들 다국적 IT기업의 한국법인 직원들도 당연히 감원의 풍문에 휩싸여 있다.
헤드헌터들은 이들의 요즘 분위기를 민감하게 느낀다.
드림서치의 정시돈 부사장은 “이제까지 인력충원 요청은 대부분 다국적 IT기업들로부터 들어왔고, 우리 회사의 사업 타깃도 거기였다.
그런데 최근엔 구인요청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오히려 상황이 역전됐다.
“좋은 자리를 권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다국적 IT기업 임직원들이 이제는 먼저 연락을 해온다”는 것이다.
그는 “연락해오는 이들은 대부분 감원을 발표한 기업의 직원들”이라고 귀띔한다.
본사에서 분기마다 발표되는 매출과 수익 실적이 부진해지자 몸을 움츠리던 이들에게 숫자까지 박힌 감원 방침이 전해지면 가슴이 졸아들 수밖에 없다.
“어디든 예외가 아닐 것”이라면서,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눈치다.
그러나 감원의 바람이 자기만은 피해가기를 기대하며, 본사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감원계획을 발표한 것으로 외신이 전한 다국적 IT기업의 한국지사들을 가보면 의외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하다.
3Com처럼 이미 감원을 단행한 업체도 있지만,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는 업체도 있다.
외국계 IT기업 대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지사의 감원계획은 아직 잡혀 있지 않으며, 직원들의 이동도 없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곳이 시스코시스템스 코리아. 인터넷 시대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이 회사도 미국 본사에서 감원에 들어갔지만 한국지사에는 미동도 없다.
지난 두세달 사이에 10여명이 자발적으로 퇴직한 것 외에는, 현재 320명인 직원 수를 더 줄일 계획이 없다고 한다.
다만 신규 인력채용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시스코시스템스 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홍성원 사장이 회장에 선임되고, 매출목표 달성을 위해 지난해 hp에서 영입된 김윤 부사장이 사장이 되어 영업을 총괄하기로 하는 선에서 구조조정을 끝냈다”고 말했다.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중인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경우도 한국에서는 별다른 감원계획이 드러난 게 없다.
루슨트테크놀로지스는 경기침체가 예상 밖으로 길어지자, 그동안 세차례나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고 최고경영자(CEO)까지 갈아치웠다.
그러나 한국지사인 한국루슨트에는 아직 영향이 없다.
이 회사 박미경 이사는 “두차례는 그냥 지나갔고, 최근 발표된 세번째 구조조정 조처와 관련해서도 감원을 포함한 어떤 통보도 아직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단정할 순 없지만 감원을 한다 해도 그 수는 많지 않을 것이고, 연평균 자연감소 인원만큼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 선이 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이 회사 임직원은 현재 300명선이다.
노텔네트웍스의 한국지사인 노텔네트웍스 코리아도 잠잠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본사로부터 어떤 감원 통보도 받지 않았고, 직원들은 본사의 움직임에 개의치 않고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변인인 김희수 차장은 “앞으로도 감원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진 못하지만, 감원 바람의 영향권에 든다 해도 ‘조족지혈’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연초에 세웠던 인력충원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됐다”고 밝혔다.
애초 150명으로 늘리려던 인력 총원을 현재의 120명 수준에서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경기침체의 와중에서 오히려 인력을 늘리는 기업도 있다.
프랑스 알카텔의 한국지사인 알카텔코리아는 현재 80여명인 인력을 연말까지 100명으로 늘릴 계획이고, 이탈리아 마르코니의 한국지사인 한국마르코니도 현재 23명의 인력을 30명쯤으로 늘릴 방침이다.
한국마르코니 관계자는 “한국의 네트워크와 통신장비 시장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본사에 충분히 알린 게 주효했다”고 전한다.
생산직 위주 감원에 기대 본사에서 구조조정이 진행중인 다국적 IT기업의 한국법인 직원들은 이처럼 “아직은…” 또는 “장담할 순 없지만…”이란 단서를 달면서도, 앞으로도 별다른 영향이 밀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무슨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이들은 우선 본사에서 발표한 감원은 그 대부분이 생산인력쪽에 치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에 걸친 IT 불황은 근본적으로 공급과잉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구조조정도 생산라인 축소 등 생산쪽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그동안의 감원도 생산직과 비정규직에 집중돼왔다고 말한다.
모토로라 정도를 제외하고는, 다국적 IT기업의 한국지사 대부분이 영업·판매조직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더 줄일래야 줄일 형편도 못된다는 설명이다.
또 시스코나 루슨트 같은 유명 기업의 한국지사 인력은 많아야 300명 정도인데, 거기서 몇십명 줄여봐야 얼마나 효과가 있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본사가 글로벌 경영전략 차원에서 추하고 있는 구조조정의 결과에 단지 미미한 영향만을 주는 정도라면, 직원의 사기나 조직안정 차원에서 손대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또 한국의 통신시장이 지난 3~4년 사이에 급성장하면서 본사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을 이번에 보상해주지 않겠냐는 기대도 한다.
