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7:03 (금)
[편집장메모] ‘킬조이’란 말의 뜻은
[편집장메모] ‘킬조이’란 말의 뜻은
  • 편집장 이주명
  • 승인 2002.03.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쎄요. 공직을 맡기에 무슨 결격사유가 있는 분은 아니지만…. 한은 총재가 해야 할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낼 수 있는 분인지는 모르겠네요.” 한은 총재에 내정된 박승 공적자금관리위원장에 대해 한은의 한 고참 조사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나 한은 부총재를 지낸 류시열 은행연합회장이 적임자라는 생각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가 말한 ‘한은 총재가 해야 할 역할’이란 물가안정과 건전한 금융질서 유지를 위해 정치권과 정부로부터 독립된 자세로 소신있게 통화신용 정책을 이끌어나가는 것이겠지요. 마침 경기회복 초기인데도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급등하는 등 때이른 거품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고, 올해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도 예정돼 있어 정치 바람에 초연한 한은 총재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점입니다.
박 내정자 본인으로서는 섭섭하겠지만, 임명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차기 한은 총재에 내정한 데 대한 반응은 한은 안이건 밖이건 그리 흔쾌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은 노조는 일단 호의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사석에서 만난 한은 내부 직원들은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언론들도 대체로 수용하는 보도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가 물가안정보다는 경제성장에 관심이 더 많고 과거 건설교통부 장관 재임 시절에는 분양가 자율화 발언으로 집값 폭등의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일부 미심쩍은 평을 했습니다.
재경부와 청와대가 믿는 사람은 대체로 한은 입장에서는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사람이기 십상이지요. 그가 내정 사실을 전달받은 뒤 처음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들도 세간의 우려를 크게 했습니다.
그는 “지금 경기가 문제될 정도로 과열되지는 않았다고 본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그 다음날인 3월20일 주가가 급등해 지수 900선을 돌파한 데는 여러 다른 변수들도 있긴 했지만, 그의 발언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말 한마디로 금융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한은 총재직에 내정된 사람이 정식 취임도 하기 전에 경기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분명한 어조로 발설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은행 또는 중앙은행 직원을 가리키는 별칭 중에 ‘킬조이‘(Killjoy)라는 말이 있습니다.
‘흥을 깨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오랜만에 완연해진 경기회복의 기운에, 계속 오르기만 하는 주가에, 두툼해지는 월급 봉투에 모두들 흥겨워하고 있을 때 거품 경고 사이렌을 울려주고, 돈 값인 금리를 올려 적당히 찬물을 끼얹어주는 ‘악역’은 중앙은행말고는 달리 할 곳이 없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