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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벤처캐피털, 해외로 해외로…
[커버스토리] 벤처캐피털, 해외로 해외로…
  • 이정환
  • 승인 2001.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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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12월 어느날 미국 보스턴공항. 때 아닌 악천후로 비행기가 연착되면서 KTB네트워크 윤승용 미국사무소장과 우종호 국제부장은 6시간 동안이나 미국의 벤처기업가 소너스네트워크의 루빈 그루버 회장을 기다렸다.
마침내 비행기가 도착하고 인파에 휩쓸려 루빈 그루버 회장이 걸어나왔다.
먼 발치에서 몇번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사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윤 소장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끌고와서 KTB네트워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 벤처캐피털이다.
우리와 손을 잡으면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 지역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처음에는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이던 루빈 그루버 회장도 아시아 지역 진출이라는 말에는 귀가 솔깃한 듯했다.
그렇게 KTB네트워크는 소너스네트워크에 50만달러를 투자했다.
3개월 가까이 쫓아다니면서 얻어낸 성과였다.
사실 소너스네트워크는 얼마든지 투자자를 골라잡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미 VoIP(인터넷을 통한 음성 전송) 장비 분야에서는 성장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고 찰스리버벤처스 등 미국의 쟁쟁한 벤처캐피털을 주요 주주로 확보한 상태였다.
굳이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KTB네트워크의 돈을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KTB네트워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소너스네트워크는 1년 반 만인 지난해 5월 나스닥에 상장됐고 KTB네트워크가 4달러에 사들였던 주식은 한때 10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1월4일 현재 26.4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아직 매각 금지 기간에 묶여 있지만 이대로라면 2년여 만에 28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KTB네트워크는 지금까지 29개 기업에 270만달러를 투자했는데 이 가운데 13개 기업이 뉴욕증시나 나스닥에 올라갔고 6개 기업이 M&A(인수·합병)됐다.
투자 수익도 제법 화려하다.
자일랜은 84배, 카퍼마운틴네트워크는 64배, 알티온웹시스템은 45배의 수익을 안겨다줬다.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빼고도 투자수익률은 250%, 매각 차익은 675만달러에 이른다.
국내 시장 좁아 해외로 눈돌리는 추세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KTB네트워크의 미국 진출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미국 진출 18년째를 맞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우선 미국 벤처캐피털에 견주어 자본이 턱없이 부족했고 인맥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돈을 싸짊어지고 다니면서 투자를 받아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미국 주류 사회는 한국만큼이나 폐쇄적이다.
인맥이 없으면 맨땅에 헤딩하기나 다름없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하든지 주류에 끼어들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다.
” KTB네트워크에서 15년 동안 미국 투자담당을 했던 양정규 전 국제부장(현 알카텔벤처펀드 사장)의 얘기다.
그는 KTB네트워크에서 자일랜 등에 대한 투자를 담당했다.
일찌감치 기반을 닦은 KTB네트워크가 이 정도니 다른 벤처캐피털이 겪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해외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국내 벤처캐피털은 현재로선 KTB네트워크를 비롯해 동양창업투자, 한국기술투자, 스틱아이티벤처투자, 한국아이티벤처투자, LG벤처투자 등 몇개에 불과하다.
다들 의욕적으로 해외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현지 인맥이 없어 쩔쩔매는 상황이다.
우선 한국인 가운데 미국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기업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까지 오른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만큼 미국에서 국내 벤처캐피털이 끼어들 자리는 비좁을 수밖에 없다.
결국 동포들 주위를 맴돌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 알음알음 접촉해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해서는 일관된 투자원칙을 갖기 어렵다.
기껏해야 인터넷이나 신문을 통해서 얻는 제한된 정보와 좁은 인맥으로는 시장의 큰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를 쓰고 해외로 나가려는 이유가 뭘까. 국내에는 더 이상 투자할 기업이 마땅치 않기 때문인가. “어차피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미국은 벤처캐피털이나 벤처기업이나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미국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 한국기술투자 박준호 기획부장의 얘기다.
“많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미국에는 아직도 수백배, 혹은 수천배의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업들이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 비하면 국내 시장은 너무 좁다.
수익을 올려봐야 겨우 투자위험을 만회할 정도밖에 안된다.
” LG벤처투자에서 해외투자를 전담하는 이희규 상무의 얘기다.
