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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전문경영인 '날 좀 내버려 둬'
[초점] 전문경영인 '날 좀 내버려 둬'
  • 권태호/ 한겨레 경제부
  • 승인 2001.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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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상선 사태, 오너와 채권단과의 3각 대립구도 속 독립경영 깃발 꺾여 독립경영을 위한 전문경영인의 몸부림인가? 오너(대주주)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반역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정말 건강 때문인가?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요즘 현대그룹은 어수선하다.
김 사장의 사임은 ‘황제경영’과 ‘독립경영’의 대립, 채권단의 경영감시, 지주회사의 역할 등 IMF 사태 이후 진행돼왔던 재벌개혁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준다.
때문에 앞으로 마무리 과정에서 다른 기업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주목된다.
◇ 10월4~6일, 갑작스런 사임 이후=사건발생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추석연휴 뒤 첫날인 10월4일 오전 10시 김 사장은 계동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정몽헌 회장을 찾아갔다.
한달 가까이 미국과 일본 출장을 갔던 정 회장은 추석 직전 귀국했다.
김 사장은 정 회장에게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 사장은 정 회장에게 ‘뇌동맥 경색’이라는 구체적인 병명까지 들었다.
정 회장은 이미 몇차례 김 사장으로부터 사임의사를 듣긴 했으나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그만두면 어떡하느냐?'며 만류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회장실을 나왔다.
김 사장은 이날 오후 3시 광화문 현대상선 사옥에서 상무급 이상 임원들을 소집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김 사장은 이 자리에서 그룹쪽에 이미 사의를 표명한 사실을 밝힌 뒤 '그동안 고생했다'는 짤막한 말만 내뱉었다.
김 사장은 이어 회사로부터 지급받은 휴대전화를 총무과에 반납하고 자취를 감췄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정 회장은 이날 오후부터 김 사장을 수소문했으나, 김 사장은 집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김 사장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일주일 이상 지방에 내려갔다 오겠다.
몸은 건강하다'고만 말한 뒤 잠적상태에 들어갔다.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인 10월5일, 이번에는 채권단이 가만 있지 않았다.
주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현대상선에 ‘최고경영자 교체 보도에 따른 산업은행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사전협의 없이 최고경영자를 교체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으며, 이 경우 금융지원도 재고하겠다'고, 사실상 ‘금융지원 중단’ 엄포를 놓았다.
10월6일 토요일 오전 10시, 오랫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정몽헌 회장이 광화문 현대상선 사옥에 나타나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영업 총괄에 김석중 현대상선 부사장을, 관리지원 총괄에 현대상선 사외이사인 현대엘리베이터 최용묵 부사장을 선임했다.
정 회장은 이와 함께 김 사장의 경영복귀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김 사장을 찾고 있다.
◇ 김충식 사장 사임의 진짜 이유=현상을 살펴봤으니, 이젠 원인을 탐색해보자. 지금까지 알려진 김 사장의 가장 큰 사임 이유는 계열사 지원을 요구하는 가신그룹과의 갈등이다.
김 사장은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과 △현대상선의 계열사 자금지원 △금강산 관광사업 지원 △현대증권 매각 등과 관련해 여러차례 의견충돌을 빚어왔다.
구조위 관계자들은 '너만 살겠다는 거냐'며 김 사장을 압박했고, 이에 김 사장은 '계열사 지원은 법적으로도 힘들고, 잘못하면 동반부실로 이어져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상선이라도 제대로 운영해 수익을 올리는 것이 오너(정몽헌)에게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김 사장이 구조위쪽과 마찰을 빚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현대건설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바 있다.
그러자 곧바로 김충식 사장이 '주주이익에 반할 수 없다'며 반박 보도자료를 내고 그룹 구조위의 ‘지시’에 항명했다.
그동안 잠복했던 김 사장과 구조위의 갈등은 이때부터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어 올해초 현대상선 부실의 한 원인인 금강산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선언해 현대아산과 갈등을 빚었고, 실제로 대북사업에서 손을 뗐다.
현대자동차가 계동사옥에서 이전한 뒤에는 현대상선 사옥을 팔고 계동으로 입주하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이밖에 그룹 구조위 인력 축소과정에서 구조위 인력을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이 역시 거부하면서 최소인원만 받아들였다.
상선은 또 8월말까지 지급받기로 했던 금강산 해상호텔 매각대금 잔금 1100억여원을 현대아산으로부터 받지 못하자 ‘해상호텔 폐쇄’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현대증권 매각과정에서도 채권단과 금융당국, 현대 구조조정위원회가 현대증권의 최대주주(15.54%)인 현대상선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처리한 데 대해서도 김 사장은 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화해가 불가능한 상태까지 벌어진 김 사장과 구조위 사이는 구조위쪽이 ‘추가지원’ 압력을 계속 넣자 결국 ‘사의표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사장의 한 측근은 '지난 99년 부임한 김 사장은 현대상선이 영업이익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해 불필요한 자금지출 등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하고, 원칙을 내세우며 구조위의 간섭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을 빚었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현대상선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회사다.
올해말 계열분리 예정인 현대중공업을 제외하면 현대상선은 현재 20개 현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회사일 뿐 아니라, 지분으로도 아산(40%), 종합상사(6.23%), 중공업(7.15%) 등의 최대주주로 현대그룹의 실질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곳이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5조1895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국내 최대, 세계 5위의 종합 해운회사다.
◇ 현대상선 사태의 마지막은? 이번 김충식 사장의 사임은 오너와 구조위의 경영간섭으로 상징화되는 ‘선단식 경영’과 ‘전문경영인’의 대립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나, 이후 채권단이 나서면서 ‘채권단 감독기능의 한계’ 여부, 그리고 정 회장이 임시 비상경영체제를 직접 선언함에 따른 ‘황제경영’과 ‘책임경영’의 경계 등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가능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사태의 전말은 김충식, 현대그룹, 채권단 등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3각대립 구도가 어떤 식으로 접점을 찾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김 사장은 현재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있으나, 서울 시내 모호텔에서 묵으면서 여론 추이를 관찰하는 한편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거취문제와 수습안에 대해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복귀와 사임강행의 두갈래 길에서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김 사장은 결심이 서는 대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자신의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도 않은 채 ‘무작정 잠적’이라는 시위를 한 김 사장에 대해 무책임하고 사려 깊지 못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단 비상경영 체제를 구축한 현대그룹은 일단 김 사장 경영복귀 카드를 통해 여론과 채권단을 모두 무마시킨다는 생각이나, 김 사장이 측근을 통해 '다시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강한 입장을 보이고 있어 협상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두번째 카드는 김 사장이 직접 나서 '사임 이유는 건강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과연 시장이 얼마나 믿어주느냐 하는 것과 후임 사장 인선이 고민거리다.
현대그룹 출신 인사가 임명될 경우 반발이 만만찮을 전망이고, 상선 내부인사를 승진시키더라도 ‘독립경영’ 이미지를 내세우기도 힘들다.
이를 의식해 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은 '현대상선 후임 사장에 이른바 ‘가신’이라고 하는 이들 또는 그룹 구조위의 영향력이 미치는 인물이 임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정히 못 믿겠다면, 차라리 상선쪽에서 사장 공채를 하는 방안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김 사장을 해임하면 금융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강경방침을 유지하고 있는 채권단의 위치도 중요하다.
현대상선은 현재 총부채가 5조원 정도인데, 이중 절반 가량이 매월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부채다.
따라서 채권단이 만기연장을 중지하고, 회수에 들어갈 경우 현대상선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과 마찬가지로 산업은행도 김 사장에 대해 사장직 복귀를 강력히 설득한다는 방침이다.
산업은행은 정몽헌 회장이 일부 부사장들로 임시경영체제를 구성하도록 한 데 대해서도 '이사회 구성원도 아니면서 업무를 맡길 수 있느냐'며 반박했다.
산업은행은 현대상선이 현대 계열사와 관계를 끊을 뿐 아니라,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도 중단하고 독립경영에만 주력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재 상황은 김 사장의 잠적으로 더이상 진전되지 않고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출현’, ‘후임사장 임명’, ‘자금지원 중단’ 등 각 주체들은 모두 최후의 카드 하나씩을 갖고 있다.
누가 먼저 카드를 오픈시키느냐는 팽팽한 긴장이 현대 주변을 감돌고 있다.

