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미국] 엉터리 회계감사 ‘망신살’
[미국] 엉터리 회계감사 ‘망신살’
  • 강남규/ <한겨레> 국제부
  • 승인 2002.01.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엔론의 부실회계 눈감아준 아더앤더슨 법정에… 언스트 앤 영도 불법혐의 조사받아 19세기말 미국의 신문 <뉴욕트리뷴>의 편집장이면서 카를 마르크스를 유럽 통신원에 임명해 혁명가의 고픈 배를 달래줬던 호레이스 그릴리는 '철도회사인 ‘이리철도’가 내놓은 회계 보고서를 보면 알래스카는 열대지역이고 딸기가 자라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고 비꼰 바 있다.
그후 100여년이 흐른 2001년 연말 미국 월가에서는 그릴리의 수사가 되살아났다.
'엔론의 회계장부에는 알래스카가 열대지역이고 딸기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 미국의 ‘에너지 공룡’ 엔론이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낸 직후 기업들의 회계투명성과 회계법인들의 진실성이 다시 한번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엔론의 투자자·노동자 등이 최근 이 회사 경영진과, 16년간 회계감사를 맡아온 회계법인 아더앤더슨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엔론은 알래스카를 열대지역으로 바꿔놓는 데 확실히 성공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2000년 ‘최고의 경영자’로 선정한 케네스 레이 회장과 제프리 스킬링 사장은 1997~2000년에 수익을 5억9100만달러(7600여억원)나 부풀리고, 부채 6억2800만달러(9400여억원)를 숨기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주주들이 부풀려진 경영실적에 취해 있는 동안 이 회사는 파생상품 거래를 해 10억달러의 손실을 입고도, 파생상품 투자손실은 회계장부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기업회계 규정을 악용해 그 실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편법·탈법으로 얼룩진 엔론의 회계장부 엔론의 부풀려진 회계장부와 회계법인 아더앤더슨가 준 면죄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지난해 초 에너지산업 규제 철폐 등에 힘입어 이 회사의 주가는 2000년 5월 주당 80달러 선까지 급등했다.
또한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은 이 회사의 자금력 등을 높이 평가하며 주식을 매수추천 1순위에 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수많은 투자자들이 ‘경기방어주’라며 엔론의 주식을 사들였고, 엔론의 노동자 1만7천여명도 자신들의 노후대책인 기업연금(401k) 펀드에 자사주를 대량 편입했다.
그러나 화려한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조사 결과 엔론이 순익을 부풀리고 부채를 은익한 혐의가 지난해 7월에 드러나자 주가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벼랑 끝에서 추진한 경쟁기업 다이너지와의 합병마저 무산됐다.
이에 따라 파산신청을 낸 시점인 11월에는 주가가 36센트까지 폭락했다.
닷컴기업이 아닌 기업으로선 보기 드물게 주가가 90% 이상 폭락한 것이다.
아더앤더슨은 변명하고 있다.
'경영자들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외부자일 수밖에 없다.
'아더앤더슨의 임원인 조지프 베라디노는 최근 열린 엔론 사태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서 케네스 레이 등 이 회사 경영진의 불법과 파렴치한 행위들을 들먹이며, 아더앤더슨도 피해자임을 부각시키면서 '엔론 감사위원회에서 불법행위의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아더앤더슨은 한국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투명회계의 전도사 역할을 한 회사이지만, 엔론 사태에 관한 이번의 변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아더앤더슨은 2000년 가전제품 업체 선빔의 부실회계를 눈감아준 혐의로 제소된 바 있다.
앨 던랩이 96년 부실 덩어리인 선빔의 최고경영자에 선임된 이후 수많은 직원들을 해고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도매상들에게 제품을 떠안기는 수법으로 매출액을 부풀려 97년 흑자를 보고했다.
던랩은 일약 스타로 등장했고 그가 펴낸 선빔 정상화 회고록은 그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선빔의 그해 매출액 1억8900만달러 가운데 적어도 6200만달러가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외부감사를 맡은 아더앤더슨은 그의 장부조작을 알고도 눈을 감아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아더앤더슨은 92~96년 사이에 북미 최대 폐기물 처리업체인 웨이스트 매니지먼트의 회계감사를 맡고 있으면서 10억달러에 이르는 매출 부풀리기를 눈감아줬다.
증권거래위원회의 고발을 당한 아더앤더슨은 지난해 7월 700만달러의 벌금을 무는 데 합의하고 ‘웨이스트 매니지먼트 덫’에서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알래스카를 열대지역으로 바꾸는 데 일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회계법인은 아더앤더슨만이 아니다.
아더앤더슨과 함께 세계 ‘빅4 회계법인’ 가운데 하나인 언스트앤영은 파산한 보험회사 에퀴터블 라이프의 부실회계와 관련해 영국 회계감독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빅4 가운데 하나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임직원들은 사실상 내부자 거래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들은 2000년 자신들이 감사를 벌이고 있는 법인의 주식을 대량 보유한 혐의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빅4에는 끼지 못하지만 미국 회계법인 가운데 상당수들은 한푼의 순익도 내지 못하는 미국 닷컴기업들의 실적전망을 장밋빛으로 칠해 주주들의 눈을 멀게 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주식을 받아 챙기도 했다.
회계법인들은 '경기침체로 파산 기업이 많아지면 당연히 회계법인들이 비판을 받는다”며 '그동안 기업의 회계 투명성 제고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미국 회계법인들은 그동안 미국 기업의 회계 투명성과 투자자 보호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 뉴욕주 의회가 1896년 회계사 자격요건을 입법화하면서 처음 나타나게 된 CPA(공인회계사)는 ‘투명’과 ‘정직’의 상징이었다.
의회·증권거래위원회, 제도 개선 나서 미국인들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실이지만 공인회계사들이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기업의 회계 투명성은 세계 최하위였다.
당시 미국 최대기업인 이리철도의 재무이사 다이엘 드루와 임원인 짐 피스크, 제이 굴드 등이 회계장부를 조작해 순익을 뻥튀기 했을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주식에서 채권으로, 채권에서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쌍방향 전환사채’와 불법 신주를 마구 찍어내 시장에 풀어놓을 때 당시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영국 런던의 투자자들은 앉아서 그 피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지금 신흥국가 기업들의 편법과 탈법 행위를 질타하고 있지만, 한세기 전에는 그들도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던 셈이다.
월스트리트 역사가들은 이처럼 ‘날강도’나 다름없던 미국 기업의 경영자들에게 회계의 투명성과 기업정보 공개의 중요성을 가르친 이들이 바로 공인회계사들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엔론사태 이후 이들은 ‘개혁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미 의회와 증권거래위원회는 회계감사와 경영 컨설팅을 동시에 모두 할 수 있는 회계법인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회계감사를 받는 기업에 대해서는 경영 컨설팅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