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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환경은 ‘동토’ 잠재력은 ‘무한’
[IT] 환경은 ‘동토’ 잠재력은 ‘무한’
  • 서현진(전자신문)
  • 승인 200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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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전문기자의 북한 견문록… 장비수준 열악하지만 육성 의지·개발 의욕은 대단 중국을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은 2월6일 오후 2시10분이었다.
베이징 수도공항을 이륙한 지 1시간15분 만이다.
서울 출발시각은 하루 전날인 5일 오전 10시였다.
따져보면 평양까지 28시간10분이 걸린 셈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바로 가면 230km 남짓, 비행시간으로는 30~40분이면 충분할 것을 멀리 돌아온 것이다.
입국수속을 밟는 2시간은 흥분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IT 분야에서는 북한을 최초로 방문하는 남한 기자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다.
북한의 IT 현황을 단 한가지 사실만이라도, 보고 느낀 그대로,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감이 느껴졌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직접 가본 곳은 조선콤퓨터쎈터(KCC)와 함께 북한에서 양대 IT 전문기관으로 꼽히는 평양정보쎈터(PIC), 그리고 대학 가운데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였다.
개발장비 펜티엄Ⅱ·Ⅲ급 주류 무엇보다 평양정보쎈터를 방문하고 놀란 것은 그곳에 있는 시설과 장비가 남한에서 생각하는 만큼 ‘구식’이 아니라는 거였다.
180여명의 연구원이 일하는 평양정보쎈터에서 이용하고 있는 개발장비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미국산 펜티엄Ⅱ나 펜티엄Ⅲ급이 대부분이었다.
주변기기들 역시 남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휴렛팩커드와 텍트로닉스 제품이 주류였다.
평양정보쎈터는 다매체실, 서체실, 문서편집실, 캐드(CAD)실, 언어정보실 등 모두 18개 개발실로 조직돼 있었다.
다매체실에선 일본으로부터 수주했다는 이동전화용 가라오케 프로그램을 한창 개발중이었다.
동행했던 남한의 한 기업인은 개발 내용을 보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계약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서체실에선 ‘청봉체’나 ‘흑등근체’와 같은 북한 고유의 서체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언어정보실은 북한이 자랑하고 남한에도 널리 알려진 음성인식 프로그램 ‘인식’을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다.
북한쪽 안내자는 프로그램을 시범해 보이면서, 단어를 미리 녹음해놓았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막기 위해 우리 일행 가운데 한사람에게 직접 실험해보도록 권했다.
개발실 책꽃이에서 무작위로 책 한권을 골라 그것으로 실험해보게 한 것이다.
‘인식’은 가장 어렵다는 숫자까지 척척 알아맞췄다.
캐드실의 자랑거리는 중국과 이집트 등에 수출했다는 2차원 캐드 프로그램 ‘들’이었다.
평양정보쎈터 관계자는 ‘들’을 이용해 신발을 설계하는 과정을 시범해 보였다.
사람의 발 모양이나 발가락의 굴곡에 따라 신발 모양을 계산해내는 처리과정이 아주 유연해 보였다.
문서편집실에선 북한의 표준 워드프로세서인 ‘창덕 6.1’을 윈도우98 환경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고 있었다.
18개 개발실을 견학하는 데만도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는 연구개발 부문과, 캠퍼스 안 수십 동의 건물을 광케이블로 관장하는 종합정보처리실 등 두 부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은 이 가운데 9개 연구실로 구성된 연구개발 부문만을 우리에게 공개했다.
연구개발 부문은 관련 학부들과 연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구개발 활동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개발한 멀티미디어 콘텐츠 가운데 예를 들어 ‘조선 동식물편람’은 생물학부, ‘고문전자편람’은 국어학부와 각각 공동연구를 한 결과라고 한다.
3D팀은 미술학부와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3D팀은 미술학부와 함께 영화 <타이타닉>을 뛰어넘는 대작 영화를 만들겠다는 큰 포부도 내비쳤다.
연구실 장비 수준은 평양정보쎈터와 비슷했다.
PC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배려해주신 선물”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어 이채로웠다.
네트워크는 56Kbps급 모뎀으로 종합정보처리실은 학교 안의 종합전산실 역할을 하는 동시에 북한의 주요 기관들을 56Kbps급 모뎀으로 연결하는 기능도 맡고 있었다.
이런 네트워크로 북한 어느 곳에서나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작’(勞作) 등 각종 정보 검색이 가능하다고 한다.
4박5일 동안 북한의 IT 기관들을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느꼈던 점은 북한이 IT에 거는 기대와 의지, 그리고 잠재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발 환경이나 장비 수준은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PC만 해도 윈도우 운영체제가 조선글로 돼 있지 않아 응용프로그램 개발이나 사용자 환경의 확대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조선글 구현 프로그램이 ‘단군’이다.
