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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책값 논쟁, 돌고 돌아 원점으로
[초점] 책값 논쟁, 돌고 돌아 원점으로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1.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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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위, 온-오프라인 서점 10% 할인제한 입법 추진… 법안폐지 촉구 청원 등 인터넷 서점 거센 반발 책은 문화상품일까, 아니면 경제논리에 얽매인 상품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이 문화상품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질문. 책이 경제논리를 적용할 수 없는 상품이라면, 할인율을 적용해 싼 값에 구입하지 않고 정가대로 구입할 의향이 있는가? 여기에 순순히 동의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의도 이러한 이론과 현실간의 모순을 맴돌고 있다.
이 도서정가제 논쟁이 최근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출판업계를 중심으로 다시 불붙고 있다.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도서정가제 논쟁이 이 시점에서 다시 불거져나온 것은 지난 11월초 국회에 상정된 법안에서 비롯된다.
11월13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의원 32인은 ‘발행 1년 이내 간행물에 대해서는 할인율을 10% 이내로 제한하며, 이를 어길시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출판 및 인쇄 진흥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이 법안은 그동안 도서정가제를 일관되게 주장하던 예전의 사례와는 달리 정가의 10% 이내에서 할인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온라인 서점의 할인율만 인정했던 지난해 합의사항과 달리, 이번 법안은 오프라인 서점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면서 동시에 출판유통에 대한 법제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동시 할인은 ‘제2의 도서정가제’ 이번 논쟁의 배경을 살피기 위해선 잠시 도서정가제 논쟁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99년 11월 국민회의 소속 의원 27명이 발의해 도서정가제 관련법 입법을 추진하다 인터넷 서점과 네티즌의 반발에 밀려 포기한 바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문화관광부에서 99년에 비해 과태료를 조금 더 낮춘 내용의 ‘출판 및 인쇄 진흥법안’을 추진하다 결국 수포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이때 출판계와 서점연합회,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온라인 서점에 한해 10% 이내의 할인율을 적용하며, 추가 5% 범위에서 마일리지 적용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 합의내용이 깨지면서 다시 온라인 서점마다 다른 할인율을 적용한 도서 판매가 이루어져온 상태다.
그리고 올해 11월 국회 문광위 소속 의원을 중심으로 다시 입법 움직임이 일어나자, 인터넷 서점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서면서 또다시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번 법안은 ‘도서정가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엔 출판업체와 정부쪽이 그동안의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서적의 할인율을 인정함으로써 인터넷 서점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법안 상정 움직임이 보도된 지난 11월14일 인터넷 서점들은 황급히 모임을 갖고 법안 상정에 대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와우북 하공명 이사는 '인터넷 서점뿐 아니라 오프라인 대형 서점에도 동일한 할인율을 적용한다는 건 결국 도서정가제와 다를 바 없다'며 '실질적인 도서정가제라면 배송료 부담을 안고 있는 인터넷 서점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해 망하게 되고, 결국 시장은 대형 서점 위주의 독점체제로 재편될 것'이라며 업계의 강력한 반발의지를 전한다.
이에 대해 법안 상정의 ‘숨은 공신’으로 지목되고 있는 전국서점조합연합회쪽은 '지역서점은 단순한 책 전시장이 아니라 문화공간'이라며, '인터넷 서점이 해낼 수 없는 오프라인 서점의 역할을 무시한 발언'이라고 인터넷 서점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들은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 할인경쟁으로 인해 동네 중소형 서점은 문을 닫고 유흥향락업소가 들어설 것이며, 이윤이 많은 인기 위주의 도서나 저질 서적이 범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할인율을 고려해 미리 책값을 높게 책정하는 거품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지난해 인터넷 서점의 할인율 제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중재 역할을 했던 한국출판인회의도 도서정가제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의 정광호 사무국장은 '현실적으로 경제논리가 문화논리를 이기기는 힘든 상황이다.
