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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미시세계
[테크놀로지] 미시세계
  • 오철우/ <한겨레> 기자
  • 승인 2002.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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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 입자가 여는 첨단기술의 장 원자 수준의 물질 운동법칙 ‘양자현상’ 존재… 차세대 정보소자 연구 ‘열쇠’ ‘영겁’이라 해도 손색없을 150억년의 우주 나이, ‘무한’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될 만큼 가도가도 끝없는 우주공간. 우주에선 사실상 시간과 공간의 구분마저 무의미해진다.
1초에 30만㎞의 빛 속도로 수억년을 달려간 수억광년 거리의 별은 그가 수억년 전 발산한 빛을 우리 밤하늘에 보여줄 뿐 현재 존재하는가 하는 정보는 알 수 없다.
거대한 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중력 때문에 급속히 한점으로 축소해 빛조차 삼켜버리는 ‘블랙홀’은 이런 무한광대 우주의 또다른 미스터리다.
그러면 무한히 작은 미시세계는 어떨까? 원자와 분자, DNA와 단백질이 중심을 차지하는 미시세계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새로운 법칙들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에서 100만분의 1인 ‘마이크로’는 이제 너무도 익숙한 말이 됐고, 머리카락의 10만분의 1 크기인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가 첨단 미세기술의 키워드로 한창 유행을 타고 있다.
1조분의 1 단위인 피코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원자·분자 수준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의 반도체 기술은 새로운 미시의 법칙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더 작게, 더 촘촘하게’를 내세우며 초고집적화를 실현해온 반도체 기술은 전자신호가 달리는 도로인 회로의 선 폭을 얼마나 좁혀 촘촘하게 집적하느냐에 매달려왔다.
도로 폭을 줄이면 전자신호의 이동거리를 줄여 더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회로를 촘촘하게 심어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반도체 기술은 최근 0.1㎛(마이크로미터)까지 그 폭을 좁혀놓았다.
하지만 이런 집적화도 조만간 한계를 맞이할 전망이다.
강태원 동국대 교수(양자기능반도체연구센터장)는 “세계 과학기술계는 대체로 0.05㎛(50㎚)를 한계점으로 보고 있다”며 “이보다 더 작아진다면 정보를 실어나르는 전자는 새로운 물질현상을 직면하게 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자들이 골머리를 앓게 하는 새로운 현상이란 ‘양자현상’이다.
힘의 크기를 질량과 가속도에서 구하고(F=ma), 중력의 법칙이 작동하는 고전역학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미시세계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양자컴·마이크로 초정밀기계 연구 활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시세계에서 물질은 모두 ‘아날로그’다.
온도나 운동은 모두 끊김 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0.1, 0.01, 0.001 등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중간의 무수한 흐름이 이어진다.
이와는 달리 미시세계에서 물질의 운동과 위치는 특정한 하나의 값을 갖는다.
최근 세계 처음으로 레이저 빛을 고체물질의 한점에 0.001초 동안 정지시켰다 재생하는 실험에 성공해 양자컴퓨터 정보소자의 가능성을 보여준 함병승 연구원(한국전자통신연구원 양자정보통신팀장)은 “온도가 오를 때에도 계단 모양처럼 불연속의 특정한 값으로 튀어오른다”며 “운동·위치 등 모든 에너지의 불연속은 미시계의 보편법칙”이라고 말했다.
이를 0, 1, 2, 3 등 정수값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미시계 입자의 에너지는 불연속의 양을 지닌다 해서 ‘양자’(量子, quantum)라 부른다.
양자현상은 거시세계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다.
고전역학이 통하는 거시세계에선 두 물체가 한자리에 동시에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있다’고 해야 맞다.
하지만 원자·분자 수준의 미시세계에선 두 입자가 한점에 동시에 있을 수도 있으며, 한점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즉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없는 것도 아닌’ 상황이 된다.
게다가 이들 미시세계에서 입자는 막힌 벽을 그대로 투과해 반대쪽에 존재하기도 한다.
양자현상의 세계에서 입자의 위치는 확률로만 계산될 뿐이다.
