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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벤처캐피털을 흔들지 마"
[머니] "벤처캐피털을 흔들지 마"
  • 이정환
  • 승인 2000.1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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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개중 91개 법인…의사결정에 영향력 행사, 전문경영인과 마찰 빚기도
한때 벤처캐피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다.
내로라하는 큰손들이 앞다퉈 돈다발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모두들 금방이라도 일확천금을 쥘 수 있을 것 같은 장밋빛 환상에 빠져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벤처캐피털 수는 두배 이상 늘어났고 자본규모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장이 꽁꽁 얼어붙고 자금회수가 벽에 부딪히면서 여기저기서 급하게 끌어모은 주주들이 조급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자금난에 허덕이는 마당에 벤처캐피털 업계는 이래저래 뒤숭숭하기만 하다.
과연 지난 1년여 동안 벤처캐피털에 쏟아져들어온 뭉칫돈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벤처캐피털의 ‘주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사채업자 출신은 일부 2000년 말 기준으로 한국벤처캐피털협회에 등록된 149개 벤처캐피털 가운데 91개 벤처캐피털의 대주주가 법인이다.
대기업이 주류를 이루다가 99년 말부터 골드뱅크, 세원텔레콤, 인터파크 등 벤처기업이 부쩍 늘었다.
개인이 대주주로 있는 나머지 58개 벤처캐피털 가운데 절대주주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큰손이나 대기업 임원 출신이 많지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명동 사채업자 출신은 일부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벤처캐피털리스트나 펀드매니저들이 주주들을 모아 직접 창업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벤처캐피털이 매물로 나와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최저 자본금 100억원으로 만든 벤처캐피털은 보통 대여섯개 기업에 투자하고 나면 자본금을 까먹는다.
자본금은 그대로 두고 투자조합을 결성해 자금을 끌어모으는 게 정석이지만 새로 생긴 벤처캐피털은 그만한 여유가 없다.
허둥지둥 뛰어들고 보니 시장이 갑자기 얼어붙은 것이다.
이제는 투자한 기업들이 코스닥에 올라갈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포트폴리오가 튼튼할 때 이야기고 가망성이 없다면 일찌감치 털고 일어나는 게 수다.
그렇게 해서 흘러나온 창업투자회사 등록증과 영양가 없는 포트폴리오를 묶어 30억원 가량이면 ‘골라서’ 살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이야기다.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벤처캐피털을 세운 대주주들이 사업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뛰어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벤처캐피털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만 있었지, 벤처캐피털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벤처캐피털의 유동성 위기는 벤처기업의 위기를 더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에 벤처캐피털들도 이제 본격적으로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쫓겨나는 전문경영인들 실제로 최근 벌어진 몇가지 사례는 벤처캐피털 대주주들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지난 9월 웰컴기술금융에 합병된 이캐피털의 홍종국 전 사장은 합병을 극구 반대하다 대주주에게 밀려났다.
지난 99년 8월에 설립된 이캐피털은 신생 벤처캐피털치고는 비교적 투자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구성원들의 역량과 성장성을 인정받아 설립 3개월 만에 KTB네트워크 등으로부터 85억원을 유상증자받기도 했다.
반면 아시아M&A 출신이 모여서 만든 웰컴기술금융은 업계에서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다.
벤처기업 투자보다는 M&A 쪽에 한눈을 파는 모습을 종종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캐피털의 대주주인 김덕훈 회장은 이미 코스닥에 올라 있는 웰컴기술금융과 합병하면 급한대로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웰컴기술금융도 이캐피털의 잘 짜여진 포트폴리오에 눈독을 들였다.
결국 자본금 185억원의 이캐피털과 225억원의 웰컴기술금융이 1대 1로 합병하기에 이른다.
돈 한푼 안 들이고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 4월 2445원(액면가 500원)까지 치솟았던 웰컴기술금융의 주가는 12월 들어 270원까지 떨어졌다.
웰컴기술금융은 이캐피털에 이어 무한기술투자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했고 여기저기서 차입금을 끌어들여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무한기술투자 이인규 사장이 잠깐 쫓겨나기도 했고 곳곳에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지난 12월20일 웰컴기술금융은 무한기술투자 인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남은 것은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차입금과 ‘실패한 머니게임’이라는 세간의 부정적 인식뿐이다.
그 어느 것도 벤처캐피털의 본분과는 거리가 멀다.
웰컴기술금융은 최근 외자유치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가가 연일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캐피털 대주주인 김덕훈 회장은 과거 홍능종묘를 멕시코 회사에 팔면서 2천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업을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당시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홍능종묘의 기업심사를 맡았던 홍종국 전 사장을 영입했고, 우여곡절 끝에 벤처캐피털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벤처캐피털이 생각처럼 짭짤하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고, 결국 자금회수로 방향을 틀었다.
최근 일년여 동안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벤처캐피털 대주주들이 김 회장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일확천금의 꿈에 젖어 벤처캐피털에 뛰어들었다가 자금이 묶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투자회수까지 짧아야 2년, 길게는 2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계산을 하지 못한 탓이다.
이 때문에 ‘개점휴업’에 들어가거나 아예 딴눈을 파는 벤처캐피털이 늘어나고 있다.
동아석유가 설립한 샘캐피탈은 실적부진을 이유로 주주들끼리 마찰을 빚다가 지난 7월 스스로 등록을 취소했다.
