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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열정의 습관' 전경린/이룸 펴냄
[서평] '열정의 습관' 전경린/이룸 펴냄
  •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 승인 2002.0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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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낯선 심연

아니 에르노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 '단순한 열정'이 지난해에 다시 번역돼 나왔었다.
작가 자신을 1인칭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직 현실 사회주의가 망하기 전의) 동유럽 국가 외교관(게다가 유부남인!)과 벌인 그야말로 열정적인 사랑을 숨김없이 썼다고 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의 미덕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고 싶고 섹스를 하고 싶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생각을 주제로 삼았다는 데에 있었다.


헝가리 출신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라는 소설도 역시 지난해에 번역 출간되었다.
쌍둥이 형제처럼 지냈던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오쟁이를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 헨릭. 그가 부인의 이른 죽음 뒤, 부정의 다른 한쪽 당사자이자 옛 친구인 콘라드를 41년 만에 다시 만나 하룻밤 동안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는 헨릭의 깨달음은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열정'이어야 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닫힌 금욕주의와 열린 쾌락주의

전경린의 신작 소설 '열정의 습관'(이룸)이 다루는 것은 말하자면 '단순한 열정'과 '열정'에서와 같은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짧은 소설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그것도 육체적 사랑을 탐색하고 찬미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다 쏟는다(소설 앞부분에서 단역급인 한 인물의 말을 통해 ‘동성애를 해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 동성애는 거의 탐색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성(性)을 소설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 작가가 넘어서야 할 일차적인 장벽은 성을 둘러싼 사회적 금기다.
그 금기는, 세분하자면, 성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사갈시하는 태도와, 성에 관한 담론을 터부시·사갈시하는 태도로 나뉠 수 있을 텐데, 작가에게 그것들은 만만치 않은 난적으로 다가온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성을 탐구하고 찬미해야 한다는 것이, 가령 '열정의 습관'과 같은 소설의 작가에게 부여된 임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첫대목은 매우 함축적이다.
작가는 주인공 미홍이 열아홉살 시절, 사랑하는 남자아이의 성기를 처음으로 손에 넣었을 때의 감촉을 화려한 비유의 연쇄로 표현한다.
그 느낌은 “뜨거운 주전자에 처음 손바닥을 데었을 때보다” “처음으로 손이 빨갛게 얼도록 얼음 조각을 쥐고 있었을 때보다” “한여름에 손 안에서 뜨거운 토마토를 으깬 기억보다” “작약 꽃송이에 고인 이슬을 한줌 가득히 털었던 기억보다” 더 강렬한 영혼의 ‘화인’으로 새겨진다.


그런데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그처럼 황홀한 감각을 선사해주었던 또래의 남자아이는 정작 ‘널 위해 참겠어’라며 지퍼를 도로 올려버린다.
남자아이의 고결한 행동에서 성에 대한 사회적 금기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결국 “사랑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충만감, 너무나 이질적인 감각의 충격, 순결성을 보호받는 연약하고 무력한 기분, 구태의연한 신파에 대한 역겨움…”이 뒤섞이는 혼란의 한순간이 지나간 뒤, 미홍은 ‘탈순결’이라는 ‘생에의 방향성’을 설정하게 된다.
그러니 '열정의 습관'은 남자아이의 닫힌 금욕주의에 대한 미홍의 열린 쾌락주의(이것은, 가능한 모든 상대와 가능한 한 많은 횟수의 성교를 하겠다는 일종의 섹스 중독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의 싸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미홍의 싸움에 전우(戰友)로서 동참하는 인물들이 있다.
여자친구인 인교와 가현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인교는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 집의 이혼한 ‘삼촌’의 ‘섹스 장난감’으로 1년의 세월을 보낸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강간에 지나지 않았던 첫경험(“몰랐어요. 터치와 삽입 사이에 그런 심연이 존재하는 줄은.”) 이후, 낮의 부드러움과 밤의 사나움을 번갈아 맛보인 삼촌 때문에 인교에게 섹스는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이 된다.



전경린, 귀기와 정념의 작가

혼란과 환멸의 청춘기를 뒤로 하고,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이들에게도 섹스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가깝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 속에 묻혀 있는 빛을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두려움 없이 이 부조리한 삶 속에 드러내는 행위”이며 특히 ‘성적 사랑’은 “모든 통합의 구체적 행위이고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라는 데에 세 여자는 대체로 동의를 이루어가고 있다.
특히 주인공인 미홍이 몸과 마음이 두루 맞춘 듯이 맞는 남자 진성을 만나 빠져드는 사랑의 열정은 이 소설의 하나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둘만의 사랑에 함몰되어 바깥 세계와의 일체의 관계를 끊은 채 “자신의 의식의 지층을 상실하고 달의 나라에서 헤엄치듯 무중력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며칠간이란 미홍과 작가의 탐색이 답을 얻은 기간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이 사랑의 정체에 관한 질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랑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생애에서 몇번째의 것일까요?”

염소를 몰고 밤의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여자를 등장시킨 첫 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1996) 이후 전경린은 ‘귀기(鬼氣)와 정념의 작가’로 통해왔다.
장편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과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거치면서는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평판을 추가로 얻게 되었다.
그 두가지 평가는 사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귀기가 느껴질 정도의 정념, 그런 정념을 발산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식의 연애는 전경린 소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전경린의 감각적이고도 본능적인 문장들은 그런 주제의식과 지향을 훌륭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비교적 단순하고 평이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열정의 습관'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전경린 특유의 살아 있는 문장들에서 온다.
가령 이런 문장들: “그것(=남자의 성기)은 남자의 일부 같지 않고, 독립적인 의식과 인격과 기억을 가진 자치 구역 같았고 육체의 바깥, 영해 바깥에 떠 있는 외로운 섬 같았다.
” “삶이란 점점 더 고급 단계로 접어드는 외국어 같아서 결국 모든 사람은 낙오하여 소통할 수 없는 세계의 잊혀진 뒷방에서 홀로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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