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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책읽기] '당진 김씨' 우애령/ 창작과비평
[이권우의책읽기] '당진 김씨' 우애령/ 창작과비평
  • 도서평론가
  • 승인 2002.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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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은 그 무엇 고향을 다녀올 때마다 드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이곳도 이젠 다 망가져가는구나 하는 게 그것이다.
홍성에서 서산 가는 길을 넓힌다며 가로수를 ‘벌목’한 것을 보았을 때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들녘이 온통 황금물결로 넘실거릴 때 일몰을 배경으로 그 길을 달리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장담하건대, 유럽의 어느 농촌 풍경 못지않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풍광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름다웠던 풍경은 내 추억의 갈피 속에만 남게 되었다.
우애령의 연작소설집 '당진 김씨'(창작과비평사 펴냄)를 손에 잡은 데는 그것이 고향 근처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헌데, 내친 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내려간 것은 이 소설이 워낙 재미있어서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외려 소설 읽는 맛을 떨어뜨리는 것들이 즐비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토박이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당진 김씨>는, 개인적으로는 서울에 올라오신 고향 어른에게 동네 사람들 이야기들 듣는 듯한 감흥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감흥이라는 게 씁쓸한 것이기도 하다.
한참 웃고 나면 가슴 한편이 아려지는, 소극(笑劇) 같은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철강회사가 들어오고 땅값이 오르고 개발이 되면서 농촌공동체는 파괴됐다.
형제 사이의 의가 깨졌고, 전직 이장이 아파트 문지기로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집에서는 아직 꺼지지 않은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여전히 자연을 경외하는 농부의 마음에서 비롯한다.
가로등을 어디에 설치해야 하는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던 가운데 튀어나온 다음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거기 불이 서 있으문 안 되유. 안 되구 말구유. 아, 그 콩이며 깻잎이며 벼며 전부 다 밤에 어둔 디서 푹 자야 지대루 큰단 말이유. 그런디 밤새두룩 불을 켜놓으믄 원제 자믄서 부쩍부쩍 크지유?” 그래, 근대화니 도시화니 하는 물결이 우리 농촌을 덮쳐버려도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젊은 것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려도 남아 있는 자들은 여전히 삶의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사랑 남자하고 닮았다는 말을 듣고 다방레지 미스 서의 살림을 차려준 고씨의 ‘불륜’이 오히려 건강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리라. 휴대전화를 수출하려고 마늘을 수입하는 게 이 나라의 농업정책이다.
때로는 분노해 서울로 올라와 데모하는, 낙담한 얼굴과 거친 손길의 농부들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결코 도시인들의 값싼 동정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무너진 집을 다시 고쳐 들어가려는 당진 김씨의 말대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고향을 지키는 그네들의 삶이야말로 “이만허문 그려두 성공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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