명동 사채업자 출신이 만든 국두창업투자는 자본금을 다른 곳에 유용하다 적발돼 최근 등록이 취소됐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진승현 사건으로 문제가 된 현대창업투자나 이머징창업투자도 본업과는 무관하게 대주주의 머니게임에 놀아난 경우다.
벤처캐피털을 실제로 끌고가는 사람들은 투자심사역이지만 누구도 대주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철저하게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벤처캐피털도 많지만 곳곳에서 대주주와 마찰이 눈에 띈다.
“내돈 내가 쓰는데 누가 간섭하느냐 하는 식이죠. 투자심사역 의견은 안중에도 없어요.” 배재광 전 퍼시픽벤처스 사장의 얘기다.
배 전 사장은 결재권한을 놓고 대주주인 주택은행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은행 자회사격인 벤처기업에 투자하기를 거부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고, 반대를 무릅쓰고 키노네트 등에 투자하기도 했다.
결국 석달 만에 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지금은 직접 벤처캐피털을 설립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아무리 봐도 성장성이 없는 회사였습니다.
대주주가 하란다고 생각없이 따라서 투자할 수는 없죠. 자본에 지배받지 않는 벤처캐피털을 만들 생각입니다.
이제 돈도 가려서 받을 겁니다.
” 지난 6월 연&벤처투자를 설립한 연병선 전 한국아이티벤처투자 사장이나 미래에셋벤처캐피털로 옮겨간 전일선 전 한국드림캐피털 사장도 대주주와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일진벤처도 비슷한 사례다.
스스로 창업 1세대임을 자부하는 일진 허운규 회장은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해 전문경영인들과 충돌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진벤처는 두차례나 전문경영인을 갈아치운 끝에 결국 등록을 자진 취소하기에 이른다.
프라임창업투자도 여러가지 잡음이 많았다.
대주주가 투자조합을 담보로 융자를 받으려다가 투자자들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고 간혹 괜찮은 기업을 발굴하면 대주주가 직접 투자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의사결정 자율성 확보 시급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주요 주주로 참여하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법인이나 큰손들이 벤처캐피털의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투자심사회의의 결정을 주주총회가 뒤엎는 일도 흔하다.
“벤처캐피털 전문경영인들의 평균 근속연수가 1.6년밖에 안돼요. 이런 상황에선 대주주의 영향력을 쉽게 무시할 수 없죠.” 곽성신 우리기술투자 사장의 얘기다.
결국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배구조가 정착되지 않으면 벤처캐피털의 고질적 문제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직접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다.
현재 최소 자본금 100억원으로 돼 있는 벤처캐피털의 등록요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자본금으로 투자를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더 큰 문제는 자본금을 출자한 사람이 경영에 일일이 간섭하려고 드는 일입니다.
” 넥스트벤처투자 함영섭 사장은 “외국처럼 투자조합 중심으로 벤처캐피털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금과 대주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의사결정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벤처캐피털 리서치 회사인 벤처원에 따르면 미국의 벤처캐피털은 한해에 5천개 이상의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50개 가량의 회사에 투자한다.
이들 가운데 나스닥에 올라가는 기업은 기껏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 2~3개가 가끔 대박을 터뜨리는 일도 있지만 벤처캐피털은 결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다.
과학적 기업분석 못지않게 오랜 인내가 뒷받침돼야 한다.
벤처캐피털에 뛰어든 큰손들의 환상이 무너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채시장을 떠돌던 다분히 수상쩍은 자금이나 기업들의 여윳돈이 아니라 연기금 유입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자본금 100억원의 비밀
신용불량자가 아니고 자본금 100억원을 마련할 수 있다면 당신은 벤처캐피털 사장이 될 자격이 있다.
자본금 100억원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한 최소한의 담보다.
벤처캐피털의 난립을 막는 장치인 셈이다.
문제는 100억원의 자본금이 벤처캐피털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자기 자본금으로 투자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외부자금으로 조성된 투자조합에까지 영향력을 끼친다.
진승현 사건처럼 종종 비리와 연결되기도 한다.
투자조합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미국과 달리 자본금 중심으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벤처캐피털은 대주주 입김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최소 자본금 규정은 벤처캐피털의 몇 안되는 설립 요건치고는 엉성하다.
명동 사채업자들이 그래왔듯이 쌈짓돈을 털어 직접 벤처투자에 나서는 좀 이상한 형태의 벤처캐피털 문화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투자조합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자금들이 벤처캐피털을 설립하는 데 몰렸고 부실하면서 덩치만 큰 벤처캐피털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처럼 펀드 매니지먼트 회사 개념이 도입돼야 합니다.
직접투자보다는 간접투자가 활성화돼야 하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지배구조가 정착돼야 합니다.
” 우리기술투자 곽성신 사장은 “주주의 자금을 갖고 투자하는 형태를 벗어나 벤처캐피털도 이제 본격적인 금융업으로 도약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투자자금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시켜주고 투자수익에 따른 수수료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개선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자본금 요건을 아예 300억원으로 늘려 우량 벤처캐피털만 육성하는 방안과 30억원으로 크게 낮추는 방안, 두가지를 혼용하는 방안 등이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중소기업청 벤처진흥과 류광준 사무관은 “신생 벤처캐피털들은 당장 투자조합 결성이 어려운 현실이고, 자본금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정상 운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벤처캐피털협회 이부호 이사는 “자본금을 까먹고 투자조합 결성이 안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벤처캐피털이 있지만 이는 경험이 일천한 탓이라고 본다”며 “멀리 내다보면 투자조합 중심으로 가는 게 옳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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