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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친구" 키운 ‘친구’는 마케팅
[커버스토리] "친구" 키운 ‘친구’는 마케팅
  • 이경숙
  • 승인 2001.05.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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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작비 절반 투입해 입소문에서 브랜딩까지 총동원, 영화의 질도 한몫
“<쉬리> 기록은 10년이 가도 깨기 힘들 거예요.” 99년 어느 날 영화방 주필호 대표는 시네마서비스 최용배 이사한테 말했다.
최 이사는 의견이 달랐다.
“지금 한국영화 점유율이 38%나 됩니다.
최소한 1년 안엔 <쉬리> 같은 영화가 나올 것 같은데요.” 1년반 뒤, <쉬리>가 세운 서울관객 기록은 <공동경비구역JSA>가 갈아치운다.
“이번 기록은 정말 안 깨질 거예요. 한국영화의 잠재고객은 가 다 끌어냈어요.” 주 대표의 말에 최 이사는 또 고개를 저었다.
“곧 깨질 겁니다.
” 기록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깨졌다.


영화 <친구>는 5월17일까지 서울에서 225만명, 전국에서 672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우리나라 사람 예닐곱 중 한명꼴로 봤다.
주관객층인 18살에서 35살 인구가 1540만명이니 볼 만한 사람 중 거의 절반은 본 셈이다.
<친구>는 <쉬리>가 161일 동안 세운 기록을 단 42일 만에 넘어섰다.
개봉 첫주 주말 관객 수는 서울 22만명, 전국 58만명을 기록했다.
신기록이었다.
이후에도 <친구>의 누적관객 수는 거의 수직적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3, 4월이 영화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지금까지 거둔 순이익은 150억원에 이른다.
이달 말에 관객 수가 780만명을 넘으면 순이익은 170억원, 수익률은 180%으로 올라간다.
황제주 중 하나인 한국통신이 지난 3년간 평균 92%의 수익률을 올린 데 비하면 두배에 가까운 ‘대박’이다.
한국영화 기록 갱신한 비법들 <친구>가 영화를 만드는 데 들인 순제작비는 18억원이다.
블록버스터 <쉬리>나 가 각각 24억원, 30억원을 들인 데 비하면 적은 액수다.
<친구>는 소재도 죽마고우들의 우정과 배신이라는, 일상적인 것이다.
남북분단을 다룬 <쉬리>나 처럼 사회적 이슈로서 힘을 얻을 만한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요소가 이런 폭발력을 이끌어낸 것일까? <친구> 관계자들은 연출, 스타 캐스팅, 마케팅 3박자가 적절하게 조화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억수탕>과 <닥터K>에서 겉돌던 곽경택 감독은 <친구>에선 자신의 실화를 진득한 드라마로 녹여냈다.
출연을 자처한 장동건, 유오성 두 스타는 촬영 전 40일간 ‘합숙훈련’까지하면서 극중 인물들을 자신 안으로 흡수했다.
이들은 <친구>의 상품성과 작품성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마케팅 전략도 독특했다.
<친구>는 개봉 한달 전부터 “한국영화 모든 기록에 도전한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 신문광고를 시작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영화광고는 개봉 일주일 전쯤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게 관행이다.
더군다나 <친구> 광고가 가장 집중되었던 시기는 개봉한 지 한달이나 지난 4월23일부터 일주일간이었다.
그때서야 <친구>는 ‘친구야, 친구 보러 가자’라는 카피의 TV광고와 포스터광고를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만 2억원 이상의 홍보예산을 투여했다.
<친구> 마케팅을 대행한 영화방 주필호 대표는 여러 각도의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데이터에 입각한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고 말한다.
“관객 수와 소요비용을 시뮬레이션해보니 우리의 가장 큰 위기는 개봉 한달 뒤였습니다.
<한니발>과 <멕시칸>이 개봉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래서 마케팅비를 아껴두었다가 그때 쏟아부었죠.” ‘약발’이 먹혔는지, <친구>는 최대 강적을 가볍게 따돌리고 개봉 8주가 지나도록 관객 수 1,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친구>는 이미지 관리를 철저히 했다.
<친구>의 홍보용 이미지는 개봉 전후 등 시기별, 단계별로 10차례에 거쳐 배포했다.
특히 개봉 직전까지는 ‘고등학생’, ‘질주’로 이미지를 통일했다.
유오성, 장동건, 서태화, 정운택 네 배우는 교복을 입고 부산 범일동 굴다리 시장에서, 육교에서, 영도공원에서 줄창 달리고 또 달렸다.
덕분에 이 영화는 20대들한테는 ‘젊다’는 이미지로, 30대들한테는 ‘향수’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30대 초중반의 배우들이 70, 80년대를 연기한 386 정서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일반기업이나 상품이 브랜드를 관리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바깥에 보이고 싶은 ‘젊음’, ‘향수’의 이미지만 부각하고 숨기고 싶은 ‘깡패’의 이미지는 가렸다.
모노톤 화면 속에 서 있는 네 친구는 ‘뭔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원래의 마케팅 컨셉은 느와르가 강한 장르영화지만, 그 경우 관객층이 협소해진다는 판단에 따라 드라마성을 강조한 것이다.
유오성, 장동건이 건달로 성장한 모습은 개봉 뒤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공개됐다.
그 중에서도 장동건이 칼을 맞고 죽는 신은 가장 최근에 배포됐다.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이미지와 이야깃거리는 <친구> 신드롬을 지속하는 데 한몫했다.
영화방은 영화 <비천무>에서도 비슷한 전략을 쓴 적이 있다.
영화 개봉 전엔 지붕 위를 날아다니거나 물 위를 걸어다니는 장면만 거듭 홍보했다.
