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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학권력> 강준만 /개마고원 펴냄
[서평] <문학권력> 강준만 /개마고원 펴냄
  • 최재봉/<한겨레> 문학기자
  • 승인 2001.12.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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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검은 핵심을 겨누다

지금 한국문단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강준만’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문단의 ‘권력자’와 ‘패덕자’들은 이 유령의 출몰에 따라 솜털을 곤두세우거나 신경줄을 긴장시키고는 한다.
그가 퍼붓는 독설과 힐난에 당사자들은 펄쩍 뛰거나 코웃음을 치지만, 적지 않은 ‘구경꾼’들에게 강준만의 작업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준다.


강준만의 작업이 문단의 핵심으로부터 환영받을 리는 없다.
그가 겨냥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기 때문이다.
유력한 문학 출판사들과 거기서 나오는 문학잡지들, 창작이나 평론으로 일가를 이룬 많은 중진과 원로들이 그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는 한다.
그는 사정없이 짓씹고 물어뜯는다.
그의 비판에 예외나 인정은 없다.
그는 악역을 자처한다.
‘나를 얼마든지 욕하라,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하는 말을 새겨 들어라.’ 남들을 죽어라고 욕하는 사람답게 그는 남들의 비난과 모함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니 그러는 척한다(그라고 어찌 상처의 성감대가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비판할 것을 비판하는 일이고, 그를 통해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는 일이다.



돈과 언론을 섬기는 문인들

언론학자 강준만의 문단 비판이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적 언론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 놓여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와 그 친구들’을 향해 거침 없고 그침 없이 주먹을 날리던 그가 공격의 방향을 문단 쪽으로 틀었다면, 그것은 곧 <조선일보>와 문단 사이에 모종의 유사점과 친화적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적어도 그가 판단하기에는 그러하다). 새로 내놓은 책 <문학권력>(개마고원 펴냄, 1만원)에서 강준만은 그가 포착한 혐의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문단과 문인들의 자성을 촉구했다.


강준만의 문단 비판에 가해지는 그럴듯한 반론의 하나는 그가 국외자라는 사실이다.
언론학자가 문학과 문단 사정을 안다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것이다.
강준만 역시 그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는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문학연구자도 아니며, 창작자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문단의 문제는 내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상식 수준에서 판단해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내가 문학을 아무리 몰라도 나에겐 지금 내가 이 책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수준의 개입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문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문단이 상식 수준의 과오를 범할 때엔 그 누구건 상식의 힘으로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개입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지 화를 낼 일이 아니다.


또 하나, 언론학자가 문학과 문단의 문제점을 고치고자 발벗고 나서게 된 것은 그에 대해 문단 내부의 힘과 의지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해관계와 인정으로 얽히고 설킨 문단 내부에서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이는 없거나 드물 것이라는 게 강준만의 판단이다(공식·비공식적으로 갖은 모멸과 모함에 시달리는 김정란, 그리고 결국 대학원을 자퇴하기까지에 이른 이명원의 경우는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 한국 문단이라고 하는 ‘닫힌 종교’는 썩어도 너무 썩었”으며, “‘문학권력’(‘문학자본’도 포함)의 문제에 대해 여러 비판적인 문인들이 제기한 비판적 견해를 종합해서 책으로 내놓는 일은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부패의 지표는 돈이다.
문단이 썩었다면 거기에는 필경 돈이 개입되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준만은 첫째 장에서부터 한국 문학이 ‘두 M신’을 섬긴다고 공격의 포문을 연다.
돈(Money)과 대중매체(Mass Media), 그러니까 언론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교수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은 이런 판단은 단행본 <문학권력>의 기저음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일보>라는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에 매진해 온 언론학자로서 그가 문학과 언론의 유착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돈 신’에 대한 지적 역시, 특히 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이 시종 상업주의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어지는 7개의 장은 ‘두 M신을 섬기는 닫힌 종교’로서 한국 문학과 문단의 치부와 한계를 세목별로 점검한다.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인가?: 문학비평을 비평한다’는 제목의 장은 이른바 ‘주례비평’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평론가이자 철학자인 김진석이 <빈말하는 텍스트>라는 글에서 ‘동족상찬(同族相讚)의 비극’이라는 신조어로 꼬집은바, 실질과 무관한 찬사의 남발은 한국 문학의 빈곤과 타락에 크게 기여했다.
90년대 이후 해설과 발문과 표사(책 뒷표지의 짧은 추천사)를 통해 공표된 그 많은 ‘성과’와 ‘경이’와 ‘행복’은 한국 문학의 진짜 몫은 아니었던 것이다.


평균을 내본다면 하루 한개 꼴은 될 그 많은 문학상은 부질없는 부풀리기와 허무한 찬양의 외화(外化)인 셈이다.
이 책의 제3장 ‘‘제도적 사기 혹은 권위 훔치기의 합법화’: 문학상 제도를 비판한다’는 외화내빈의 표상이라 할 문학상 제도의 맹점과 기만을 문제삼는다.
다음 장 ‘문학의 본질은 언론 플레이인가?: 문학을 왜곡하는 ‘문언유착’’은 앞에서 문제삼은 두 M신 중 하나인 매스미디어와 문학의 ‘불륜’에 메스를 들이댄다.



문학권력 비판의 종합판

다음 네 개의 장은 각자 권위의 문학잡지를 발행하는 대표적인 문학 출판사 네 곳에 대한 비판이다.
‘‘민족문학론’은 깃발을 내렸는가?: <창작과 비평>의 정체성과 오만’ ‘비판을 금기시하는 개발독재식 문학관?: <문학과 사회>의 오만과 자기도취’ ‘이문열과 ‘침묵의 카르텔’: 출판자본 민음사는 건강한가?’‘문학판의 <조선일보>인가?: <문학동네>의 성장 신화를 해부한다’라는 각 장별 제목은 본문의 내용을 다소 자극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남진우에 대한 권성우의 재비판을 부록처럼 포함한 <문학권력>은 그 동안 제기되었던 문학권력 비판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새로운 사실이나 관점이 제기되기보다는 기존 비판을 ‘짜깁기’했으며, 문학과 문단의 다면적·다층적 현실을 너무 어둡게만 착색했다는 한계를 지니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권력>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내부에 있는 사람이든, 그를 비판하는 쪽이든, 그도 저도 아닌 한갓 ‘구경꾼’이든 ‘문학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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