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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책읽기]<나이듦에 대하여> 박혜란/웅진닷컴
[이권우의책읽기]<나이듦에 대하여> 박혜란/웅진닷컴
  • 이권우/ 도서평론가
  • 승인 2001.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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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나이가 주는 삶의 무게 ‘불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 나는 20대였다.
그때 나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아니, 이 문장은 바로잡아야 한다.
20대였던 우리 모두가 그러했다, 라고.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나는 그 시절 내내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젊음이 죄라고 생각했고, 치욕스럽게 질식사하느니 스스로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고 되뇌었다.
죽음에의 유혹이 강해지면서 나는 가끔 차라리 파파 노인이 되길 소원하기도 했다.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 아무런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치매’ 상태를 원했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현실 앞에 비겁했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어느날 갑자기 폭삭 늙어버리지도 못했다.
어정쩡하게 살아남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로 80년대를 넘겼고, 90년대에는 돛이 꺾인 난파선이 되어 표류했다.
그리고 새 세기를 맞이했고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세월의 담금질에 시달린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춘다면, 아, 그 아름답던 청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가득 담긴 초라한 몰골만이 남아 있으리라. 그래도 내가 지금껏 구차한 삶을 꾸려온 데는 이유가 있다.
세월을 약 삼아 견디다 보면, 마치 몸무게가 0킬로그램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부피는 있으나 무게가 없는 사람이라, 이 얼마나 황홀한 상상인가. 바람이 불면 몸이 가벼우니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고, 비가 오면 부피가 있으니 젖어 물과 함께 흐를 수 있을 터이다.
나이를 먹다 보면 일상의 덫을 날렵하게 건너뛰고 좀더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여전히 ‘진보사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록 비유였지만, 몸무게가 0킬로그램이 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배만 나오더니, 급기야 저울이 가리키는 숫자가 90을 넘어서려는 순간의 아찔함이라니!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은 젖은 외투처럼 더 무거워져 갔다.
그러기에 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비가 와도 도대체 흐르지 않았다.
일상이라는 덫에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떨쳐버릴수록 더 깊이 조여오는 덫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집어든 책이 박혜란의 <나이듦에 대하여>(웅진닷컴 펴냄)이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더라도 이 책을 ‘종합감기약’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단박에 나이듦의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두 눈 비비고 아무리 찾아도 이 세상에 그런 책은 없다).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나이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곱씹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각별히 나이들며 지은이가 깨달았다는 것에서 감동을 받았다.
요약하자면, 느슨하게 살자는 것이니, 우리 인생이 꼭 무언가를 남겨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 그 첫째다.
지나고 나니 인생은 짧은 즐거움과 긴 괴로움의 연속이었다는 것은 두번째 깨달음이다.
마지막은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불행은 모든 사람앞에 평등하다.
나이 들어 이 정도만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에 깊이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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