TV 시청자나 신문 독자들은 <비천무>란 단어를 들으면 바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40억원짜리 블록버스터 <비천무>는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서울 73만명, 전국 234만명의 관객을 모아 순이익을 냈다.
흥미로운 건 시사회에서는 두 영화가 정반대 전략을 썼다는 점이다.
<비천무>는 기자,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의무방어전 정도의 간단한 시사회를 열었다.
하지만 <친구>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등 각계각층의 오피니언 리더들 7천여명을 시사회에 초대했다.
로맨스가 거의 없는 ‘남자들의 영화’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마이클럽, 팟찌닷컴 같은 여성포털 사이트 회원 3천여명을 대상으로 대대적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완성도에 자신 있는 상품은 과감히 ‘입소문 잔치’에 내놓되 자신이 없는 상품은 화려한 이미지 속으로 감춘 것이다.
상품의 질은 기본적 요인 <친구> 신드롬은 입을 타고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사회 참석자들의 호평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방향으로 복제됐다.
250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가 있는 <친구> 관련 정보들은 e메일로, 다른 사이트로 퍼져나갔다.
온라인에선 부산 사투리 해석본과 영화 시나리오가 떠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개봉 전부터 <친구> 열병에 들떴다.
극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람들은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장동건이 횟칼에 30여 차례 찔리면서 내뱉는 말)”라든가, “쪽 팔리서(유오성이 법정에서 살인교사를 시인한 뒤 친구한테 하는 말)”라든가 하는 극중 대사를 중얼거렸다.
개봉일, ‘준비된 관객’들은 극장으로 몰렸다.
<친구>는 개봉 이틀 동안의 관객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었다.
<친구>가 입소문의 위력 덕에 관객동원에서 큰 성과를 거뒀지만, 관계자들은 입소문 마케팅 덕분에 영화가 성공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투자·배급사인 코리아픽쳐스 김동주 대표는 성공의 첫 요인으로 ‘영화의 힘’을 꼽는다.
“물론 마케팅의 가장 큰 힘은 입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좋지 않으면 좋은 소문이 돌겠습니까.” 제작사 시네라인투 석명홍 사장은 “영화가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것이 성공요인”이라고 분석한다.
“관객들은 새로운 경험을 얻기 위해 극장에 갑니다.
트렌드는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의 것이죠.” <친구>는 386세대한테는 복고였지만, 20대나 여성들한테는 새로운 트렌드로 다가갔다.
벤처 마케팅 전문가인 마이스터컨설팅 한재방 대표는 <친구>가 20대나 여성 같은 취약 타깃을 공략한 건 그만큼 작품의 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입소문을 탄 것일수록 구매행위로 이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오히려 구매를 회피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친구>가 남성 관객을 기본적으로 확보한 뒤 여성 관객을 공략했듯 입소문 마케팅은 기본판매량을 확보한 뒤에 해야 효과적입니다.
” 상품의 질이 낮았다면 입소문을 타는 것이 오히려 위험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친구>는 지금 이순간도 자신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계획대로 6월까지 극장 상영이 이어지면 관객 800만명 동원이란 경이적 기록을 세울 수도 있단다.
하지만 KTB네트워크 하성근 엔터테인먼트팀장은 이 기록도 언제든 경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쉬리>, , <친구>가 30, 40대 잠재고객을 영화시장으로 끌고나오면서 전체 한국영화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관객들은 미국, 일본 관객보다 평균 관람횟수가 훨씬 적어요. 주차시설 같은 극장 주변환경이 좋아지고 볼 만한 영화들이 많이 나오면 우리 영화 시장은 산업적으로 더 커지고 박스 오피스도 더 자주 깨질 겁니다.
” <친구> 마케팅은 소비자의 필요를 따라가기보다 욕구를 창조했다.
그건 마이클럽닷컴, 아이러브스쿨 같이 초기 마케팅에 성공한 인터넷서비스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들과 <친구>가 다른 점은 초창기 신드롬을 이어가는 뒷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대박’이 사라진 테헤란밸리에 <친구>는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화 일군 베테랑 마케터 3인 투자사인 코리아픽쳐스 김동주(36) 대표, 제작사 시네라인투 석명홍(43) 사장, 마케팅 대행사 영화방 주필호(38) 대표한테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 마케터나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점이다. 김 대표는 21세기폭스와 익영영화사에서 , 등의 마케팅을 담당하다가 일신창투에서 투자자로 거듭났다. 석 사장은 17년 동안 , 등 2400여편의 영화광고를 디자인했다. 주 대표 역시 14년 동안 , 등 140여편의 마케팅을 기획한 베테랑이다. 이들의 경험은 제작, 마케팅의 전 과정에 속속 스며 있다. 같은 한국영화을 애타게 기다리던 석 사장은 곽경택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다. 그는 다음날 바로 곽 감독에게 전화해 계약을 맺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시나리오는 좋은데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며 투자를 거부했다. 곽 감독과 제작사가 저예산영화로라도 만들 것을 결심할 즈음, 김 대표는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했다. 미리 합류한 유오성, 장동건의 스타파워라면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네티즌펀드 조성뿐 아니라 장동건의 온라인 홍보전, 광고 문안 등 마케팅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곤 했다. 주 대표는 마케팅 컨셉과 크리에이티브 전략을 세우고 시기별로 다양한 마케팅 도구를 도입했다. 20여명이 교복을 입고 행진하는 길거리 마케팅, 곽 감독의 아버지가 나눠주는 ‘대박’ 기념 수건, 인쇄·전파·음반 등 매체와의 타이인 광고 등 온갖 이벤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각적 마케팅은 초기의 신드롬을 관객 700만명에 이르도록 지속시켰다. 하지만 이들은 당초 ‘대박’을 터트리려고 뜻을 합한 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좋은 한국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이들을 뭉치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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