책값을 내려 판매함으로써 독서 대중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가 일반인에게 더욱 설득력을 얻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인터넷 서점이 지방 중소서점의 폐업과는 무관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며 '모두들 싼 값에 인터넷을 통해 책을 구입하게 되면서 지방 서점은 단순한 책 전시장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 보호육성에 기여한 것처럼, 도서정가제도 외국계 할인점이나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국내 서점계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라고 강조한다.
도서관 확충과 서비스 개선 절실한 때 도서정가제가 고질적인 출판계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 출판사쪽 모두 ‘독서대중 확보와 유통채널 투명화를 통한 출판계 활성화’라는 대의에는 동의한다.
한국출판인회의의 정광호 사무국장은 '출판사가 서적판매에 골머리를 앓지 않고 마음껏 문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도서정가제 문제는 더이상 불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도서관 확충’이다.
국내에 공공 도서관이 더 많이 생겨난다면 출판사 입장에선 한층 안정적인 판매 채널을 확보하는 동시에 정부 입장에서도 독서대중을 위한 문화공간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산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는데다 공간 마련에서부터 건립까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해야 할 과제이므로 시간이 걸린다.
또한 영국의 경우 도서정가제 폐지 이후 중소형 서점이 가격 차별화 대신 서비스 개선을 통해 살아남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값을 내려 도서구매를 유도하기보다는 서점 환경을 개선하거나 독자의 독서 도우미 역할을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실시함으로써 출판산업을 활성화시킨 점은 국내에서도 본받을 점으로 꼽힌다.
예스24와 와우북을 포함한 6개 인터넷 서점은 11월21일부터 일제히 이번 입법의 부당성을 알리는 글을 자사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한편, 가칭 ‘도서정가제 입법저지를 위한 인터넷 서점 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네티즌을 상대로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다음날인 22일에는 현행 입법안 폐지를 촉구하는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 도서정가제의 당위성을 목청껏 외치며 이번만큼은 법제화를 통해 도서정가제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인터넷 서점은 그간 대형 서점과 출판사 사이의 어음유통 관행을 깨고 현찰거래를 실시함으로써 고사직전인 출판계의 자금 흐름을 원활히 했고, 인터넷 붐을 타고 독서대중의 확대에 기여한 점 등을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출판업체와 대형 서점의 주장대로 책을 경제논리에 내맡기면서 산술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문화상품의 가치를 외면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금으로선 양쪽 모두 사활을 걸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력히 대응하고 있으며, 정부 또한 문화관광부와 정통부로 나뉘어 각각 한쪽의 손을 들어주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번 법안 상정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양쪽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의 도서정가제, 어떻게 시행되나?

국내에서 도서정가제 논의가 불거지면서 시행과 폐지를 주장하는 양쪽은 각각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내세우고 있다.
그만큼 외국에서도 도서정가제를 둘러싸고 조금씩 다른 정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적이 완벽한 자유경쟁 체제로 유통되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다.
정가 대상 상품의 가격이 높게 유지될 수 있고 소규모 사업자 보호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975년 재판매가격 유지 폐지안이 연방의회에서 가결되면서, 책을 포함한 모든 재판매 상품은 자유로운 가격경쟁 상태로 판매된다.
아마존과 같은 대형 인터넷 서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영국도 1900년 도서정가판매협정(NBA)을 통해 도서정가제가 실시되다 97년 3월 완전 폐지됐다.
캐나다와 벨기에,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등도 도서정가제를 시행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도서정가제를 엄격히 지키고 있는 대표적 나라로는 프랑스를 들 수 있다.
프랑스는 신간서적에 한해 2년간 정가판매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2년이 지난 간행물에 대해서만 가격인하를 허용한다.
독일도 88년부터 도서정가제를 시행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스페인과 그리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도 출판물에 대해서는 가격경쟁을 제한한다.
가까운 일본은 인터넷 서점의 할인경쟁이 없는 대신, 고객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서비스 개선을 통해 인터넷 정가 판매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대형 오프라인 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공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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