한국에 구축한 넓은 네트워크가 강점 한국 벤처캐피털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해외 벤처기업을 발굴해서 투자하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지 기업에 대한 정보에 어두운데다, 설령 유망 기업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손 치더라도 해당 기업 쪽에서 상대를 해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미국 벤처캐피털은 최소 300만달러를 투자하고 필요할 때마다 후속 투자를 하는데 한국 벤처캐피털은 50만달러도 선뜻 내놓기 부담스러운 형편이다.
현지 벤처캐피털을 따라 들어가 상장을 앞둔 기업에 투자하는 방법이 최선인데 그나마도 쉽지 않다.
기업 입장에서는 오랜 경험을 갖춘 유력 벤처캐피털이 줄을 서 있는데 굳이 한국 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어느 벤처캐피털의 지원을 받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장성에 큰 차이가 난다.
투자유치에 앞서 미국 기업들은 벤처캐피털이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별다른 기반도 없는 국내 벤처캐피털들이 발 붙일 여지가 없다.
그래도 틈새는 있다.
KTB네트워크와 한국기술투자는 그동안 한국에 구축해놓은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강점으로 제시한다.
또 LG벤처투자는 LG그룹과 관계를 내세우고 한국아이티벤처투자는 한국통신, 스틱아이티벤처투자는 SK와 관계를 한껏 활용한다.
한국에 진출하기 원하는 미국 기업일 경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 일이 잘 풀리기도 한다.
실제로 KTB네트워크가 출자한 네트워크장비 칩셋 제조업체인 센틸리엄커뮤니케이션은 최근 국내 성미전자와 납품계약을 맺기도 했다.
센틸리엄커뮤니케이션은 지난해 5월 나스닥에 상장돼 현재 매각 금지 기간이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한국기술투자가 투자한 실리콘이미지도 국내 글로넷시스템과 공동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기술투자는 실리콘이미지의 나스닥 상장으로 2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챙겼다.
많은 기업들이 이처럼 한국과 아시아 지역 진출을 노리고 한국 벤처캐피털과 손을 잡았다.
이를테면 서로의 네트워크를 주고받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 시장 진출에 대한 현지 기업의 반응은 생각보다 신통치 않다.
국내 시장이 워낙 협소한데다 미국과 기술 격차도 크기 때문이다.
KTB네트워크에 84배의 수익을 안겨준 자일랜의 경우가 그랬다.
자일랜은 기가비트 이더넷 스위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아직도 10메가비트 사양의 제품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작 자일랜의 제품을 수입하더라도 소화할 만한 업체가 마땅치 않았다.
해외투자를 담당하는 국내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이 업무를 하면서 많은 점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LG벤처투자 이희규 상무는 “한국 벤처캐피털리스트가 금융전문가라면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는 경영전문가 쪽에 가깝다”고 말했다.
초기 단계에 투자하는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당장 매출액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지 않는다고 한다.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되지 앞으로 얼마를 벌 수 있을까 미리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미국 벤처캐피털은 흔히 40% 이상의 지분 참여와 함께 CEO(최고경영자) 임명권과 이사회 구성권을 요구한다고 이 상무는 말했다.
재무, 회계, 법률은 물론 기업공개에 이르기까지 경영 전반에 깊숙이 참여하고 필요할 경우 CEO를 갈아치우거나 능력있는 경영진을 소개하기도 한다.
창업자는 아이디어를 판매하는 데 그치고 경영은 사실상 벤처캐피털이 맡게 되는 셈이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한국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보통 10여개 이상의 회사를 관리하면서 이사회에 참석해 사업방향을 잡아주거나 여러가지 지원 업무를 맡는다”며 “한국 벤처캐피털이 다분히 도박성을 띤 머니게임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미국 벤처캐피털은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작업 위주”라고 말했다.
‘돈 좀 댔다고 감놔라 배놔라 참견이 심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국내 현실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전혀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한국 벤처캐피털이 미국 시장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실무 경험 축적한 전문 인력 양성이 우선 미국에 뛰어든 한국 벤처캐피털은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틈새시장 공략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 기업을 발굴해서 투자하고 키워나갈 만한 역량은 안되지만 조금씩 분위기를 익히면서 발을 넓혀가고 있는 단계다.
하지만 미국 시장의 높은 벽을 넘고 성장의 발판을 굳히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본 자프코나 대만 버텍스처럼 대규모 투자조합이 결성돼서 영향력있는 기업을 직접 키워내고 이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넓혀가야 한다.
