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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호모 모빌리우스' 출현
[커버스토리] '호모 모빌리우스' 출현
  • 김윤지
  • 승인 2000.1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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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년 전 ‘남쪽에 사는 원숭이’라는 뜻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한 이래 인류는 도구와 함께 진화해왔다.
550cc밖에 안되는 뇌용량으로 단순한 석기와 짐승뼈를 두 손에 쥔 채 두 발로 어슬렁어슬렁 수백만년을 버텼다.
150만년 전 등장한 호모 에렉투스는 굽은 허리를 서서히 펴고 좀더 인간에 가까워졌다.


그들의 손엔 돌도끼와 불이 있었다.
인류의 진화는 4만~5만년 전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 이후 가속화한다.
그들은 1400cc나 되는 뇌용량을 활용해 돌을 쪼개 도구를 만들었다.
편리를 위해 뭔가를 가공할 수 있었던 그들을 후세인들은 ‘슬기로운 사람들’이라 불렀다.
4만여년 전 좀더 슬기로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이들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돌덩어리를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 사용하고 예술을 즐기며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삶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인류는 20세기 들어 새로운 진화단계를 밟는다.
도구는 더욱 정교해지고, 기술과 생활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0과 1로 이뤄진 정보처리 시스템을 발명하고, 각종 정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지식과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후세 인류학자들은 이들은 이전의 아날로그 인류와 구분해 디지털 인류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모바일’(Mobile)이라 불리는 이동성을 향한 강력한 열망에서 진화의 동력을 찾았다.
22세기 디지털 인류학 교과서에는 이들의 진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호모 피시쿠스(Homo PCcus). 1979년 이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애플’로 불리는 유적지에서 초기 형태의 유물이 발견된다.
학자들은 ‘애플Ⅰ’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곤 한다.
이전에 발견된 유물에 비하면 훨씬 작고 정교하다.
이보다 32년 정도 앞선 ‘애니악’은 덩치가 집채만 해 널리 쓰이지 못하고 금방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애니악은 호모 피시쿠스의 등장을 알리는 유물로 디지털 인류학 교과서에 실린다.
28년 뒤에 나타난 ‘알테어’라는 유물은 무게가 12kg에 불과해 애플Ⅰ에 근접했으나 특수계층에서만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1981년 ‘IBM’이라는 유적지에서 애플Ⅰ과 필적할 만한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돼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IBM PC’라고 이름붙인 이 유물은 ‘MS-DOS’라는 신비한 수학을 기반으로 호모 피시쿠스의 전성기를 열었다.
호모 피시쿠스는 최근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
호모 노트북쿠스(Homo Notebookus). PC를 작게 만들어 들고다닐 생각을 한 혁신적인 인류다.
한때 ‘잃어버린 고리’로 추정됐으나 1980년 ‘오스본’이라는 유적지에서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존재를 드러냈다.
이 유물은 들고다니기에는 다소 커서 과도기 형태로 보인다.
2년 뒤 호모 노트북쿠스의 본격 등장을 알리는 유물이 ‘컴팩’이라는 계곡에서 대거 발견됐다.
256K램으로 명명한 칩과 두개의 저장장치 홈을 가진 이 유물은 훨씬 휴대하기 편해 ‘컴팩 포터블’이란 애칭을 얻었다.
3년 뒤에는 ‘제니스’라는 유적지에서 MS-DOS를 활용한 유물이 발견돼 이들이 호모 피시쿠스의 직계임을 증명했다.
제니스에서 발굴된 인류는 호모 랩톱쿠스(Homo Laptopcus)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호모 피디에이쿠스(Homo PDAcus). 1984년 이후 등장해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사이언’이라는 평야에서 발견된 ‘오거나이저’라는 유물이 이 인류의 탄생을 알리는 유물로 손꼽힌다.
POPL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내장한 오거나이저는 흔히 PDA로 통칭되는 유물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93년 호모 피시쿠스의 탄생을 알린 애플 유적지에서 다양한 색상을 구현하는 PDA가 출토돼 애플이 디지털 인류의 진화에 깊게 관여했다는 주류 학계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3년 뒤 ‘팜컴퓨팅’이라는 유적지에서 ‘팜파일럿’이라고 명명한 PDA가 발견됐다.
이 PDA는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다.
호모 모빌리우스(Homo Mobilius). 호모 피디에이쿠스와 함께 등장한 신인류다.
PDA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이용해 인류의 활동반경을 획기적으로 넓혀가고 있다.
이 인류는 기술뿐만 아니라 생활습관에서도 전 인류의 진화단계를 뛰어넘는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를 구하겠다는 강력한 열망을 품고 있다.
이동형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하고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귀에 꽂거나, 눈에 착용하거나, 손목에 차거나 하는 방식으로 호모 피시쿠스 이래 발전해온 기술을 최대한 활용한다.
이들의 모토는 ‘나는 움직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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