채권단 압력으로 주군에 반기?

김충식(56) 사장이 일방적인 사의표명과 잠적이라는 ‘돌출행동’을 벌인 것에 대해 정몽헌 회장과 김충식 사장의 관계를 잘 아는 이들은 의아해하기도 한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김 사장은 1972년 현대건설에 입사했으나, 78년 현대상선으로 옮긴 뒤 줄곧 상선에서만 근무해왔다.
81년 정몽헌 회장이 상선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는 과장이었고, 이후 관리부장을 맡으면서 정 회장을 보필해왔다.
특히 그는 92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정계진출로 인한 현대상선 비자금 조성과 관련한 탈세 혐의로 몽헌 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을 당시, 재정담당 이사를 맡아 정 회장의 지시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 미주법인 대표-부사장을 거쳐 99년부터 현대상선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왔다.
사장에 취임한 뒤에도 현대그룹이 숙원사업으로 추진한 금강산관광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런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과적으로 ‘주군’(主君)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오너보다 주주를 더 의식했다는 설과, 채권단으로부터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1조5천억원 규모의 부채를 줄이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최근 해운시황 악화 등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심리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계열사 지원에 부채 눈덩이

현대상선은 현대 계열사 지원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북사업 지원이다.
현대상선은 1998년 11월 금강호를 띄운 이후 지금까지 누적된 관광선 운영비 1700억원에다 현대아산에 투자한 1800억원(40%)을 합해 모두 3500억원의 손실을 봤다.
그러나 이는 큰 문제가 안 된다.
현대상선은 97년부터 현대 계열사 지분매각에 과도한 자금을 투입한데다 금강산 사업에 따른 적자 누적으로 지난 92년 8천억원에 불과했던 부채규모가 단기부채를 포함해 5조원대로 늘어난 게 훨씬 크다.
특히 2조원 가량을 투입한 계열사 주식이 4천억원대로 폭락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현대상선이 지난해 4578억원에 이르는 창사 이래 최대의 영업이익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3105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이유는 환차손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과도한 부채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올해 예상되는 영업이익이 6700억원인데, 지급이자 규모가 6천억원 수준으로 ‘벌어서 이자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구조’다.
현대상선은 올해에도 영업이익은 계속 내고 있지만, 아직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현재 매각을 위탁한 하이닉스반도체 보유주식 해외매각이 완료될 경우 약 3500억원의 당기순손실도 반영해야 돼 재무구조 악화가 불가피하다.
이런 이유로 현대상선은 회사채 신속인수 대상에 포함돼 산업은행이 지난 5월말까지 1320억원의 회사채를 인수했고, 하반기에 4978억원을 추가 인수할 예정이다.
현대상선의 사장 교체에 대해 산업은행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99년 중반까지만 해도 2만원대를 웃돌던 주가가 주가조작 사건 여파와 금강산관광사업 지원, 계열사 지원, 지주회사 등극 등의 영향으로 끝없이 하락해 1835원(10월10일 현재)으로 급락한 것이 가장 큰 피해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상선이 독립경영을 부르짖는 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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