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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경제 위기설
[초점] 일본 경제 위기설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2.0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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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 ‘3월 위기설’이 또다시 찾아왔다.
오는 3월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연쇄도산하면서 세계 2위 규모의 일본 경제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게 핵심 줄거리다.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진 최근 10여년간 회계연도의 결산시점인 3월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3월 위기설’이 떠돌았지만 언제나 슬그머니 잦아들곤 했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체력을 모두 소진한 일본 경제가 올봄에는 금융구조 개혁이라는 대수술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난 1월31일 도쿄 주식시장에서 닛케이지수는 9997.80으로 거래를 마감해, 1985년 5월 이래 최저 기록을 보였다.
도쿄증시 제1부의 상장주식 시가총액은 2000년 2월에 비해 190조엔(1900조원)이나 줄어들었다.
2년 사이 시가총액이 40%나 줄어든 셈이다.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지난달 중순 일본의 신용등급을 ‘부정적’으로 한단계 하향조정한 데 이어, 31일에는 “일본 경제가 전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최악의 디플레이션에 빠져들 위험이 있으므로 구조개혁이 지연될 경우 추가로 신용등급이 하락할 것”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실물부문의 지표 역시 한결같이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월24일 발표된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무역흑자는 전년에 비해 31년 만의 최대 폭인 38.3%나 하락해, 3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난해 12월의 실업률은 그 이전보다 더 나빠져 5.6%를 기록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고 있는 채무는 대략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4배에 해당하는 666조엔까지 부풀어올랐다.
이처럼 10년 불황에 지친 일본 경제가 ‘최악’의 기록을 연이어 경신하고 있는 터라,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3월 위기설’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올해 봄 일본 경제가 대혼란에 빠져들 것이라는 주장의 요지는 크게 두가지다.
우선, 오는 3월말 2001회계연도 결산을 전후해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 처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리라는 점이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회계결산을 앞두고 BIS비율이 떨어질 것에 대비해 앞다퉈 채권회수를 단행하면 이는 곧 자금시장 경색으로 이어져 기업도산을 부채질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회계연도 결산을 앞두고 모두 6조5천억엔에 이르는 부실채권을 처리해야 하는 14대 대형 은행들은 대부분 상당한 적자를 면치 못할 전망이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까지 부채총액이 1천만엔 이상인 기업이 도산한 건수는 2만건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게다가 도산 예비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행렬에 가담하게 되면, 기업도산이 주거래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오는 4월부터 실시되는 ‘페이오프(pay off)’ 제도의 폐지 역시 금융위기에 불을 당길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페이오프 제도란 금융기관이 도산하는 경우 예금보험기구가 예금자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한 뒤 도산한 금융기관을 처분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IMF사태 발발 이전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금융기관이 파산하더라도 예금자의 예금자산 100%를 정부가 보상해주는 것이다.
지난 95년 지방은행이 연쇄도산하면서 한바탕 예금반환 청구 소동이 벌어지자 일본 정부는 당면한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이 제도를 2001년 3월까지 존속하기로 했다가, 또다시 올해 3월말까지 연기한 바 있다.
하지만 올해 4월부터는 정기예금에 대한 전액보장제가 해제되어 1인당 1000만엔까지만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고, 내년 4월부터는 보통예금과 당좌예금에 대해서도 전액보장제가 폐지된다.
이 제도가 폐지되면 예금자들이 부실 금융기관으로부터 우량 금융기관으로 예금을 이동시킬 게 분명하다.