영세한 자본으로 주변 언저리를 맴돌다가는 영원히 시장 흐름에서 뒤처지게 될지도 모른다.
또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
동양창업투자 남기승 부장은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남 부장은 “미국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10년 이상 수습으로 경험을 쌓은데다 대부분 현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다”며 “실무경험을 갖춘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미국에 진출한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여러가지 문화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100페이지가 넘는 꼼꼼한 계약서에 당황하기도 하고 미국식 기업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스틱아이티벤처투자에서 해외투자를 담당하는 박기호 부장은 “벤처캐피털이라는 개념만 들어왔지 벤처캐피털 문화는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박 부장은 “최근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늘어나고 위기를 겪으면서 CEO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은 우리나라에도 미국식 벤처캐피털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벤처캐피털이 바로 서야 벤처기업이 바로 설 수 있다.
벤처캐피털들의 해외 진출 실험은 벤처캐피털의 체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국내 벤처산업의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벤처캐피털들의 해외 진출 실험은 계속돼야 한다.
맨땅에서 일군 성공드라마
지난 83년 KTB네트워크(당시 한국기술개발)가 미국에 처음 진출할 때만 해도 벤처캐피털이라는 개념은 낯설기만 했다.
벤처기업에 투자한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도대체 어떻게 투자하고 어떻게 자금을 회수하면 좋은지 설명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KTB네트워크는 미국 벤처캐피털이 어떻게 투자하는지 살피기 위해 미국 벤처투자조합인 어드벤트VLP에 가입하기로 했다.
당시 투자한 50만달러는 이를테면 수업료였던 셈이다.
투자내역을 꼼꼼히 뜯어보고 결산 보고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수익률은 별반 신통치 않았지만 분위기를 익히는 계기가 됐다.
첫번째 직접 투자는 지난 90년 80만달러를 투자했던 퀵턴디자인시스템이다.
이 회사는 반도체회로 검사장비업체로 삼성전자를 통해 소개받았다.
이 회사는 93년 나스닥에 상장됐고 300%에 가까운 수익을 안겨주었다.
가장 큰 대박을 안겨준 자일랜은 기가비트 이더넷 스위치를 만드는 회사로 지난 97년 25만달러를 투자했다가 2년 뒤인 99년 알카텔에 M&A되면서 21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무려 84배의 수익률이다.
물론 실패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실패는 지난 93년 미니스토어에 45만달러를 투자한 일이다.
미니스토어는 1.8인치 초소형 하드디스크를 개발했는데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제품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멀티미디어 바람이 불어닥쳤고 너도나도 하드디스크 용량을 부쩍 늘리는 추세가 됐다.
최대 용량이 120메가바이트에 불과했던 미니스토어는 결국 시장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미니스토어는 컴퓨터 장비업체에 헐값에 매각됐고 KTB네트워크는 겨우 5억원을 건졌을 뿐이다.
시장 흐름에 둔감했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다.
스탠포드 출신만이 ‘행세’
미국 벤처캐피털 사회도 철저하게 인맥으로 통한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스탠퍼드 MBA 출신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벤처캐피털리스트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CEO들도 스탠퍼드 MBA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탓이다.
실리콘밸리는 물론이고 미국 산업계의 최고급 정보들이 이들의 모임에서 생겨나고 실행에 옮겨진다.
워낙 폐쇄된 인맥이라 끼어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한번 인연을 맺게 되면 그 혜택은 엄청나다.
벤처캐피털은 아이디어와 기술밖에 없는 신생기업에 경영진과 이사회 멤버를 구성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사업 방향과 마케팅 전략까지 지도해준다.
필요한 경우에는 업무제휴를 알선하거나 M&A를 추진하기도 한다.
이들은 시장 흐름을 짚어내는 것은 물론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클라이너 퍼킨스가 지난 96년 자바 전문 투자조합을 조성해 자바 기술 관련 업체에 투자했을 때 이 투자 업체들의 제품을 가장 먼저 채용한 회사들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와 넷스케이프였다.
두 회사 모두 클라이너 퍼킨스가 투자한 회사다.
그뒤 자바는 실제로 하나의 표준이 됐고 발빠르게 자바를 채용한 두 회사는 시장에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99년 미국벤처캐피털협회 통계에 따르면,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3658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30% 가량이 스탠퍼드 MBA 출신들이라고 한다.
이 통계만 보더라도 스탠퍼드 MBA들이 미국의 첨단기술 산업에 얼마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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