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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이제 '유로'로 통한다
[세계경제] 이제 '유로'로 통한다
  • 유럽=함석진/ <한겨레> 국
  • 승인 2002.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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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영국·덴마크·스웨덴을 제외한 유럽연합(EU) 12개국 3억1천만명은 단일통화 유로의 역사적 통용 개시와 함께 새해를 맞았다.
이들은 지난 1958년 하나의 유럽을 꿈꾸며 경제공동체(EEC)를 출범시킨 지 45년 만에 완전한 경제통합을 이뤄낸 세대로 기억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예상치 않은 문제점이 드러날지 모르지만, ‘통일 화폐’ 유로화는 아직까진 비교적 순조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
독일 유력신문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 등 유럽 언론들도 ‘순조롭게 열린 유럽의 미래’ 등의 제목으로 유로화 출범을 알리는 기사들을 잇달아 내보내며 안도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머니 돈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화폐 개혁’ 앞에,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없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2일 오후(이하 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 한모퉁이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쟝 콤파니에(45)는 불만부터 털어놨다.
“프랑화로 숫자를 누르면 유로화로 계산돼 나란히 표기되는 계산기를 구해 쓰고 있지만,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액세서리를 계산하다 보면 셈이 자꾸 헛갈리잖아요.” 프랑스 금융당국은 2월17일까지는 프랑화와 유로화를 같이 쓸 수 있도록 하되, 가게 주인들에게는 거스름돈을 반드시 유로화로만 주라고 요구했다.
다른 나라들도 화폐 병용기간만 조금씩 다를 뿐 기존 화폐를 빨리 거둬들이기 위해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계산이 복잡한 건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1유로는 6.55957프랑이고, 반대로 1프랑은 0.15245유로다.
프랑으로 표시된 가격이 유로로 얼마쯤 되는지 알려면 프랑 가격에 0.15245를 곱해봐야 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의 가격표시 규정대로 소수점 아래 셋째자리에서 반올림해 따지더라도 계산기 없인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자 프랑스 금융당국은 혼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프랑 가격+프랑 가격의 절반)/10=유로 가격’이라는 간단한 암산요령까지 만들어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4프랑짜리 머핀을 공식에 따라 계산((4+2)/10)하면 대략 0.6유로가 된다.
그렇더라도 돈의 표시 숫자가 2000분의 1로 떨어진 이탈리아 국민들이 대표적인 경우이지만, 유로랜드 소비자들이 달라진 가격에 씀씀이 감각을 맞추려면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로 현금 거래를 하는 가게들은 적지않은 추가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독일 전역에 78개의 체인점을 두고 있는 브루너베이커리의 스테판 브루너(37) 이사는 “바코드 판독기와 전산시스템의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데만 10만마르크(약 6500만원) 이상 들었다”고 말했다.
거스름돈으로 나갈 엄청난 양의 유로화 지폐와 동전을 보관하는 것도 만만찮다.
브루너 이사는 “금고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지만 나중에 유로화 공급이 달릴 수도 있다는 은행 말을 듣고 돈을 받아다가 다른 장소에 쌓아뒀다”며 “보안 문제도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많은 상점들은 새 화폐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샹제리제 거리에 있는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에서는 대부분의 손님들이 프랑화 동전이나 지폐를 냈지만 점원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잔돈을 유로화로 거슬러주고 있었다.
점원 루이 팽토(23)는 “처음에는 계산이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제 간단한 셈은 암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각국 통화당국도 기존 화폐 통용이 금지되는 2~3개월 뒤면 당장 소비자들이나 가게에서 느끼는 혼란과 불편이 완전히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표나 신용카드 사용비율이 현금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도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몇몇 업종들은 12개 나라의 화폐가 통일돼 소비자들이 복잡한 환율 계산없이 한눈으로 상품의 가격을 비교할 수 있게 된 점을 발빠르게 파고들어 소비자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자동차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싼 그리스·스페인의 자동차 대리점들은 유로랜드 다른 나라들에 판촉직원들을 파견하거나, 고객 명단을 확보해 가격 비교 우편물을 대량으로 발송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에서 여행사를 하는 한국 동포 김영규(45)씨는 “스페인에 있는 프랑스 자동차 대리점에서 보내온 상품 목록을 보니 같은 차가 독일보다 15%나 싸서 구입을 결심했다”며 자신도 같은 방법으로 여행상품을 팔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은 유로화에 대한 평가와 전망은 크게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영국 런던경제대학(LSE) 폴 테일러 교수는 “유로화는 소득수준·시장규제·소비관행 등이 서로 다른 나라의 화폐를 동등한 가치를 지닌 하나의 화폐로 강제 통합한 전례없는 실험”이라며 “앞으로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점도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독주 막을 대안 세력?