실제로 지난달 24일 일본은행이 발표한 정기예금 잔액 통계에 따르면, 1000만엔 이상을 맡기는 예금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3월을 전후로 극에 달할 경우, 부실 금융기관들이 연쇄도산에 빠질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일본 금융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반영하듯,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11월 이후 꾸준한 상승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국내 경기 부양을 위한 별도의 정책수단을 이미 상실한 일본 정부가 엔화 약세를 용인하는 자세를 보임에 따라 이같은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추세가 초엔저 상황으로 빠져들도록 미국 정부가 장기적으로 용인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김양희 일본팀장은 “월가 출신의 경제브레인에 의해 움직여졌던 클린턴 정부와는 달리, 현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제조업계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폴 오닐 재무장관에 의해 이루어진다”며 “이런 점에서 미국 정부가 엔저현상을 무작정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특히 지난 90년대 후반의 엔저현상 당시에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던 반면, 현재는 미국 경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엔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금융연구원 장원창 부연구위원은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에 비추어 봤을 때 현재의 엔화 약세는 당연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미국 경제가 뚜렷하게 회복세를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엔저현상을 무작정 용인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거품경제 붕괴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 천문학적인 규모의 부실채권이 바로 일본 경제를 뒤흔들 시한폭탄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한다.
현재 일본 정부는 부실채권 규모가 약 70조엔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외국의 평가는 이보다 훨씬 싸늘한 편이다.
예컨대 로이터통신은 170조엔, 골드먼삭스는 237조엔으로 추정하는 등 대부분 외국기관들의 평가는 일본 정부의 추산치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GDP 대비 부실채권 규모만 놓고 따진다면 일본은 68.6%에 이르러 아르헨티나의 52%보다도 오히려 높은 상태이다.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최근호에서 일본 내 부실채권의 50% 가량이 야쿠자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분석을 내놓아 주목을 끈 바 있다.
부실채권의 절반 가량에 대해서는 아예 회수할 생각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냉정한 지적인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일본 사회의 시스템에 비추어 볼 때, 부실채권을 털어내고 구조개혁을 이루어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지난달 미국의 K마트가 113억달러의 채무를 갚지 못해 파산에 이른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경제 부실경영의 대명사로 꼽히는 유통업체 다이에가 170억달러의 채무를 지고도 정부의 구제 결정에 따라 생명을 연장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구조개혁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자민당의 표밭이 대부분 현재 부실은행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방은행의 본거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조개혁이 거듭 지체될수록 일본 경제의 근본적인 위기를 알리는 ‘위기설’의 잠재적 폭발력은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일본경제 위기의 파장은?

현재 일본이 미국에 투자해놓고 있는 돈은 약 1조8천억달러에 이른다.
미국 국채의 3분의 1을 소화할 수 있는 규모다.
만일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위기에 빠질 경우 이들이 미국에 투자한 돈을 일시에 회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본경제 ‘위기설’이 나올 때는 언제나 ‘일본발 세계공황’ 시나리오가 따라 나온다.
이밖에 급격한 엔화환율 상승은 아시아 각국의 환율을 동반 상승시켜 국제 외환시장의 불안을 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엔화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의 환율은 각각 13%, 10.31%, 47.26% 동반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가장 역동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 위안화의 절상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다.
지표상으로 보자면 중국 위안화는 상당한 절상압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엔화환율이 상승하더라도 위안화는 충분히 버틸 능력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경제연구원의 정상은 박사는 “중국으로서는 평가절상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평가절하의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나마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고 전망했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급속한 자본유입을 필요로 하는 중국으로서는 최근의 환율 흐름에 변화를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가 원화에 미칠 파장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금씩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화는 지난해 11월말부터 엔화와 함께 동반 약세를 보이기 시작해 원화와 엔화 사이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원화에 비해 엔화 가치의 절하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국내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김양희 일본팀장은 “한국의 경우 금융구조조정이 일단락되어 엔화와 동일한 폭으로 동조현상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내제조업 일부분야에는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했다.
다만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의 강삼모 부연구위원은 “유로화 출범 이후 기축통화로서의 엔화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으며,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동아시아 경제의 맹주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자국만을 위한 엔저정책을 계속할 경우 장기적으로는 일본 자신에게도 불이익이 될 것"이라는 지적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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