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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란츠 파농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 패트릭 엘렌 /우물이 있는 집
[서평] '프란츠 파농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 패트릭 엘렌 /우물이 있는 집
  • 장태민 기자
  • 승인 2002.03.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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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자의 고독

2001년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 마르티니크 출신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이 사망한 지 40주기가 되는 해였다.
그가 해방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알제리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그를 추억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그의 40주기는 별로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 전해인 2000년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전세계가 떠들썩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체 게바라가 죽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기업들의 사업 아이템이나 마케팅 전략으로까지 이용됐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사실 국내에서 프란츠 파농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기껏해야 진보적인 체하는 대학생들의 ‘사상 교재’ 따위에나 간혹 이름을 걸칠 뿐이다.
하지만 그의 무게는 결코 체 게바라보다 가볍지 않다.
‘체’처럼 근사한 베레모에 시가를 물고 있는 멋진 이미지 사진은 없지만.


진정한 혁명가, 프란츠 파농

파농과 체 게바라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의사 출신이고, 다른 나라의 해방을 위해 생을 불살랐다.
체 게바라는 남아메리카의 미래를 고민했고, 파농은 아프리카의 해방에 천착했다.
덕분에 거대한 두 대륙에 해방의 불길이 여울여울 타올랐다.
두사람은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상 놀음’은 아무 짝에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몸소 뭔가를 보여주려다 보니 두 거인은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파농의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는 그의 사상이나 투쟁기를 담은 저작이라기보다 잔잔하게 그의 고민을 따라간 책이다.
책 제목처럼 그는 늘상 자신이 누군가 하는 물음을 달고 살았다.
그의 이름 앞에는 혁명가, 정신과 의사, 실존주의자, 선각자 등 갖가지 근사한 수식어구가 붙기도 하지만, 때론 악마나 교주에 비유되기도 한다.


파농이 태어난 마르티니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그랬던 만큼 프랑스는 모국이었고, 출세를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잘해야 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원주민들은 ‘볼이 발그레해져서 집에 돌아갔습니다’ 따위의 프랑스어 문장을 암송했다.
우리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웠던 ‘살색’이 실은 ‘백인의 우아한 피부색’이었듯이.

그는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상류계급의 흑인들은 무조건 프랑스를 추앙했고, 그들과 비슷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대가는 ‘지역의 유지’나 ‘지식인’이라는 직함으로 보상받았다.
그렇지만 결코 뱅충맞은 아이가 아니었던 파농에겐 이런 것들이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그는 프랑스군에 가담해 독일군에 맞서 싸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부상을 당하지만, 백인 장교들을 감동시키고 훈장도 탄다.
하지만 대가는 고뇌라는 쓴 열매로 보상된다.
프랑스군의 편제 역시 흑인과 백인을 엄격하게 구분했고, 프랑스인들은 늘상 우월의식을 가지고 ‘아군’들을 대했던 것이다.


그가 학업을 위해 머물렀던 파리에는 사실 흑인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어지럽힌 건 무수한 흑인들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강제적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는 ‘인종의 범주’였다.
좋든싫든 ‘대국’ 프랑스가 규정해주는 2등 시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우리의 오랜 식민지 마르티니크의 원주민’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방황했다.
언어의 질서라는 게 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먹물 근성에 전 사람들이 대학 학번 따위로 인간관계의 물꼬를 트려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다양성을 얘기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못지않게 편협한 치들이 많듯이.

파농은 식민지의 프랑스인이었지만 프랑스인이 아니었고, 백인들이 만들어준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지만 백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파농 역시 선택받은 몇 안 되는 흑인이었다.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거기서 사상의 토대를 굳건히 닦았다.
하지만 그는 솔직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관심은 온통 ‘인간의 진정성’이나, ‘인간 해방’이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파농은 공부를 마친 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건너가 정신과 의사로 근무한다.
거기서도 그는 규정된 질서가 기실 질서라고 하기엔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고의 혁신’은 여기서도 그칠 줄 모른다.
그는 환자들을 감금하다시피 해 치료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진실한 인간으로 대하라!

파농은 폐쇄적인 치료방식에 곧바로 반기를 든다.
운동시간이나 산책시간을 늘리고, 환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늘린다.
그는 환자를 ‘문제가 있는 열등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진실한 인간으로 대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환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파농은 정신병도 결국 한 사회라는 큰 울타리에서 일어나는 병리현상이므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회를 치유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는 도중에 그의 병원은 자연스레 알제리해방전선(FLN)의 은신처가 된다.
물론 프랑스 식민주의자든, 알제리 혁명군이든 상관없이 그의 병원에 들락거린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알제리해방전선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식민지 해방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아프리카 각국을 여행하며 동지들을 규합한다.


알제리 해방에 뜻을 같이하는 프랑스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엔 고매한 철학이나 도덕성을 내세워 프랑스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지만,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일에는 선뜻 나서주질 않았다.
그는 몹시도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갈 길을 간다.
알제리 해방을 위해 몸을 바쳤고, 아프리카의 독립을 위해 거대한 대륙을 누빈다.


이 책은 파농 철학에 관한 이론서가 아니다.
물론 그의 고매한 사상에 중점을 두는 저작도 아니다.
그보다는 파농의 방황과 고민, 인간사회에 대한 ‘진짜’ 지식인의 성찰을 읽을 수 있다.
쉽고 경쾌한 문장으로 씌었지만 책이 주는 무게는 결코 녹록지 않다.


특정 인종이나 사회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전세계에 만연돼 있다.
다만 좀더 교묘한 모습으로 낯빛을 바꿨을 뿐이다.
그 편견은 정치나 경제, 사회나 문화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포츠 경기 같은 데서도 가증스런 마스크를 드러낸다.
쉽게 쓴 파농의 평전 <나는 누구인가>는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도 좋을, 고민해봐야 할 정체성과 세상의 질서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책을 읽으면 그가 왜 프랑스인이자 알제리인이고, 심지어 한국인이기도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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