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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거인들에 밀려난 지역유선
[미국] 거인들에 밀려난 지역유선
  • 오스틴=이광석 통신원
  • 승인 2002.0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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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미디어독점'이란 저서로 유명한 벤 바그디키언은 미디어 시장의 독점이 시장의 경쟁을 제거하고 독점가격을 형성시키며 보수적인 목소리를 확산시키는, 근본적인 해악으로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저서는 1983년부터 이제까지 여섯번 개정됐다.
그때마다 저자는 시장에서의 독점 확대 상황과, 그 과정에서 인수합병 등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새로 등장한 기업들의 명단을 책에 추가했다.
만약 그가 올해 다시 자신의 저서를 개정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가로 기록해야할 것 같다.
우선 지난해 미디어 시장에서 벌어진 두건의 메가톤급 합병이다.
지난해 7월8일 케이블 전송업체 컴캐스트는 AT&T 브로드밴드를 470억달러에, 8월6일에는 위성방송 업체인 에코스타가 제너럴모터스의 자회사인 휴즈일렉트로닉스의 디렉티브이를 240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법무부와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반독점법 위반여부 심사결과만 통과하면 확정될 이 두건은 합병의 규모로 볼 때 지난해 전세계에서 1위와 3위였다.
이로써 컴캐스트와 에코스타는 시청자 가입비로만 연간 600억달러의 수입을 거둬들이는 미국 내 유료 텔레비전 시장 중 40%를 장악하게 된다.
컴캐스트는 2280만명의 유선방송 가입자를, 에코스타는 1700만명의 위성방송 가입자를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직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은 900만가구의 소비자들은 앞으로 위성쪽으로 에코스타에 가입하거나, 케이블쪽에서 컴캐스트 또는 AOL타임워너에 가입할 것인지 하는 선택지만 갖게 됐다.
독립 유선방송업체들의 시련 지난 96년 연방통신위원회 윌리엄 케너드 위원장은 기업간 합병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탈규제 정책을 채택했다.
전화, 케이블, 텔레비전 업체들이 서로 자유경쟁을 벌이도록 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채널을 제공하고, 경쟁을 통해 유료방송 가입비를 낮추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예상과 달리 독점을 강화해 AT&T, 컴캐스트, AOL타임워너 등이 케이블 시장의 70%를 좌지우지하게 만들었다.
또 케이블 업체들은 독점가격을 형성해 가입비가 96년 이래 35%나 올랐다.
게다가 접시안테나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시청이 가능한 위성방송을 송출하는 거대 업체들이 시청자들을 끌어모음으로써, 지역에 기반한 영세 유선방송업체들은 시장에서 퇴출압력에 부닥치고 있다.
현재 1200여개에 이르는 중소규모 독립 유선방송 업체들은 미국 내 케이블 가입자의 약 17%에 해당하는 1200만명의 가입자들에게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 중소규모 독립 유선방송 업체들은 가격이나 서비스 면에서 거대 독점 미디어 업체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다.
최근에는 독점 위성방송 업체들과 케이블방송 업체들 사이의 가격경쟁이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몰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코스타는 위성안테나 설치를 무료로 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매월 9달러 정도면 100여개 채널을 보장한다.
케이블 업체들도 가격인하와 시스템 디지털화를 서두르고 있다.
위성과 유선 분야의 거대 독점업체들이 이처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영세 유선방송 업자들은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됐다.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지고 있다.
타임워너, 월트디즈니, 바이어컴 등 프로그램 공급업체들과 거대 전송업체들은 서로 결합 또는 담합하면서 고객들에게 프로그램 구입비를 낮춰주고 있지만, 영세 유선방송 업자들은 프로그램 구입에 더 많은 비용을 쓸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 구입비는 늘어만 가고 시스템 업그레이드에도 돈이 들어가는데 가입자 수는 줄어들기만 한다.
게다가 독점 업체들이 서비스 가격 할인에 나서면서 지역 케이블 업체들은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독립업체들의 사활의 몸부림, 그러나 하청화의 길 일부 소비자단체들은 케이블 독점체제에 위성방송이 균열을 내는 복병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과거 케이블 독점 업체들이 서비스 가입비를 인상하면서도 구태의연한 서비스를 계속하는 폐단의 보여왔는데, 위성방송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가격할인 마케팅을 하면서 소비자들의 편익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위성방송 가입자는 급격히 느는 반면 케이블방송 가입자는 서서히 증가하는 데 그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같은 경쟁이 가능해졌다.
사실 지난 94년 디렉티브이가 서비스를 개시할 때만 해도 케이블 독점 업체들은 위성방송을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위성방송은 전체 유료방송 시장 중 한낱 틈새시장을 여는 데 그칠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위성방송이 그들 자신의 가입자들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력적인 경쟁자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성방송 업계는 애초부터 지역이 아닌 전국을 상대로 하는데다 최근 합병 등으로 덩치를 키우면서 케이블 업계에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위성과 케이블이 치열한 경쟁관계에 들어서면서 영세한 지역 유선방송업체들은 더욱 생존근거를 잃게 됐다.
이제 이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독점적 위성방송 업체들에 기생하는 것뿐이다.
일부는 지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본방송과 결합하여 전송하는 위성중계 서비스를 시작했다.
기업 독점에서 흔히 발견되는 하청업자의 지위와 비슷한 처지로 삶을 연명해가는 것이다.
이런 불명예가 싫다면, 이제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기업을 정리하는 선택밖에는 없다.

빅브러더가 온다?

거대 기업간 합병은 지난해에도 계속되긴 했지만, 2000년 1분기를 정점으로 크게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왔다.
미국 경제의 침체, 휘발성 주가에 대한 시장의 불신 등이 기업간 합병 움직임을 억제시키고 있다.
지난해 기업간 대규모 합병은 케이블과 위성방송 업계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는 쌍방향 텔레비전과 디지털비디오리코더(DVR)의 보급 확대 등에 따른 새로운 디지털 시장의 형성과 맞물린 현상이다.
특히 위성방송 업계의 1위와 2위인 에코스타와 휴즈일렉트로닉스간 합병은 케이블 업계의 합종연횡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
미디어 업계의 대규모 합병은 시청자들의 선택의 자유를 가로막고,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저해할 위험을 낳고 있다.
미국의 미디어 시장은 2만5천여개에 이르는 미디어들이 단지 20여개의 미디어 재벌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가속화하고 있는 미디어 기업간 합병은 이같은 과점체제를 더욱 강화해, 미디어 접근과 프로그램 선택에서 소비자들이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1984년'이란 소설에서 한 사회의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지배하는 상황을 그린 바 있다.
이같은 ‘빅 브러더’ 사회와 같은 현실이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다.
뉴스, 정보, 대중문화를 소수가 지배하는 ‘빅 브러더’ 사회는 소비에트 모델을 제외한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 과점체제에서 감지된다.
끝없는 인수합병과 청산 등을 통해 미디어 자본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고, 이들이 바로 대중의식을 이끄는 신종 ‘빅 브러더’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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