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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비지니스] 디지털가전, 소비자들 외면
[e비지니스] 디지털가전, 소비자들 외면
  • 양찬일
  • 승인 2001.04.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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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설치·사용법 어려워…생활 패턴 맞추고 표준화·호환성 문제 해결해야
말로 명령을 내리면 인터넷방송국의 핑클 공연실황을 중계해주는 대화형TV, 음료수가 떨어질 때마다 슈퍼마켓에 자동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인터넷 냉장고, 요리사이트에서 조리법을 내려받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인터넷 전자레인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디지털 정보가전의 모습이다.
환상처럼 느껴지던 미래가 성큼 다가온 듯하다.


그러나 이들 ‘똘똘이 가전제품’이 시장에서 올린 성적표는 환상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수우미에도 못미치는 낙제생 수준이다.
LG전자가 1년 반 전에 야심차게 내놓은 인터넷 냉장고 디오스(DIOS)의 판매량은 지금까지 10여대에 불과하다.
얼마 전 출시된 ????의 인터넷 세탁기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디지털 가전제품들이 이처럼 고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동급 제품보다 비싼 가격이 소비자의 선택을 망설이게 한다.
인터넷 세탁기는 97만원대로 동급 제품보다 20만원쯤 비싸다.
일반 소비자에게는 쉽지 않은 설치과정과 사용법도 판매를 가로막는다.
인터넷 냉장고의 터치스크린으로 웹을 서핑하려면 별도의 LAN 케이블을 연결해야 하고, 네트워크 환경도 설정해야 한다.
냉장고로 인터넷을 쓰기 위한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셈이다.
사용자 습관 쉽게 바뀌지 않아 사정이 이러다보니 애초 판매에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사업부 관계자는 “솔직히 판매보다는 회사의 기술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고 말한다.
현재의 인터넷 정보가전 제품이 겪는 어려움을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로 보는 견해도 있다.
LG전자 냉장고마케팅팀 김영두 과장은 “생산물량이 적은 초기 버전 제품은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며 “가격을 낮추고 기능을 업그레이드한 인터넷 냉장고가 올해 말이나 내년쯤 나오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역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반기에 인터넷 전자레인지로 승부수를 띄울 작정이지만, 시장상황을 낙관하지만은 않는다는 표정이다.
삼성전자 리빙전략마케팅팀 이면수 차장은 “한국인은 전자레인지를 주로 음식을 데울 때 쓴다”며 “인터넷으로 조리법을 다운받는 데 전자레인지를 활용하는 가정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삼성전자가 인터넷 전자레인지를 내수용보다는 수출용으로 키우겠다는 전략을 세운 까닭도 여기 있다.
지난 99년 말에 선보인 삼성 싱크마스터 170MP는 세련된 은색 디자인에 PC 모니터와 TV 수신 기능을 결합한 제품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가격이 400만원에 육박해 샐러리맨들에겐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제품이 출시된 2000년 초반에 고작 매달 100~200대가 판매되는 데 그쳤다.
주요 구매층도 변호사, 의사, 벤처기업 CEO 등 이른바 잘 나가는 전문직 종사자였다.
삼성전자 정보사업그룹 마케팅팀 정용희 대리는 “400만원이면 프로젝션TV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TV 겸용 모니터의 매력이 높을 리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이 제품이 판매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것은 가격이 200만원대로 하락하고부터였다.
지금은 월 평균 850대 정도가 판매되면서 시장에 안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혼수품 시장까지 넘볼 정도라고 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식탁용 TV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매자들이 PC 모니터와 TV 기능을 결합한 싱크마스터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구매자의 80% 이상이 단순히 모니터로 쓰기 위해 싱크마스터를 산다고 한다.
일부 건설회사에 납품된 제품은 아파트 거실의 붙박이 TV로 설치됐다.
전화기에 인터넷 기능을 덧붙인 웹폰을 보급하고 있는 미디어아이의 마케팅 전략도 우리나라 디지털가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현재 이 회사는 서울과 대구의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2천가구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웹폰을 쓰도록 유도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 회사 전략기획실 관계자는 “전화기로 상가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온라인 공동구매도 가능하다며 여러가지 이점을 강조했지만 주민들의 사용빈도는 높지 않았다”고 말한다.
웹폰의 태생적 한계를 제작회사도 인정한다.
PC 인터넷에 길들여진 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아이 관계자도 인터넷을 1시간 이상 사용할 때는 PC를 선택하라고 권한다.
그는 “웹폰의 진가는 전화번호 기록 같은 고급 기능과 30분 이내의 짧은 생활정보 검색에 필요한 인터넷 기술이 결합할 때 비로소 발휘될 것”이라고 말한다.
네트워킹 없는 정보가전은 ‘장난감’ 2005년이면 디지털가전은 세계적으로 3600억달러의 황금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똑똑한 가전시대를 열기 위한 기업들의 질주는 이미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향에 대해선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기존 가전제품에 단순히 인터넷을 덧붙여서는 소비자의 환심을 사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휴먼인터페이스 전문가 이구형 박사는 “현재의 디지털 가전제품은 비행기 수준의 디지털 기술을 무궁화열차 수준의 아날로그 방식에 끼워맞춘 것”이라고 꼬집는다.
예컨대 인터넷 세탁기가 첨단 프로그래밍 방식을 이용해 물과 세제를 절약하게 해준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이 습득하기 어려운 사용법을 채택해 제품의 효용성을 반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주부의 필요성과 활동범위를 잘 고려한 디지털 가전제품이 히트를 칠 것이라고 말한다.
한 전문가는 “하루 일과 중에 주부가 전자레인지나 냉장고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극히 짧다”며 “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싱크대 앞이다”고 잘라 말한다.
디지털 가전제품이 적재적소에 놓일 때 그 기능이 제대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부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찬장 아래쪽에 소형 라디오나 액정 TV를 부착한 주방을 선보인 것은 흥미롭다.
이런 구조에서는 주부가 설거지를 하면서 라디오를 듣거나 곁눈으로 TV를 볼 수 있다.
결국 얼마만큼 소비자의 생활패턴과 밀착되는가에 따라 디지털 가전제품의 성패가 판가름나는 셈이다.
디지털 가전제품의 사활은 ‘디지털’이 단순히 ‘자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구형 박사는 “요즘의 인터넷 가전제품은 20세기 대량생산 시대의 자동화 발상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며 “진짜 디지털은 냉장고와 현관문, 자동차가 하나로 연결돼 사용자와 상호작용할 때 구현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디지털을 구현하기 위해선 개발자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
이 박사는 “소비자가 디지털 기술을 가깝게 느끼면서 새로운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개발방향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은 디지털 가전제품은 게임기에 불과할 뿐이다.
전자부품 연구원 김대희 연구원은 “실용적인 홈네트워킹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 가전업체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 유통업체, 정보통신부 등 관련 당사자들이 제품 표준화와 호환성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가전제품은 ‘미완의 대기’이고, 수많은 장인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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