그리고 감원작업 중 상당부분이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이들 다국적 IT기업 한국지사 직원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글로벌 기업들이 감원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고 노동법 규정도 까다로운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보다 감원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노동시장도 유연한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직원들을 해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루슨트나 알카텔, 노키아 등은 전체 감원대상의 50~70%를 미국 노동자로 잡았다고 전해진다.
다국적 IT기업들이 감원을 시도할 때는 대부분 ERP(조기퇴직 프로그램)를 적용한다.
우선 퇴직희망자를 접수한 뒤 회사가 정한 규칙대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위로금은 근무연수에 따라 제조업체의 경우는 보통 3~6개월 정도, 금융·서비스 업체들은 1년치 연봉을 준다.
지사쪽도 ERP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이에 편승해,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을 자연스럽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ERP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정리되어서는 안 될 중요 인력이 두툼한 위로금을 받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른 회사로 옮기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직원들은 본사의 감원 프로그램을 오히려 고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라면 회사의 감원정책은 부작용을 낳거나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인사관리 컨설턴트인 이기대씨는 “외국기업의 정서에 익숙한 사람의 풀이 넓지 않기 때문에 유능한 해직자는 불황 때에도 6개월 안에 전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매출에 도움을 주는 영업인력이 대부분인 한국지사에서 ERP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사도 알기 때문에 칼을 크게 휘두르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적인 감원 열풍에도 한국 현지법인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98년 초에 한차례 한국을 휩쓸었던 감원태풍 때는 다국적 IT기업 한국지사들이 스스로 ‘알아서 긴’ 측면이 강했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본사는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을 감안해주었으나, 위기를 느낀 지사들이 오히려 나서서 자구책으로 직원 수를 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계적 불황으로 본사마저 존립의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그리고 지사들이 아직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과연 앞으로도 해고가 없을 것임을 뜻하는 것인지는 시간이 더 지나봐야 안다.
본사의 지시가 내려올 수도 있다.
천국과 지옥 오가는 ‘해고 관행’
지난해 가을 세계적 네트워킹 업체인 노벨이 돌연 한국지사를 철수했다.
노벨은 91년에 한국에 지사를 설립해 ‘네트웨어’라는 제품으로 기업들의 PC를 묶어 정보를 공유하는 LAN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기가 막힌 것은, 갑자기 방한한 아태지역 인사담당 매니저가 평시와 다름없이 출근한 직원들에게 짐을 싸라는 식으로 지사 철수가 이뤄진 점이었다.
현지법인에 대한 인식의 수준과 철수 결정의 자초지종을 물을 수도 없었다.
설명도 없이 이뤄지는 외국기업들의 일방적인 고용해지 관행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였다.
당시 노벨은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세계 인력 중 900명을 줄인다고 밝혔지만, 한국노벨의 상황은 다른 지역 지사들과는 달랐다.
전년도보다 매출을 배나 늘려가던 중이었고, 폭넓게 깔려 있는 기존 고객에 대한 지원에도 각별히 신경 써오던 터였다.
10년 동안 매출이 떨어진 적도, 적자를 낸 적도 없었다.
게다가 해고 직원에 대한 대우도 치욕적이었다.
해고 통보와 함께 노트북 같은 개인 사물을 곧바로 접수해 가져갔고, 위로금이라고는 관례와 달리 연봉의 12분의 1을 준 게 다였다.
평균 근속연수 5년이 넘는 20여명의 직원들은 대부분 외국계 기업이나 벤처기업으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이와 반대로 역시 선진 기업답다고 칭찬 듣는 회사도 있다.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핀란드 노키아는 최근 한국지사의 연구인력을 감축하면서 깔끔하게 뒷처리를 해 오히려 칭찬을 들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세웠던 연구개발센터를 없애기로 하고 80여명의 인력을 정리했다.
그러나 ‘좋은 해고 관행’은 당사자들로부터 어떤 불만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챙겨줬기 때문이다.
노키아는 한 헤드헌팅 업체에 정리대상 직원의 전직 알선을 의뢰했다.
또 그들이 재취업할 때까지 생활보조비를 지급했고, 전직에 드는 비용을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
해외로 이직을 원하는 연구원들에겐 노키아 현지법인을 통해 알아봐주는 성의를 보였고, 해외에 정착할 경우에는 재정지원도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전체 80명 중 35명이 해외법인 연구소에 재배치됐고, 나머지 45명은 국내 업체에 전원 재취업됐다.
뒷일은 책임지지 않고 일방적 정리해고를 단행한 노벨과, 해고한 직원의 재취업을 최대한 지원해준 노키아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점에서 크게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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