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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쉿! 토종악기 연주가 들려
[비즈니스] 쉿! 토종악기 연주가 들려
  • 김호준 기자
  • 승인 2001.12.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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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에 비해 손색없다” 인식 전환 목소리… 수입 악기 거품 걷어내기도 한창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서양악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만든 지 100년이 넘는 ‘올드(old) 악기’와 말 그대로 요즘 제작한 ‘현대악기’다.
물론 외국산 제품들이 대접을 받고 있지만 국내 장인이 제작한 ‘현대악기’도 시장 틈새를 비집고 있다.
이 가운데 연주자들과 연주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수만달러에서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명품’ 올드 악기로 연주하고 싶어한다.
오래된 현악기일수록 음색이 맑고 부드럽다는 통념 때문이다.
현대악기를 사는 사람도 이탈리아 크레모나 등 이름있는 지역에서 생산한 제품을 선호한다.
우리나라 장인이 제작한 악기는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수입 올드 악기 시장은 대표적인 수요초과 시장이다.
수입 현대악기 역시 해외 유명지역에서 생산한 제품은 가격이 비싸지만 찾는 사람들이 많다.
물건이 귀하고 수요가 많으면 파는 사람이 행세를 한다고 그동안 명품 수입악기 시장에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일들이 적지 않았다.
최근 몇년간 언론 매체에 공개된 사례만 보더라도 수입악기 시장이 얼마나 혼탁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교수가 개인교습 제자의 악기를 골라주는 대가로 악기상으로부터 10~15%의 리베이트를 챙기는가 하면, 악기상이 고가의 악기를 밀수, 판매해서 폭리를 취하는 사례도 있었다.
악기시장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불미스런 사건과 연루된 악기상과 교수들은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몇몇 굵직한 사건이 터진 이후 수입악기 업계에서는 불법 거래는 많이 줄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불법거래의 원인이었던 심한 수요초과 현상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수입악기 시장에는 거대한 거품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한 악기제조가는 “이전처럼 몇배의 마진을 붙이는 사례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악기 가격에서 30%가 넘는 마진을 붙이는 곳이 많다”고 말한다.
수입악기 없어서 못 살 판 업계 관계자들은 수입악기 시장의 거품이 걷히지 않는 것은 수입, 유통과정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악기 수입상들은 점포 한두곳 정도를 운영하면서 값비싼 수입악기는 소량만 취급하고 있다.
명품악기를 구매하는 데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한두개씩 사온다는 얘기다.
악기상들은 해외 딜러를 직접 만나거나 제작 경연대회, 경매, 전시회 등에 참가해서 명품악기를 구입한다.
해외에 나가 물건을 구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마진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올드 악기의 경우 골동품으로 분류돼 관세가 붙지 않는 대신 제품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복잡한 통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올드 악기를 감정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기 때문에 세관에서는 구입한 나라의 영사관 사인이 들어간 공신력 있는 악기 감정서를 요구한다.
악기 감정서말고도 송장, 과세신고서, 위임장 등 제출서류가 많고 심사도 까다롭다.
하지만 수입악기를 들여오는 데 드는 비용은 수입악기 가격에 비하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들은 대부분 악기 수입상들이 구입 가격이나 영업 비용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얼마나 마진을 남기는지는 파는 사람만 안다고 말한다.
해외 딜러가 우리나라에서 악기 전시회를 여는 경우도 있다.
해외 딜러들은 한국을 황금시장으로 보고 고가의 악기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전시회용으로 들여오는 악기는 통관이 쉽기 때문에 소비자가 제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전시회에서 매매계약이 성사되면 악기는 다시 본국으로 반송된 후 정식 수입절차를 거치게 된다.
하지만 이 방식 역시 호텔 스위트룸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제반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송우무역, 마진 없이 악기 중개 수입악기 시장의 거품을 빼려는 움직임이 한편에서 일어났다.
마진대신 중계 수수료만 받고 악기거래를 하겠다는 얘기다.
송우무역은 지난 10년 동안 해외딜러와 소비자 사이에서 통관 절차를 대행하는 역할을 해왔다.
송우무역 송진호 사장은 “악기 거래에 직접 개입할 경우 잡음이 발생할 소지가 있어 그동안은 당사자간 합의가 끝난 후 수입과 통관에 따르는 서류 업무만 대행해주었다”고 밝힌다.
송우무역은 통관 절차를 대행하면서 악기 가격에 따라 2~5% 정도의 수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11월부터는 세계적인 악기 딜러인 베어(Beare)사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고 통관 업무말고도 악기전시와 매매상담을 겸하고 있다.
송우무역은 베어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후에도 수입대행 수수료만 받을 계획이다.
송진호 사장은 “직접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계 역할만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수수료말고 마진은 없다”고 밝힌다.
송우무역은 고가의 수입악기말고도 한국 장인들이 만든 악기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송진호 사장은 국산 악기의 품질은 수입악기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현악기 제작 수업을 받은 수십명의 장인이 있습니다.
그들의 악기 만드는 기술은 해외 제작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 송진호 사장은 한국 장인들이 만든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취지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어사의 제품과 한국 장인의 악기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고 밝힌다.
송우무역에 전시된 수입악기 가격은 3천만원에서 1억5천만원 정도이다.
수입악기 시장에서 이 정도 가격은 중가 제품에 속한다.
한국 장인의 악기는 350만원에 1천만원이다.
국산악기는 수입악기보다 몇십배 싸지만 수입악기 선호 현상 때문에 국산악기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 김현주 회장은 한국 장인의 악기는 잘 팔리지 않아 대부분의 장인들은 제작에만 전념하지 못하고 악기 수리, 악기상 운영 등을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김현주 회장은 학생들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값비싼 수입 악기를 사는 경우가 많다며 국산 악기를 가지고 오랜 시간 연주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한국 악기가 외면받는 이유는 수입악기가 좋은 소리를 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송진호 사장은 오랜 시간 길을 들인 악기가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장인의 악기도 훌륭한 연주자가 잘 길들이면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못지않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김현주 회장 역시 고가의 수입악기여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비싼 악기로 연주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오케스트라에 입단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유명 연주단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해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악기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정상급 악단인 금호 현악4중주단이 한국 장인이 만든 악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해 ‘국산 악기’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금호현악4중주 단원인 김의명씨는 “얼마 전 국산 현악기 전시회에 가보니 악기의 질은 물론 구석구석 마무리에 배어 있는 장인정신까지 외제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고 밝혔다.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이경선씨는 국산 악기를 연주해보고 마음에 들어 제작자인 이재곤씨에게 구매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수입악기의 거품을 빼려는 노력이 시작됐고 우리나라 장인들에 대한 평가도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
2001년이 저무는 때, 우리나라 서양악기 시장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연주’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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