“이 때문에 기존 반도체가 더욱 작아지면 전자신호를 고전물리학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며 “입자가 한곳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고 벽을 통과해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면 전자신호는 에러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이조원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장은 말한다.
김태송 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원 마이크로시스템연구센터장)은 “지금까지는 ‘전자의 흐름’으로 정보를 저장·재생했지만 이젠 전자 하나하나를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기존 반도체 기술로는 양자현상 때문에 0.05㎛보다 더 작게 집적화하기 힘들다는 예측이 나오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자를 제어하려는 차세대 정보소자 기술들이 한창 연구되고 있다.
전자를 하나하나씩 발생시켜 제어하는 단전자 트랜지스터, 전자 고유의 회전운동 방향(스핀)을 이용해 정보를 만들어내는 스핀트로닉스, 하나의 전자로 정보를 저장·재생하는 양자점 소자 등이 주목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당연히 양자현상을 어떻게 적절하게 제어할 것이냐가 차세대 정보소자 연구의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꿈의 컴퓨터’로 불리는 양자컴퓨터는 이런 양자현상을 적극 이용해 초고속 양자전산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기존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2비트만으로 정보를 연산처리하는 데 비해, 양자컴퓨터는 미시세계의 입자가 0과 1 외에 무수한 다른 비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값을 동시에 연산처리함으로써 초고속 전산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연산을 처리하는 ‘연산 바구니’를 상상해보자. 기존 2비트 방식으로는 이 바구니에 0 또는 1 가운데 반드시 하나만을 넣어 연산을 처리했다.
그러나 양자 정보소자에선 0과 1 외에 여러 비트(큐비트)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한꺼번에 연산할 수도 있게 된다.
함병승 연구원은 “이론적으로 양자컴퓨터는 0과 1 방식의 컴퓨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초고속 연산을 실현할 것”이라며 “다만 양자현상을 어떻게 제어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양자컴퓨터는 현존 슈퍼컴퓨터도 수백년 걸리는 암호 해독을 몇분 만에 끝낼 수 있는 연산능력을 지닐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보의 유지시간이 너무 짧고 재생이 쉽지 않아 실용화까지는 갈 길이 멀고 먼 분야다.
또다른 미시 분야의 연구개발로 마이크로 초정밀기계(MEMS)가 있다.
흔히 먼지 크기의 로봇, 벌레만한 헬리콥터, 혈관을 누비는 나노로봇, 연구실험 장비의 기능을 플라스틱 칩 하나에 구현하는 ‘랩온어칩’(LOC) 등을 지향하는 MEMS에서도 미시세계의 새로운 물질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엔 ‘표면장력’이 과학기술자들에게 애를 먹이고 있다.
물체가 한정없이 작아지다 보면 표면 면적은 커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나무를 두 토막, 세 토막, 네 토막 등 쪼갤수록 무게는 변함이 없어도 표면 면적의 합은 늘어나게 된다.
달리 말해, 표면 면적에서 일어나는 힘인 ‘표면장력’이 중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지는 것이다.
김태송 책임연구원은 “단위 무게당 표면 면적이 커지는데 마이크로세계에선 이런 표면장력의 영향은 무시하기 힘들 정도”라며 “이 때문에 미시세계에선 표면이 쉽게 닳아버리는 문제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 분야에선 표면장력을 줄이려는 표면처리 기술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마이크로 로봇을 구성하는 기계 구조나, 머리카락보다 훨씬 작은 랩온어칩의 미세관의 표면이 쉽게 닳아버려 내구성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돌리면 생물의 미시세계에도 새로운 현상들이 확인되고 있다.
DNA·단백질 등 분자 수준의 연구에서 미세한 환경에도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단백질 연구나, 유전형질을 복잡한 구조로 발현하는 유전자의 기능을 찾는 연구는 쉽지 않다.
또 거시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미생물들의 신비한 생명현상도 밝혀지고 있다.
바야흐로 첨단 과학기술은 극소 미시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미시세계는 인간이 지금까지 이해했던 지식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현상과 법칙들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법칙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하고 적절하게 제어하느냐가 앞으로 초미세 기술의 열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단지 크기만을 줄여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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