하지만 ‘단군’을 직접 개발한 평양정보쎈터의 한 관계자는 “윈도우95이나 98까지는 단군을 큰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윈도우NT나 윈도우XP에서는 기술적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이 이뤄지도록 남한이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우리 일행에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바세나르협정 때문에 중대형급 컴퓨터 환경의 구축이 어렵다는 제약조건도 북한의 IT 발달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바세나르협정은 한국과 미국 등 세계 33개 나라가 96년에 맺은 협정으로, 컴퓨터를 비롯해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물자를 북한에 보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평양정보쎈터나 김일성종합대학의 장비 대부분이 PC급에 한정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밖에 북한 당국의 통제로 자유로운 인터넷 접근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고, 기술자들의 기술습득이나 일반 국민들의 컴퓨터와 인터넷 이용에 도움이 되는 전문서적도 크게 부족한 듯했다.
연구원들이 영어나 일본어로 된 전문서적들을 일일이 사전을 찾으며 참고하는 모습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전문기관 외의 일반 IT 환경도 뒤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방문단 일행이 묵었던 고려호텔은 평양 시내에서 두곳밖에 없는 특급호텔(별 다섯개 등급)이었다.
그럼에도 대연회장 카운터에 있는 PC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속도가 10MHz에 불과한 286급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남과 북의 IT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북기간 중 만난 많은 사람들과, 직접 방문해본 기관의 모습을 통해 북한이 IT에 매우 큰 희망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평양정보쎈터 총사장의 방에 걸린 김정일 위원장의 어록, “전자계산기화는 기술혁명의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라는 문구만 해도 그랬다.
김 위원장이 최근에 써줬다는 ‘평양정보쎈터 일꾼들에게 보내는 감사문’의 일부인 이 어록에선 IT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인식수준뿐 아니라, 북한 당국의 IT 육성 의지나 생각까지 엿볼 수 있었다.
“건축 뛰어넘는 진짜 종합예술” 북한 기술자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연하고 깊은 사고를 하고 있었다.
평양정보쎈터를 책임지고 있는 최주식 총사장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건축학도 출신인 그는 남북간 IT 교류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여러 현실적 제약들에 대해 “합의할 일이 있으면 시간 끌지 말고 화끈하게 끝내자”고 말했다.
그는 IT에 대해선 “유무형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건축을 뛰어넘는 진짜 종합예술”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전형적 학자 모습인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쎈터 정우환 소장은 “북남 IT 교류는 당장 이익을 구할 수 있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이익을 구할 수 있는 토대를 먼저 구축할 수 있느냐가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평양 체류 마지막날인 2월10일 오전 10시. 일행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 4박5일 동안 북한에서 보고들은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앞에 쓴 대로 무언가 한가지는 남한 독자들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최주식 총사장이 전날 밤 만찬 때 내게 들려준 결연한 메시지였다.
“IT의 북남 교류를 통해 전세계 만방에 우리가 최고로 우수한 민족임을 과시합시다.
한글 전문도서 절대적 부족
북한의 평양정보쎈터는 지난 4월 남한의 IT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일IT포럼을 통해 한글로 된 IT 전문도서 200여종를 기증해달라며 도서목록을 보내왔다.
목록 대부분은 남한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는 기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관련 전문서적들이다.
도서 발간연도는 80년대나 90년대 초반의 것도 있지만 대다수는 최근 것들이다.
북한이 이처럼 도서기증을 요청해온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안에 한글(조선글)로 된 전문도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IT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지만, 관련 서적 출판 현실은 열악하다.
이 때문에 북한의 IT 관련기관에서 일하는 개발자들은 물론 IT 시설 이용자들은 대개 일본어나 영어판 서적을 직접 구입해 현업에 참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한의 책들이 북한에 직접 전달되면 남한의 IT 동향을 객관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
따라서 전문도서 기증은 궁극적으로는 남북한간 IT 교류 확대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한 IT의 수준과 흐름, 남한 업계와 학계 분위기, 전문가들의 ‘생각’ 등이 책을 통해 북한 전문가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된다면 그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직접 효과는 남북한의 IT 전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술적 이질감의 해소일 것이다.
북한쪽에서 기증을 요청해온 도서목록은 컴퓨터일반 73종, 멀티미디어 57종, 코드·서체 70종 등이다.
컴퓨터일반 분야 문자(한글), 음성, 화상 등 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 관점에서의 처리방법론에 북한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한글코드, 음성인식, 알고리즘 등 프로그래밍의 기초 지식과 기술 분야에서 북한은 남한 도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단순히 애플리케이션 개발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론·학문적 기초도 탄탄히 다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분야 요청해온 도서목록을 보면 북한이 아직 핵심기술인 엠펙(MPEG)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
영상매체 제작과 관련한 도서를 많이 요청한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사회주의 선전수단인 영상물의 디지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리, 꽃, 동식물, 자연풍경 자료와 사진집 등이 목록에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은 북한이 콘텐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낸다.
서체, 코드 분야 전체적으로 볼 때 서체, 코드는 북한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로 파악된다.
북한은 기존 운영체체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도 코드, 서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글처리 분야에서는 한글의 구성원리에서부터 높은 수준의 한글처리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서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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