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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반도체 강국 입지 '흔들'
[비즈니스] 반도체 강국 입지 '흔들'
  • 박효상 기자
  • 승인 2002.0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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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에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온 하이닉스반도체 처리 문제가 빠르게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두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을 두루 충족시키는 ‘묘수’를 내놓음으로써 ‘하이닉스 해법’의 실마리가 풀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이닉스 박종섭 사장은 최근 '하이닉스가 D램 사업부문을 분리해 마이크론에 전부 매각하고, 마이크론의 투자를 유치해 비D램 부문에만 집중하기로 의견접근을 이뤘다'고 밝혔다.
3일 채권단 고위 관계자도 '하이닉스의 D램 사업 부문을 40억~50억달러(5조~6조원) 가량 받고 매각할 계획'이라며 '마이크론과 이런 내용을 뼈대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이달 내 체결하고, 3월 말까지는 본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론의 재무상태가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대로 본계약이 체결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지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채권단은 하이닉스에 빌려준 돈을 거의 대부분 돌려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과거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할 당시 금액이 6조5600억원(현금 2조5600억원, 부채 약 4조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헐값 매각 시비를 우려하지 않아도 될만한 수준이다.
오히려 D램 부문의 3분의 1 규모인 비D램 부문이 남아 있으므로, 반도체 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잘 팔았다는 칭찬까지 들을 만하다.
하이닉스로서는 부채 축소 및 현금유동성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한때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였던 하이닉스는 아남반도체나 동부전자, 혹은 대만 업체 수준의 군소업체 중 하나로 전락하는 것만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잔존법인인 비D램 부문도 마이크론이 19.9% 정도의 지분을 갖게돼 사실상 ‘미국기업화’한다.
이 모두 두 회사가 합병을 배제하지 않는 전략적 제휴를 추진하기로 전격 선언한 지 불과 한달여 만에 이뤄진 일이다.
‘정부의 시나리오’ 해석 설득력 얻어 이처럼 반도체 업계의 지각변동을 초래할만한 ‘초대형 딜’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전문가들도 있다.
두 회사가 협상 개시를 선언한 지 한달여 만에 자산 15조원 이상, 매출액 3조원 이상의 거대기업을 ‘분해’할 정도의 의견접근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전에 합의된 모종의 시나리오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 금융당국, 국책은행장 등이 경쟁적으로 하이닉스와 마이크론간의 협상 진행과정에서 제휴의 방식이나 조건, 성사 시기와 금액 등을 언론에 공개하는 이례적인 현상도 이런 시나리오에 근거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 하이닉스 구조조정특별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협상은 마이크론이 먼저 제안해온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외국계 컨설팅 회사가 먼저 전략적 제휴 안을 만들어 한국 정부에 제안했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두 회사가 협상 테이블에 앉게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 시기는 대략 마이크론의 최고 경영자인 스티브 애플턴 회장이 한국에 방문한 때를 전후한 10월 중순에서 말께'라고 덧붙였다.
업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도 '대개의 전략적 제휴 협상이 수개월에서 많게는 몇년도 걸리는데, 애플턴 회장의 방한 때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만난 이후 협상 진행속도가 빨라졌다'며 '이는 마이크론이 하이닉스 인수와 관련해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특혜를 약속받은 것으로 추측할 만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반도체 업체의 한 관계자는 '애초 두 회사의 제휴 협상은 대등한 제휴라기보다는 하이닉스가 매물로 나와 있고 마이크론이 값을 매기는 일종의 청산과정과 유사하다'며 '얼마 전만 해도 ‘하이닉스 죽이기’의 선봉장이었던 마이크론에 공장설비를 비롯한 기밀사항을 모두 공개하고 실사하게 한다는 것은 제휴가 성사된다는 보장이 없다면 어린이도 하지 않을 일처리 방식'이라고 말했다.
사전에 합의된 시나리오가 있었는지를 당장 확인할 길은 없다손 치더라도, 이 대목에서 한 반도체 애널리스트의 경고는 귀담아 들을만 하다.
그는 '정부가 마이크론과의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는 적어도 하이닉스를 지원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다'면서 '지금은 정부가 앞장서 하이닉스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 꼴이어서 만일 이번 협상이 틀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경제 도움 안된다' 반론도 누가 먼저 제안을 했든, 그것은 협상이 이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단지 '이런 하이닉스 경영 정상화 방안이 과연 옳은 것이냐?'는 질문에 하이닉스는 물론 하이닉스 채권단이나 정부 관계자 모두 자신있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그 이유는 ‘미우나 고우나’ 그동안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쳐왔던 한 축이던 반도체산업(하이닉스)을 최대 경쟁국의 경쟁사에게 송두리째 넘기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채권단이나 정부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굿모닝증권은 '마이크론과 하이닉스간의 제휴가 과거 마이크론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간의 자산부채인수(P&A) 방식과 비슷한 구조로 진행되고 인수대금도 주식으로 지불한다면 큰 돈 안들이고 하이닉스를 인수할 수 있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마이크론의 이해에 철저히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마이크론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은 곧 한국 기업에는 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반도체 경기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시점에서 사실상 청산에 가까운 방식으로 하이닉스 처리가 진행되는 것은 채권단과 정부에게 유리할지는 몰라도 하이닉스와 일반 국민들이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많다.
또 하이닉스로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던 D램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비메모리반도체, 플래시메모리, S램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에서 선진 경쟁업체들과 힘겨운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당장 임직원들의 고용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 최고의 D램 회사를 꿈꿨을 임직원들의 비전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국민 또한 상대적인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D램 산업 경쟁력을 가지고 있을 때의 삼성전자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기여도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의 D램 부문을 인수하게 되면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올라서게 된다.
이 경우 삼성전자의 시장 지배력은 현격히 약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지난해 12월 반도체 비수기에 D램 고정 거래 값을 연이어 올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삼성전자의 가격 결정권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고 보면, 이런 권한의 상당부분이 마이크론으로 넘어가는 데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도 '정부가 하이닉스 문제 해결을 서두르고, 처리 방식도 향후 문제가 재발하는 형태가 아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며 '정치논리가 산업논리를 앞설 때 그 결과는 좋지 않은 쪽으로 나타나는 사례는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팔 때 팔더라도 제값 받아야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하이닉스 처리 문제는 정부의 방침이나 마이크론의 논리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방식에서 탈피해, 팔 때 팔더라도 제 값 받고 팔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장 급선무는 반도체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고 PC 경기도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으므로 시장 흐름을 냉철하게 지켜봐가며 마이크론과의 전략적 제휴 협상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증권 우동제 애널리스트는 '최근 급격하게 호전되고 있는 반도체 가격 회복에 힘입어 하이닉스의 자생력은 지난해 12월에 단행된 채무조정(부채감소)을 계기로 크게 향상되고 있다'며 '올해 하반기에는 흑자경영을 논할 수 있는 경영여건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최악의 경우 '마이크론과의 전략적 제휴가 무산될 경우에도 독자생존 가능성은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반도체 경기가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배경에는 하이닉스와 마이크론간의 전략적 제휴 협상과 같은 업계 내 구조조정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돼 있다는 측면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번 전략적 제휴 협상의 성패 여부가 파는 것 그 자체보다는 얼마나 제 가치를 받고 팔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현재의 협상 여건은 하이닉스에 그다지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신국환 구조조정특위 위원장이 취임시 밝힌대로 '하이닉스 문제는 산업적 측면을 고려해, 국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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