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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시트콤] 슬픈 자화상
[건강시트콤] 슬픈 자화상
  • 이우석(자유기고가)
  • 승인 2000.12.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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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어. 하는 수 없지 뭐.” 수화기를 내려놓는 공태만씨 등 뒤로 비치는 황혼녘의 햇살이 혼탁한 필터를 거친 것처럼 비실비실하다.
어느 곳도 제대로 쪼이지 못한 채 퍼질러버리고 마는. 공태만씨 어깨에 묻은 어둠이 깊어 보인다.
그는 항상 자신을 쿨하게 가꾸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진정한 포커페이스는 무표정이 아니라 웃음을 흘리는 것이라고. 그 웃음 속에 페이소스를 담을 수 있는 깊이를 지녀야 한다고 농담처럼 실실거리며 술잔을 털어넣던 그.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런 그의 얼굴에 묵연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아무래도 어제 선을 본 뒤부터 그런 것같다고 추측해보는 남궁용씨. 익살스럽게 도아랑씨와 몸짓언어를 나누며 공태만씨 심기를 건드린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는 정말 쿨한 남자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어제 공태만씨는 선을 보지 않았다.
다만 그가 호들갑스럽게 선보는 시늉을 한 이유는 좀더 그럴듯한 알리바이로 자신마저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와 초등학교 동창들의 강도 높은 압력이 한몫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일 순 없었다.
의도한 행동이 겉으로 드러나는 실익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곧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스포르닷컴 개발팀에서는 지금 캐릭터 작업이 한창이다.
다른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캐릭터 서비스와는 확실히 다른 구성이다.
이목구비와 신체 몇부분을 몽타주 형식으로 조합해 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실제 회원들 사진을 데코레이팅하여 캐릭터를 창조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회원들이 사진과 신체 정보를 입력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구성하여 제공하는 프로그램. 작은 것에서 차별을 꾀하는 스포르닷컴 전략이 과연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만약 이 프로그램을 실현하기만 하면 여러 아이템과 연결해 독특한 솔루션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곧 오픈할 예정인 실시간 미팅코너 ‘스포와 포르의 만남’에 활용할 수 있고, 제휴한 휘트니스클럽에 가입한 회원의 캐릭터에 건강지수를 부여해 사이버상에서 운동처방사에게 상담은 물론 개인별 트레이닝법을 교육받을 수 있다.
그 밖에도 활용폭은 넓다.
기획 예정인 ‘The second i’에서 실시간 온라인으로 스포르마을에 입주하여 머드게임보다 발전된 형태의 생생한 일상을 재현할 수 있다.
점진적으로 쇼핑몰을 이곳으로 옮기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미대 출신인 도아랑씨와 디자이너 남궁용씨를 주축으로 프로그램 DB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스포르닷컴 마스코트도 그 이름과 함께 현재 사내와 온라인에서 상금 500만원을 내걸고 대대적으로 공모하고 있다.
공태만씨 차가 간선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
“부루투스 너마저!” 공태만씨 볼이 실룩거린다.
굳건하게 솔로로 남아 세계평화(?)에 이바지하자던 그 친구가 결국은 도둑장가를 들게 된 것이다.
오늘 만나서 배신에 대한 응징을 하려 했건만 장모님 호출이란다.
씁쓸한 웃음이 칼날에 서리는 한줄기 빛처럼 얼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하필이면 이럴 때 눈이 내린담.” 얄궂게도 첫눈이 내린다.
차 앞유리창에 빨려들 듯 달려드는 눈발이 묘한 상념에 빠지게 한다.
그는 단지 ‘솔로’라는 데서 오는 통속적 외로움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이미 20대에 다 소진했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가슴에 먼지처럼 풀풀 피어오르는 이 소외감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공태만씨는 유체이탈을 꿈꾼다.
일상은 유지하면서 자아는 떠나 있는. 공태만씨는 욕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주술행위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표정이다.
그는 이내 자신과 모종의 타협을 한다.
세상에 대해 자신을 거짓 진술하기. 당분간만이라도 자신을 스스로 낯설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공태만씨. 월요일 아침. 언제나 그렇듯이 도로 위의 차들은 매연을 뿜어내며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지만 이동수단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스포르닷컴 개발팀. 아침 회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경. 공태만씨 자리가 비어 있다.
한재능 팀장 양미간이 미세하게 떨린다.
“헉!!!” 언제나 반복되는 이 장면에 테러를 가하는 긴급사태가 발생하고야 만다.
한재능 팀장과 도아랑씨, 남궁용씨 얼굴은 영화 <스크림>에서 살인자가 쓰는 가면의 형상을 닮아 있다.
성글성글한 노란머리, 금제 귀걸이, 선글라스, 퉁퉁 부은 얼굴과 목 부위를 감고 있는 코르셋, 몸에 착 붙는 비닐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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