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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황이 촉발한 변화의 물결
1. 불황이 촉발한 변화의 물결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1.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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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선 다변화·해외생산 두드려져… 전문가들 “국내 부품산업 경쟁력 있다” 분석 ‘조건이 맞는다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 장기불황 속에서 일본 기업들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일본의 백화점에 한번 납품을 하기 시작하면 3대가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거래처를 바꾸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 기업들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가로지르고, 심지어는 적에게도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선두그룹에 일본의 자동차업체들이 있다.
2조5천억엔이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1999년 프랑스 르노에 인수된 닛산이 대표적인 예다.
닛산은 르노 출신 카를로스 곤 사장 주도로 ‘닛산 재건 3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거래 부품업체 수를 50% 줄이는 것을 비롯해 주력 공장인 무라야마 공장 등 3개 공장 폐쇄, 2만1천명 감원, 계열사 매각, 플랫폼 축소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 강력한 회사 재건계획은 한때 일본 사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곤 사장은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는 1145개에 달하는 부품 공급업체들에게 납품가격 인하를 요구해 이를 받아들인 업체 3분의 1만 남겼고, 부품 구매비 2760억엔을 절감했다.
원가절감이란 목적 아래선 적과 아군이 따로 없다.
올해 3월엔 경쟁사인 도요타자동차의 계열사 ‘덴소’와 계약을 맺고 디젤엔진 15억엔어치를 구입했다.
기존 관행을 깨뜨린 경영 덕분에 닛산은 부품조달 비용을 20% 이상 줄일 수 있었고, 구조조정 1년 만인 지난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자동차 판매시장이 크게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자동차업체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지난해 도요타와 혼다는 일부 부품의 구매처를 영국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로 전환할 계획임을 밝혀 영국에 충격을 줬다.
디플레이션은 기업집단 안의 계열사, 협력사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은행이 상호출자 지분을 조금씩 내놓으면서 기업집단은 이완되고 계열사, 협력사와의 유대관계는 약해진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6대 기업집단의 상호출자 비율과 내부거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6대 기업집단 소속 상위 30개 기업들의 거래는 한때 전체의 70~80%까지 이르던 것이 최근 들어 50% 아래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불황이 가져온 또하나의 변화는 제조업의 해외생산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미국이나 독일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이기는 하나, 일본 기업들의 해외생산 비율은 95년 19%에서 99년 21.1%까지 높아졌고 2003년엔 26.7%에 이를 전망이다.
일본의 높은 생산비용은 일본 기업들을 아시아의 다른 국가로 눈을 돌리게 한다.
예컨대 엔지니어의 월급을 비교해보면, 일본인 엔지니어 한명을 쓰는 돈으로 싱가포르에선 3명을, 중국에선 26명을 쓸 수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 일본팀장은 불황으로 기업생존이 어려워지고 인구 고령화가 진전되어갈수록 일본 기업의 해외이전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협력시장으로서의 한일 관계 모색할 때 이런 상황은 한국 기업들한테 새로운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던져준다.
한국 기업들은 경쟁을 통해 탄탄한 일본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동시에, 이미 바짝 따라붙어 있는 중국, 싱가포르 등 다른 아시아 기업들의 도전을 감내해야 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일본사무소 최윤홍 관장은 “일본 업체의 투자를 받아 한국에서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것이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조언한다.
한국 기업이 일본에 들어가 경쟁하는 건 상당한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므로 위험부담도 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기업의 한국 투자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산업자원부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외국인투자 금액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16.7%, 99년 7%, 지난해 15%, 올해 6.8%로, IMF 사태 뒤 잠시 회복했다가 올해 다시 감소세로 반전해버렸다.
일본 기업들이 활발히 진출한 중국, 태국, 싱가포르의 일본 수출 물량은 급증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일본 수출 물량은 줄어들고 있는데는 이런 사정이 바탕에 깔려 있다.
부품을 들여와 완제품을 조립해 내다파는 식의 사업모델이나 저가정책은 일본 시장에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전자제품 상점이 밀집된 아키하바라나 신주쿠는 이미 중국 제품이 평정한 상태다.
최 관장은 “중국과 어떻게 경쟁하냐가 한국에 가장 다급한 문제”라고 말한다.
일본에게 한국은 중국보다 가깝고 생산성과 품질이 높다는 장점을 가진 데 비해, 중국은 낮은 생산비용과 큰 현지시장을 가졌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부품사업에 주력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정혁 일본팀장은 “이미 한국 의류는 중국 의류보다 시장경쟁력이 약해졌다”면서 “부품산업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품 거래는 거래처를 한번 뚫으면 상당기간 거래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매출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부품 교류로 선진기술을 이전받을 수도 있다.
그는 국내 부품산업 중 자동차, 전자, 휴대전화 부품이나 반도체를 경쟁력 있는 제품으로 꼽았다.
일본 시장에서 이미 몇몇 제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TFT-LCD는 일본 히타치 제품을 제치고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일본 제품보다 싸면서도 품질이 좋다는 인식이 일본 소비자들 사이에 퍼진 덕분이다.
한·일 경쟁업체 사이의 협력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일본 NEC, 미국 인텔과 공동으로 0.05미크론 공정기술 개발을 위한 ‘미라이(MIRAI)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LG전자는 일본 히타치제작소와 제휴해, CD롬 등 광스토리지 분야의 연구개발과 마케팅을 위한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세계 1위 철강 제조업체인 포항제철은 2위인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서로 지분을 맞보유하는 것을 포함한 포괄적인 협력 약정을 맺었다.
긴 불황 속에서 일본 기업들의 시스템과 인식은 바뀌고 있다.
산업자원부 이병호 무역정책심의관은 “세계적인 일본 기업들이 이제는 한국 기업들을 자기네와 동등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한국은 이젠 일본의 하청시장으로서가 아니라 협력시장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있다.
인터뷰 | 이병호 / 산업자원부 무역정책심의관
지금이 일본 진출 호기

전엔 일본에서 기계 소재와 부품을 사왔는데, 이제는 일본 기업에 맞는 부품 소재를 만들어 내다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산업자원부 이병호 무역정책심의관은 한국의 전자부품이나 자동차부품들이 일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올해만 해도 삼성전기, 삼성SDI, 동양피스톤, 일흥공업이 적게는 연간 100만달러부터 많게는 연간 3천만달러짜리 계 약을 맺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은 한국 기업이 일본에 진출할 호기다.
'미국의 불황은 10년 호황 끝에 최근에 온 것이지만, 일본 불황은 지난 10년 동안 지속돼온 장기불황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생산비용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어요. 이제 그것이 시작되면서 부품 납품과 제휴와 같은 여러가지 일본 시장 진출 기회가 생기고 있습니다.
' 한국과 일본 정부는 올해 말을 목표로 한일투자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그는 한일투자협정이 일본 투자자로 하여금 한국을 매력적이고 안전한 투자지역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대일 무역적자의 주범은 부품기계류의 수입입니다.
일본 기업들의 투자를 받은 한국 기업들의 대일본 역수출이 대일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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