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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脈] 벤처 이데올로기를 꿈꾸며
[디지털脈] 벤처 이데올로기를 꿈꾸며
  • IT팀 김상범 기자
  • 승인 2001.08.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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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흑백 모니터 PC가 훗날 세상을 이렇게까지 바꿔놓을 줄 몰랐다.
” PC 개발에 참여했던 IBM의 한 엔지니어가 고백한 말이다.
IBM이 ‘IBM 5150 퍼스널 컴퓨터(PC)’을 세상에 내놓은 지 이제 꼭 20년이 됐다.
책상에 올려놓고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호환성’을 앞세워 등장한 IBM의 작은 기계 한대가 지금 PC의 효시다.
PC는 그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지금 누구나 얘기하는 디지털 세상은 분명 PC의 탄생에서 비롯한 것이다.
PC가 바꿔놓은 것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무엇일까. 한마디로 ‘벤처’를 꼽고 싶다.
대학 중퇴생 빌 게이츠가 건설한 마이크로소프트 제국의 시작은 허름한 주차장, 그리고 PC 한대였다.
이 식상한 얘기는 이후 좁은 방 안에서 PC를 껴안고 날밤을 새우는 젊은이들의 버팀목이었고 제2, 제3의 빌 게이츠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빌 게이츠를 주적으로 삼고 세계 곳곳에서 젊은 벤처인들이 PC를 부둥켜안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도전에 나서는 젊은이들을 양산해낼 수 있었던 힘, 그 바탕에 PC가 있었고 PC는 결국 세계를 정보사회로 만들어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의 개발자 이찬진, 백신 프로그램 ‘V3’로 시작해 종합 보안회사를 우뚝 세운 안철수, 회원 2500만명의 세계적 포털사이트를 꾸려낸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재웅 등은 모두 PC가 만들어준 도전의 장에 맨몸으로 뛰어든 젊은이들이었다.
가진 것 없어도 머리와 체력만으로 비즈니스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도전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성공의 열쇠를 쥐어주었다는 것, 이것은 PC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세상의 가장 큰 변화였던 셈이다.
지금 IT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대부분의 리더들은 이렇듯 PC 탄생과 함께 20대의 젊음을 헌신했던 초기 벤처인들이다.
이후 인터넷이 가세하면서 IT 열풍은 ‘벤처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대박의 꿈은 거의 모든 젊음을 설레게 했다.
이제 스무돌. 그러나 세상은 야속하게도 PC 탄생을 축복할 여유가 없다.
PC산업은 탄생이후 첫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인터넷을 포함해 전 IT산업이 사상 최악의 시련을 맞았다.
PC가 열었던 IT 시대의 침체는 결국 벤처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던 인터넷 벤처는 마치 모든 환란의 주범인 양 뭇매에 시달리고 있다.
투명한 거래를 통한 새로운 유통질서 확립이라는 거창한 꿈은 피지도 못한 채 철없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어지럽혀놨다는 화풀이 대상이 돼버렸다.
지금까지 바꿔놓은 것마저 인정을 못하겠다는 험악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런 냉대를 초래한 것은 도전의 목표를 ‘대박의 꿈’에만 집중시켰던 철없는 벤처에 돌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도전의식에는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의욕만 넘쳤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이끌겠다는 혁명의식이 부족했다.
우리나라 벤처는 더 했다.
PC는 기술이 아니라 도구였다.
인터넷 역시 기술이 아니라 도구다.
그러나 벤처는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벤처를 기성 지배층에 진입하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다.
기술만 앞세워 허세만 부렸지 스스로 장인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벤처란 이름을 내세웠을 뿐 약간의 과실에 취해 어서 빨리 벤처를 벗어나자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건전한 거래, 투명한 거래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대박의 꿈을 실현했어야 할 벤처들이, 거꾸로 대박의 꿈에만 빠져 스스로 구악의 비즈니스를 관행이라는 구실로 답습해왔다.
모럴 해저드. 이 말은 ‘벤처인’이란 수식어와 찰떡궁합이 돼버렸다.
진정한 벤처는 구악을 떨치고 대박의 꿈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경기침체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원인을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굴뚝으로 발길을 돌리자는 얘기가 나와서야 되는가. 진짜 벤처들이 나서야 할 때라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산업화를 위해 뛰느라 쇠약해진 아버지들이 위기 돌파의 선봉을 맡는 건 벅찬 일이다.
벤처는 위기를 먹고 산다.
벤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위기요, 위험이다.
다시 시작하자. PC 개발자는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뀔지 몰랐다’고 고백했지만, 그들은 벤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세상을 바꿔놓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PC 탄생 20주년에 벤처 이데올로기의 재탄생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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