유럽연합(EU) 12개국이 똑같은 동전과 지폐를 사용하게 됐다는 것은 1967년 경제공동체(EEC) 출범을 거쳐 93년 관세 없는 단일시장을 선포한 이후 ‘하나의 유럽’을 만들기 위한 유럽 제국의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로화 사용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통합된 연방국가가 아닌 이상 불안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른 문제점은 이미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있다.
금리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쥐고 있지만 지출 등 세부 통화정책은 여전히 개별 국가에서 통제한다.
그렇다 보니 경제사정이 다른 여러 국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경기침체에 허덕이는 독일의 경우 유럽중앙은행의 보수적인 금리정책이 여간 불만스러운 게 아니다.
유럽중앙은행은 지난해 11월초에 올 들어 11번째 금리를 내린 미국을 의식해 마지해 기준 금리를 0.5%포인트 내렸지만, 독일 정부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며 추가 금리인하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유럽지역에서는 이례적으로 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인 아일랜드는 최근 집값이 폭등하는 등 경기과열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는 유럽중앙은행에 “금리를 자꾸 내리면 어떻하느냐”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금리를 쥐고서 유럽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높은 실업률과 더딘 성장까지 해결할 능력은 없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또 캘리포니아주가 경기과열 양상을 빚고 텍사스주가 침체 기운을 보이면 캘리포니아에서 거둔 세금을 텍사스에 실업수당으로 제공하는 식으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수위를 자동적으로 조절한다.
유럽엔 그런 충격완화 장치가 없다.
모건스탠리증권의 에릭 채니 분석가는 “유로화 통용 국가들 간에 경제편차를 조절하려면 연방세 같은 세금을 거둬 재분배가 이뤄져야 하는데 정치적 합의 없인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영국·스웨덴·덴마크 등 유로화에 참여하지 않은 유럽연합 국가들과도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
영국은 유럽에서의 초강대국 등장을 원치 않는 미국과의 전통적인 특수관계를 의식해 “미국의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는 유럽 국가들의 야유를 들으면서도 유럽통합의 움직임에 반기를 들어왔다.
영국의 이런 정책은 특히 유로화가 출범 이후 지속적인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자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듯했으나 파운드화의 상대적인 강세로 투자 기업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영국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국제금융의 중심지인 런던 ‘시티’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은행도 지난해 이미 전체의 10%에 이르는 53개 은행이 빠져나갔다.
외환은행 런던지점 민승기 과장은 “아직 미국 금융기관들이 버텨주고 있지만 런던은 언제든 유럽중앙은행이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국제금융 허브의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덴마크와 스웨덴도 복지예산을 유로화권 국가들의 수준으로 낮출 수 없다며 유로화 편입을 미루고 있다.
이들 국가도 결국엔 국내 기업들의 압력에 못이겨 유로화권으로 들어올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지만 경제통합이 정치적 결합 문제까지 이어질 땐 유럽이 다시 어떤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모를 일이다.
유로화를 반대하는 유럽 45개 단체의 연합체인 ‘팀’을 이끌고 있는 전 유럽의회 의원 한스 린드퀴스트는 “유로화를 통한 경제적 결합은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거대국가의 출현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각 국가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유럽 생명력의 공멸은 곧 세계평화의 균열을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독일 정치평론가 콜 바비로브스키는 “유로화의 성공은 많은 역외 국가들에게도 미국 달러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서 벗어나 또 하나의 기채통화가 생겨났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며, 통합 유럽은 공산권 붕괴 이후 미국의 독주를 견제할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로화가 지난 50년대 지긋지긋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며 처음으로 유럽통합의 닻을 올렸던 당시 유럽인들의 ‘소박한’ 소망의 새로운 전령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분열의 씨앗을 잉태한 ‘독재군주’가 될지 세계는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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