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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타임사이트] 천국보다 낯선 서울
[킬링타임사이트] 천국보다 낯선 서울
  • 김윤희
  • 승인 2001.05.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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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앞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신나나요? 아니면 귀찮은가요? 눈에 보이는 경치가 마음으로 들어옵니까? 음악은? 외국을 생각해봐요. 가고 싶나요? 가슴이 두근두근하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가 기대되나요? 내일이 기다려집니까? 사흘 후는? 미래는? 설레이나요? 아니면 우울한가요?”

요시모토 바나나의 어느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심리테스트라도 하듯 이런 질문들을 연달아 던진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인생의 비전(秘傳), 체크 포인트란다.

나는 요즘 많이 의기소침해 있다.
저녁 나절에, 예술의 전당을 끼고 있는 동네 뒷산을 천천히 오르는 것 말고 내 구미를 당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친구들을 만나 커피숍 따위를 전전하며 수다를 떨 마음도 없고, 누군가에게 ‘술 한잔 합시다’ 전화를 걸기도 내키지 않는다.
지극히 통속적인 소설 몇 권, 혼자 앉아 있는 어두운 극장이 간절히 그립지만 웬일인지 그런 일들도 찾아나서기가 귀찮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미 장면을 외워버린, 갖고 있는 몇 개의 비디오 테이프와 어느 구석에 쌓여 있는지조차 잊었던 소설책들, 그리고 케이블TV에서 밤새워 틀어주는 철 지난 ‘김수현 드라마’에 의존하여 며칠씩 버티곤 한다.
그러다 책장 사이에 끼워두었던 국산 양주를 혼자 홀짝이다 잠이 든다.
‘폐인’이 되는 게 이런 건가? 오늘 아침도 그랬다.
출근한 사람이라면 ‘오늘 점심은 뭘로 할까?’라고 고민하기 시작할 시간이니까, 아침이기보다는 이른 오후였다.
별과 달이 사선으로 그려진 광목 커튼이 창문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천에 뜬 5월의 햇빛은 침대까지 파고들었다.
문득 그 소설의 질문들이 생각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가 기대되나요? 내일이 기다려집니까?” 맞아. 그런 책도 있었지. 그런데 그 책을 읽을 때의 감동(?)은 엉뚱한 곳에 있지 않았나? 주인공은 그저 단골 바(bar)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린 남동생과 훌쩍 해변가로 여행을 떠나거나, 애인과 사이판에 가서 ‘영혼을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거나 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뜬금없이 온 가족이 자메이카로 1년씩 여행을 떠나버리거나, 아예 그런 여행이 인생이거나. “외국을 생각해봐요. 가슴이 두근두근하나요?” 분명 그 책을 읽을 때에는 그들의 ‘여행 같은’ 인생이 부럽다 못해 화가 나서 책을 던지고 말았는데, 지금 나는 누군가가 비행기를 태워 낯선 이국 땅에 내려놓아준다 해도 반가울 것 같지 않다.
지도를 보고 낯선 곳을 헤매는 것이 귀찮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먼 여행지의 그 느낌은 그립다.
적당한 외로움을 담보잡힌 완전한 자유. 바로 그 느낌말이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새로운 어느 곳이 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 서울을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래. 까짓 서울에서 그렇게 산다고 생각해보지. 갑갑한 이 작은 방이 여행지의 숙소라면, 이처럼 필요한 것이 얼추 다 갖춰진 편안한 숙소가 없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한번쯤 연락하고 만나야 하는 친구들이, 외로운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토록 많은 친구를 가진 행복한 여행이 없다.
‘내 근거지’라는 곳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된다.
그래.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화창한 봄날,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길 것이다.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축으로 가볼 만한 데도 많을 것이다.
여행할 때에는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지’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구경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머릿속과 함께 내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이런 걸 ‘숨통이 트인다’고 하는 거군. 난 벌떡 일어나 인터넷을 열었다.
나이스이벤트 www.niceevent.co.kr에 가면 한달 동안의 월간 여행계획을 세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와! 서울에서 한달 내내 이렇게 볼거리가 많다니. 더구나 주말에는 1박2일 코스로 땅끝 마을까지 달려볼 수도 있다.
사이트에 소개된 대로 패키지만 잘 따라다니면, 2001년 5월 어느 날의 일출을 땅 끝 마을에서 보고 돌아오는 것이다.
따분한 아파트 숲으로만 여겼던 분당이라는 도시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 있다는 솔깃한 정보도 있다.
이곳은 근 30년을 머물러도 다 알 수 없는 여행지였다.
정보들을 잘 활용하면 된다.
그리고 지갑에 돈만 있으면 된다? 흑, 그런데 난 역시 여기서 걸리는군. 내 천국 같은 여행의 걸림돌, 돈! 하지만 여기서 낙심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우선 오늘은 돈 안 드는 여행 코스부터 잡아볼까? 우리집, 아니 내 숙소 앞에 있는 우면산을 샅샅이 뒤지고, 그 뒤로 있는 서울의 명승지, 예술의 전당을 돌아보는 거다.
돈이 없어도 여행은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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